제381화. 천영호
“큭큭…이게 바로 우리 전갈문의 비장의 무기다. 독종을 끝장내기 위해 준비해뒀지.”
주위의 반응을 확인한 전산은 킥킥대며 역겨운 독향을 풍기는 파란 곤봉을 휘두르며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준이 고개를 숙여 곤봉을 피하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살기를 감지한 이준은 반사적으로 검은 송곳을 휘둘렀다.
캉!
“제길!”
그의 등 뒤를 공격한 것은 바로 하늘전갈의 거대한 꼬리였다. 검은 송곳과 마수의 단단한 꼬리가 맞부딪히자, 마치 두 개의 단단한 쇳덩이가 부딪힌 것처럼 불똥이 튀며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젠장…저 호각으로 마수를 조종하는건가?’
이준은 손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을 참으며 전산의 손에 쥐어진 호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등 뒤의 마수가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번개같이 새까만 집게발을 내뻗었다.
숨 돌릴 틈 없는 공세에 이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후퇴하려는 순간, 갑자기 하늘 전갈이 처량한 울음소리를 내며 집게발을 집어넣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이준이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앳된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녀석은 내가 처리하지. 이준 넌 저 자식부터 신경 써.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여리여리한 여자 아이의 목소리에 이준과 전산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 전갈의 앞에는 보라색 말총머리를 휘날리는 조그마한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소녀는 민첩하게 하늘전갈의 공격을 피해내기 무섭게 번개처럼 놈의 단단한 집게발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작은 손이 전갈을 때릴 때마다 철이 부딪히는 듯한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마수의 커다란 몸뚱이가 연신 뒤로 밀려났고,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귀신에 홀린 듯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잇지 못 했다.
단단한 주먹이 몇 번이나 자신의 몸을 내리치자, 하늘 전갈의 거대한 동공에 광기 어린 붉은 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연이은 공격에 성이 난 괴물은 거대한 집게발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댔지만, 보람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은 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가볍게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해내던 보람은 금세 질렸다는 듯 짜증 섞인 표정으로 손을 뻗어 전갈의 거대한 집게발을 붙잡았다. 그 순간, 밤톨만한 체구의 여자아이의 몸 속 깊은 곳에서 진한 보라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보람은 자신의 몸보다 수 십 배는 커다란 마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그것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세차게 바닥에 내리 꽂았다.
콰앙!
거대한 마수의 몸이 땅 위에 쳐 박히는 순간, 지축이 뒤흔들리며 뿌연 먼지가 온 산을 뒤덮고, 곳곳에서 처참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독종의 투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꺼내든 비장의 무기에 의해 전갈문의 투사들이 쓰러지자, 독종의 투사들 사이에서 웃음 섞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키이익!”
주먹만한 꼬마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6레벨 마수는 분노에 찬 비명 소리를 내지르고 보람을 노려보며 미친 듯이 돌진했다. 하지만 이를 본 보람은 겁을 먹거나 화를 내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릴 뿐 이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이준은 사색이 된 전산을 바라보며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
“비장의 무기가 이렇게 되버려서 어찌 하시나?”
상대의 비웃음에 가뜩이나 화가 나있던 전산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애송이…하늘 전갈이 없다고 해서 내가 너 따위를 이기지 못할 것 같나?”
“글쎄, 내가 당신을 붙잡고만 있어도 승기가 넘어올 것 같은데? 게다가 당신이 날 이길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이준의 말에 벌겋게 달아올랐던 전산의 얼굴이 시커멓게 어두워졌다.
독종에서 무려 다섯 명의 장로를 빼오고 하늘 전갈까지 준비했건만, 어느새 다섯 명의 장로가 모두 죽고 비장의 무기인 6레벨 마수마저 왠 조그마한 계집애 하나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독종을 꺾고 쉽게 구름 제국을 접수할 수 있으리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지금 수세에 몰려있는 것은 전갈문 이었다.
심지어 쉽게 상대를 꺾고 합류하리라 생각했던 전필환마저 고전을 면치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새파란 애송이 때문이었다.
‘빌어먹을…천예슬이 저렇게 강할 줄이야. 게다가 이 정체불명의 애송이는 대체 어디서 튀어 나온 거지?’
그 때,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달아오르며 청록색의 화염 덩어리 하나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고, 이에 깜짝 놀란 전산은 황급히 파란 곤봉을 휘둘러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지금 한눈 팔 때가 아닐 텐데?”
“이런…개자식이!”
계속되는 도발에 눈이 뒤집힌 전산은 이를 악물고 이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에 이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은 송곳을 휘두르며 침착하게 상대의 공격에 맞섰다.
새파란 하늘 위에서 검은 색의 송곳과 푸른색의 곤봉이 교차하는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귀청을 때렸다.
“전산! 어서 신호를 해서 그 자를 불러내!”
그 순간, 아라와 대결을 펼치고 있던 전필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전필환의 외침에 전산의 표정이 더욱 크게 일그러졌다. 전갈문의 최강자는 전필환이라지만, 문주인 자신이 20살을 갓 넘어 보이는 애송이 하나 쓰러뜨리지 못해 지원군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 못내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전투가 길어진다면 전갈문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름이 없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마음을 굳힌 전산이 저장반지 안에서 작은 회색의 돌덩이 같은 것을 꺼내 깨부수자, 사방으로 회색 가루가 흩날리며 짙은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음험한 기운을 가득 담은 안개가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던 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손을 멈추고 전산과 이준을 바라봤다.
머나먼 하늘에서 정신없이 대결을 벌이던 아라와 전필환마저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큭큭, 천예슬. 우리 전갈문에 투종 강자가 한 명 더 있으리란 건 생각도 못했겠지? 오늘 제대로 결판을 내주마.”
아라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자, 기세가 오른 전필환이 전갈머리가 새겨진 지팡이를 휘두르며 웃음을 지었다.
“킬킬, 전필환. 네 녀석도 저 계집을 어찌 못한단 소린가……”
곧이어 짙은 회색의 안개 사이에서 탁한 목소리 하나가 새어나왔다.
“이 계집의 실력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군. 하지만 자네가 도와준다면 이 구름제국에서 독종을 뿌리 뽑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내가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지. 그렇지만 그 대가가 뭔지는 잘 알겠지?”
천영호의 말에 전필환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잠시 망설이다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게. 자네가 필요한 것들을 다 바칠 테니까.”
“좋아.”
상대의 확답을 듣자마자, 어두컴컴한 안개 속에서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사슬이 튀어나왔다.
“역시 네 놈이였군!”
그 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분명히 네게 기회를 줬다. 그 기회를 차버린건 네 년이지. 계약이 파기 되었으니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다른 상대를 찾을 수밖에.”
“흥, 손 잡을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걸 알게 해주지.”
“내가 할 소리를 네 년이 대신 하는군.”
아라와 대화를 나누던 천영호는 다시 한번 음산하게 웃으며 곧바로 전필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여자를 잡아놔. 나는 독종놈들의 영혼을 흡수한 뒤 합류하지.”
말을 마친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이자,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검은 사슬이 폭발적인 기세로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멀리 있던 두 투왕의 가슴을 꿰뚫었다.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검은 사슬은 굴비 엮듯 두 투왕의 시체를 높이 들어 올렸고, 곧이어 독종의 두 투왕의 시신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천영호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역시…연금술사들의 영혼은 아주 맛이 각별해. 그 빌어먹을 놈들만 아니었어도 연금술사들을 사냥하고 다녔을 텐데…”
천영호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독종의 강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을 쳐댔다.
한편, 이준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자신의 영혼 탐지 능력을 활용해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천영호의 실력은 도영호보다는 조금 약한 듯 했지만, 투종 단계를 넘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하! 이제 모두 끝났다! 저 자가 온 이상 독종은 끝장이야!”
이준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은 것을 확인한 전산은 승리를 확신한 듯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쯧쯧, 전갈문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겨우 1성 투황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도 해결하지 못하고 나를 불러내다니.”
하지만 천영호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차며 자신을 비웃자, 전산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확실히 한 세력의 장이 아직 뺨에 홍조도 가시지 않은 1성 투황 하나 처리하지 못 한다는 것은 망신살이 뻗칠만한 일 이었다.
말을 마친 천영호는 곧바로 검은 사슬을 이준에게로 내던졌다.
쉭!
하지만 자신의 사슬이 이준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지나치자, 시종일관 그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기분 나쁜 미소가 사라졌다.
“킥킥. 내가 널 얕봤구나. 투황 두 명을 죽였다는 말이 사실인가보군.”
상대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확인한 천영호는 곧바로 염력을 끌어올렸다.
“그렇지만 이것도 피할 수 있을까?”
다음 순간,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기이한 안개 속에서 여덟 개의 사슬이 튀어나와 사방에서 이준을 덮쳤다. 하지만 이준은 여덟 개의 사슬을 보고도 뒤로 도망치기는 커녕 가만히 선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은 사슬들을 바라볼 뿐 이었다.
“이런…”
저항조차 포기한 듯한 이준의 반응에 독종의 강자들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너무나도 강한 상대의 실력 앞에 이준이 저항하기를 포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들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비웃 듯 갑자기 이준의 몸 앞에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며 여덟 개의 사슬이 모두 보란 듯이 이준을 빗겨나갔다.
“투종!?”
공간을 왜곡시키는 것은 오직 투종 강자만이 가능한 것이었으니, 주위에는 일순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눈을 씻고 쳐다봐도 이준의 실력은 1성 투황에 불과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전장이 떠들썩해졌다.
“어떤 놈이 숨어 있는 거냐!”
“놈이 아니라 년이다. 버러지 같은 것.”
그 순간, 얼음 같이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여인이 내뿜는 압도적인 기세 앞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종주님이 불러오신 지원군이 투종 강자라고?”
메두사의 등장에 독종의 강자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 했다. 공간을 왜곡시키는 것은 투왕의 날개와 마찬가지로 투종 단계에 이르렀다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눈앞에 나타난 여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투종 계급의 강자가 분명했다.
“기어이 이 일에 끼어들겠다는 건가?”
천영호가 차가운 눈길로 메두사를 훑어보며 물었다.
“이 놈은 내가 맡지.”
싸늘한 표정으로 천영호를 바라보던 메두사는 곧바로 손을 뻗어 뱀 모양의 장검을 소환했다.
“그래. 조심해. 난 다른 녀석들을 해결한 다음 다시 와서 도울게.”
이준이 메두사와 전산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걱정 마.”
메두사의 입 꼬리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에 이준 역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뒤로 물러섰다.
“킥킥. 정신 나간 계집이로군. 감히 우리 영혼의 궁전에 칼을 들이밀다니.”
“흥, 이름만 번지르르하지, 별로 대단할 것도 없던걸?”
메두사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장검을 튕기자, 청명한 소리가 하늘 가득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