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화. 전필환
아침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가 산등성이 위로 솟았고, 이내 독종의 진영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곧이어 날카로운 소리가 산을 가득 메우더니 순식간에 무수한 강자들이 모여들어 개미떼마냥 전갈산으로 돌진했다.
독종 군대가 전갈산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종파의 강자들이 본격적으로 맞붙자, 양측의 장로들이 하나 하나 전투에 참여하며 순식간에 산 전체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준은 냉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적들을 소리 없이 잿더미로 만들며 앞으로 전진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에 선두에 있던 중년의 강자 하나가 이준을 향해 손을 모으며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다시 전장으로 몸을 날렸다.
“다른 곳은 좀 어때?”
이준이 텅 빈 허공을 보며 질문을 던지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메두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쁘지 않다. 빠른 곳은 벌써 반이나 올라갔으니까. 다만…전갈문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강자들을 투입하지 않은 것 같군. 투왕급 이상의 강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저쪽도 본격적으로 강자들을 투입하기 시작하면 지금처럼 수월하게 전진할 수 있지는 않겠지.”
“전필환에 영혼의 궁전까지 생각하면 더욱 쉽지 않겠네…넌 최대한 기운을 감추고 숨어 있어줘. 결정적인 순간에 허를 찌를 수 있게.”
이준의 말에 메두사는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참, 보람이는?”
이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질문을 던지자, 메두사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독종의 강자들과 함께 최전방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 쪽이 가장 먼저 전갈문까지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더군.”
“어휴…그래…어지간한 실력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보람이가 위험할 일은 없겠지. 우리도 속도를 올리자고.”
이에 이준의 입에서도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동시에 날개를 펼쳤다.
한편, 공중에서는 투왕 강자들이 형형색색의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양측의 강자들은 모두 상황이 좋지 않으면 곧바로 달아나 자신의 진영 안으로 숨어 들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사상자는 나오지는 않고 있었다.
이준 쪽 두 사람은 꿋꿋이 상대의 방어를 뚫고 위쪽으로 향해 어느새 산봉우리와 가까운 곳까지 도착해 있었다. 산꼭대기는 도끼로 위를 잘라낸 것처럼 평평했고, 그 평지 위에는 거대한 문이 세워져 있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밖에 독종 사람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독종의 강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하자, 별똥별 같은 빛줄기 몇 개가 번쩍이며 산 정상으로 날아왔다. 아라와 독종의 장로들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우리 독종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생각했나?”
“하하. 독종 종주가 그리 대단하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군.”
아라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독 안개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곧이어 새까만 독안개가 들끓더니 그 안에서 사람들이 튀어 나와 독종의 강자들을 섬뜩하게 노려보았다.
전갈문의 강자들을 둘러본 이준은 오늘 일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오늘 전쟁, 역시 엄청 위험하겠는걸……”
전갈문의 수많은 강자들 중 가장 앞에는 음침한 인상의 사내 하나가 서 있었는데, 주변에 서 있는 강자들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만 보아도 그가 바로 전갈산의 주인인 전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내의 등 뒤로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다섯 명의 노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다섯 명의 노인은 모두 투황 수준의 강자였으나, 그 중 셋은 투황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다섯 명의 투황 뒤로는 다시 십 여명의 투왕 이 나란히 서있었다.
“전필환은 어디 있지? 그 노인네를 불러 와.”
아라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전갈문의 문주인 전산이 킬킬 대며 고개를 저었다.
“큭큭. 천예슬, 정말 오만하군. 너 따위가 전필환의 상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사내의 조롱 섞인 한마디에 아라의 눈빛에 서늘한 한기가 서렸다. 그녀가 말없이 팔을 휘두르자, 짙은 회색 염력이 폭발적인 기세로 날아갔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전산은 황급히 염력을 끄집어 냈고, 다섯 투황들은 일제히 전산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염력을 주입했다.
거대한 염력이 주입되자 전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곧이어 그의 양 손에서 여섯 사람의 힘이 합쳐진 거대한 염력 기둥이 형성되며 아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제법이군. 내 공격을 막아내다니.”
자신의 염력이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본 아라는 그들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반면 전산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방금 전 쏟아낸 염력의 양이 너무 방대해 혈관에서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몇 번 만 더 이런 짓을 했다가는 혈관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모란종의 세 장로처럼 특별한 비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타인의 염력을 이용해 운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이었다.
“흥, 어디 얼마나 더 버티나 보지.”
곧이어 수 십 개의 빛줄기가 그녀의 몸에서부터 솟구쳐 나오며 전갈산을 뒤덮었다. 진득한 회색의 염력이 닿는 곳마다 코를 찌르는 냄새와 함께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라의 공격을 바라보던 전갈문 투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아라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강력한 공격에도 전산을 비롯한 이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광선 하나가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순간, 녹색의 연기가 피어오르며 그 사이로 노인하나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난 노인이 염력으로 방패를 만들어내자, 회색 염력이 ‘치익’하는 소리를 내며 방패에 부딪혀 사라졌다.
아라의 공격을 막아낸 노인은 평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으며, 손에는 새까만 지팡이 하나를 들고 있었다. 노인의 오른손에 들린 흑색의 지팡이 위에는 흉악하게 생긴 전갈의 머리가 달려 있었는데, 전갈의 이마 부분에는 은은한 보랏빛이 감돌고 있었다.
노인이 등장하자, 아라의 눈빛이 돌변했다.
“저 사람이 전갈문의 투종 강자라던 전필환이야?”
이준이 갑자기 등장한 노인을 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응.”
메두사가 가볍게 고개 끄덕였다. 그녀 역시 전필환의 등장에 적지 않게 긴장한 듯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그 동안 가만히 놀고 먹은 것이 아닌가 보군. 벌써 4성 투종 최고단계까지 도달한 것 같아. 조금만 더 지나면 곧 5성 투종이 될 수도 있겠어.”
이어지는 메두사의 말에 이준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갔다.
3성 투종이었던 운산을 상대할 때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보다 더한 4성 투종, 그것도 최고단계였다. 투종이 되고 나면 한 등급을 뛰어넘는 데에도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으며, 1성 차이라 해도 그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후…이 일이 끝나면 빨리 내 실력부터 키워야겠어…’
도영호에 운산, 아라, 메두사에 오늘 만난 전필환까지, 줄줄이 진정한 투종 강자들을 만나다보니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준은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투사들이라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실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지만, ‘불개’를 가진 이준은 사정이 달랐다.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찾아 그것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단숨에 몇 단계씩 뛰어오를 수 있었으니, 몇 년씩 천천히 염력을 키워나가는 것보다 계속해서 천지의 불꽃을 찾는 편이 훨씬 더 빠르게 실력을 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불꽃을 얻을 때 마다 불꽃 자체의 위력도 더욱 커졌으니, 염력은 물론이고 모든 면에서 더욱 큰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준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필환이 흐릿한 눈동자로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구름제국의 모든 세력들을 처리할 줄이야. 보통 계집이 아니구나. 그렇지만 덕분에 구름제국을 통일하는 일이 한층 수월해졌어. 번잡한 일 할 것 없이 독종을 집어삼키면 그만이니까 말이야.”
노인의 한마디에 아라가 이를 악물며 염력을 끌어올렸다.
“흥, 어디 한번 해보시지. 독종의 다섯 장로는 진영을 만들어라. 전필환은 내가 상대한다.”
“네!”
아라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섯 장로가 빠르게 흩어져 전투 대형을 갖추며 염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아라가 전필환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갑자기 한줄기 거대한 염력이 그녀의 등 뒤를 덮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라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등 뒤로 날아든 염력은…전필환의 것도, 전갈문 장로들의 것도 아닌 독종의 장로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이 아라에게 적중하려는 찰나, 그녀의 등 뒤에서 갑자기 이글거리는 청록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콰앙!
“배신자가 한 명이 아니라 다섯 놈이었구나.”
회심의 공격이 막힌 다섯 명의 장로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눈 앞에 서 있는 젊은이를 바라봤다.
“네 놈들이 감히!”
공격이 실패하자 다섯 명의 장로들은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이준을 노려본 뒤 곧바로 전갈문의 장로들을 향해 날아갔고, 아라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장로들의 뒤를 쫓았다.
“어딜 도망가?”
아라의 회색 눈동자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이자, 앞쪽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다섯 장로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다섯 사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아라의 공격에는 명백한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흥.”
바로 그 때, 전필환이 다섯 명의 등 뒤로 날아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지독한 독향을 품은 다섯 갈래의 빛줄기가 전갈의 입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며 아라의 염력을 막아냈다.
펑! 펑!
험악한 에너지가 공중에서 충돌하며 폭발음이 잇따라 울려 퍼지고, 매캐한 연기가 공중을 가득 메웠다.
펑!
“악!”
다음 순간,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두 개의 백골이 희뿌연 연기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머지 세 장로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집어 삼켰다.
투황 다섯이면 아라에게 대적하기에 모자람이 없으리라 믿었건만, 그녀의 독술에 순식간에 두 명의 투황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전갈문에서도 진작 독종을 치기 위한 준비를 했던 모양이야. 배신자가 한둘이 아니네.”
아라의 곁에 서있던 이준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아라 역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늘 아래 두 태양이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독종내에 이렇게 배신자들이 많을 줄은 몰랐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
담담한 척 말하기는 했지만, 아라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 전 다섯이나 되는 투황 강자의 배반으로 독종의 투황 강자는 네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반면 전갈문 측에는 여덟 명의 투황 강자가 있었다.
이준이나 보람이 없었더라면 독종은 엄청난 위기에 빠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준과 보람이 참전한다면 투황 강자 네 명은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으니 독종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