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8화. 오공
“그래도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이 자리에 나왔겠지.”
메두사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준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에 이준이 멈칫하며 아라를 바라보자, 아라가 메두사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계속해서 전갈문과 독종 사이에 마찰이 일어난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 며칠 전에 내가 전갈문 사람을 잡아서 알아낸 정보인데, 독종을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 아마도 영혼의 궁전 놈들이 부채질을 했겠지. 아니면 세상 일에 관심조차 없는 그 노인네가 갑자기 분란을 일으킬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이 얘기를 듣고 독종 내부에서 회의를 거쳐 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이자는 결론이 나왔지.”
아라의 눈빛이 순간 섬뜩하게 돌변했다.
“예전에는 그 쪽이랑 싸워도 승산이 크게 없었는데 지금은 훨씬 나을 것 같아.”
“흥, 결국 혼자 놈들을 이기지 못 하니까 우리를 부른거군.”
“메두사!”
이어지는 메두사의 말에 아라의 표정이 또 다시 크게 일그러졌다.
“내가 너와 이준을 이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 든다면 지금 당장 돌아가도 좋아. 붙잡을 생각 없으니까!”
하지만 메두사가 눈을 번뜩이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이준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둘이 계속 싸울 거면 나는 혼자 영혼의 궁전 놈을 잡으러 갈게.”
이준의 냉정한 한마디에 메두사와 아라는 동시에 입을 꾹 다물며 이준의 눈치를 살폈다. 옆에 있던 보람은 이준의 한 마디에 조용해진 두 사람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히죽거리며 웃었다.
“독종의 목적은 전갈문이고, 내 목적은 전갈문 뒤에 있는 영혼의 궁전이니까, 협력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준이 아라를 보며 말했다.
“걱정 마. 네가 날 이용하기 위해 불렀다는 생각 같은 거 안 해. 애초에 그만큼의 믿음도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테니까.”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에 섬뜩하게 빛나던 아라의 눈빛이 조금은 부드럽게 변했다.
“그렇다면 내일 바로 움직이자. 독종은 이 날을 위해 이미 오랜 시간 준비해왔으니까, 언제든지 쳐들어갈 수 있어.”
“좋아. 그 노인의 실력은 어느 정도야?”
“아마 3성 투종 정도일 거야. 독술도 아주 강력하고. 옛날에는 구름제국 전체에서 악명을 떨쳤던 사람이야. 하지만 요즘은 계속 갇혀서 수련만 하는지 도통 소식을 알 수가 없어.”
“혹시 그 노인 이름이 전필환인가?”
그 때,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메두사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 자를 알아?”
아라와 이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메두사를 바라봤다.
“예전에 싸워본 적이 있다. 그 땐 내가 막 여왕이 됐을 때였고, 그 자는 이미 구름제국에서 유명한 강자였지. 그 때는 투황이었는데…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죽지 않고 투종까지 올라갔군.”
메두사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동해도 그 녀석과 싸워본 적 있지. 뭐, 그 때 마다 번번이 지긴 했지만. 가철도 그 자와 여러 번 싸웠다. 간신히 몇 번 이겼었지. 하지만 전필환은 투종 강자가 됐는데 가철은 아직 투황이니 이제 상대가 되질 않겠군.”
“그 노인이 전갈문의 최강자야. 그 사람만 해결한다면 나머지 장로들은 독종의 장로들만으로도 충분해.”
아라가 서서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영혼의 궁전의 강자까지, 총 두 명의 투종 강자가 있는 셈이군. 이 쪽은 투종 둘에 투종 강자를 쓰러뜨린 적이 있는 투황 하나. 승산이 있어.”
아라의 말에 이준 역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일 바로 움직이자. 내 목표는 영혼의 궁전이니까.”
* * *
독종은 이미 전갈문을 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 둔 상태였다. 이준, 아라 그리고 메두사까지 세 사람이 천독성에 도착한 둘째 날, 그들은 암암리에 전갈문이 자리한 전갈산 주변에 모여 꼬박 사흘 동안 촘촘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독종이 조금씩 전갈산 주변을 에워싸자 전갈문측에서는 즉시 반격에 나섰고, 전갈산에서는 매일 수백 구의 시체가 쌓였다.
처음에는 낮은 계급 투사들의 전투가 주를 이루었지만, 시간이 지나 독종 의 장로들이 도착하자 양측의 장로들이 겨루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평화롭던 전갈산이 피로 물들었다.
양측의 충돌이 격화되자, 아라 역시 곧바로 뛰어난 강자들을 데리고 전갈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독종의 장로들이 위치한 곳은 전갈문의 본부와 그리 멀지 않았다. 둘은 계곡 하나를 사이에 낀 채 대치했다. 산 벽에는 알록달록한 독 전갈이 득실거리며 피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현재 이준과 메두사는 다른 사람으로 변장을 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지난 번 대전투에서 이미 독종의 강자들에게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에 불필요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 변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용모를 바꾸는 것은 구름제국에서 심심치 않게 행해지는 일이었다. 독술사들은 기괴한 물건들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환마’의 껍질로 만든 변장 도구였다. 물론 껍질을 붙였다가 다시 떼어내면 다시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환마는 상당히 강력한 상급 마수로, 구름제국의 실세인 아라가 준비한 환마의 껍질은 그 중에서도 최상품에 속하는 것이라 이준과 메두사를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아라의 뒤를따라 전갈산 깊숙한 곳까지 들어 온 이준 일행은 산골짜기에 자리한 거대한 천막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천막으로 지어진 막사에는 수많은 독종의 강자들이 모여 있었다. 아라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최근 상황이 어떤지 보고하도록.”
아라는 이준을 향해 손짓을 한 뒤 곧바로 독종의 장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종주님 이 분들은…?”
무리 중 가장 앞에 선 노인이 아라 뒤에 세 사람을 보며 되물었다.
노인은 독종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자로, 눈에 띄는 화려한 연두색 도복을 두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검은 지네가 그려져 있었는데, 자글거리는 주름이 움직일 때 마다 지네가 꿈틀대는 것이 영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다.
사내의 이름은 ‘오공’으로, 본래 구름제국에서 제법 이름난 세력의 수장이었으나, 제 발로 독종에 들어와 높은 권력을 거머쥔 자였다.
“내가 이번 전쟁을 위해 특별히 초청한 사람들이다. 무슨 문제라도?”
“허허. 이 노인네가 뭐라고 종주님의 결정에 대해 문제를 삼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신중을 기하려는 것 뿐 입니다. 외부에서 지원병을 부르실 때는 각별히 주의가 필요해 여쭤본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하지만 투황 세 명이 그리 큰 도움이 될지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오공의 실력은 제법 오랫동안 투황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니, 메두사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기운으로 투황 수준의 강자이겠거니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다. 오공, 오늘따라 말이 많은 것 같군.”
“허허허. 죄송합니다. 모두 충심에서 비롯된 말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설마 내가 실력도 되지 않는 자를 끌고 왔을까.”
아라는 눈썹을 치켜 세우며 그를 무시하고는 곧바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나타나자, 입구에 있던 독종의 강자들이 허겁지겁 길을 비켰다.
‘독종도 내부 단속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군…’
이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공이라는 노인을 슬며시 훑어본 뒤 아라의 뒤를 따라 천막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지금 전갈산의 전황은 어떻지?”
아라의 질문에 오공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보고를 시작했다.
“예상대로…쉽지 않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이미 많은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어제 밤에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두 명의 투왕 강자를 잃었습니다.”
이를 들은 아라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 앉았다. 전갈문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전투가 벌어진지 사흘 만에 두 명의 투왕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 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기로는 양측의 전력차가 그렇게 클 리가 없었다.
“종주님, 놈들은 저희 쪽에서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정예병들을 빼돌렸습니다. 반면 저희 독종은 약한 곳만 골라서 공격을 받고 있어 엄청나게 큰 손실을 입게 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내부에 전갈문의 첩자가 숨어 있는 듯합니다.”
오공이 어두워진 표정으로 보고를 올리자,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오공의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독종의 움직임을 상대에게 미리 보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라 옆에 있던 이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천막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봤다. 그의 시선은 이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낸 오공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오공의 보고에 천막에서는 큰 소란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장로들이 서로 삿대질을 해대고 욕설을 퍼부으며 분위기만 흐려질 뿐, 아무런 소득 없이 1시간이 지나갔다.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자, 아라는 이준 일행을 이끌고 천막 밖으로 빠져 나왔다. 더 이상 무의미한 말싸움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양측의 강자들이 모두 모였지만, 오늘의 전갈산은 유독 고요했다. 전갈문의 강자들도, 독종의 강자들도, 모두 서로를 예의 주시할 뿐 섣불리 상대를 공격하지 않았다. 양측 모두 다가올 큰 전투에 대비해 힘을 비축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 * *
밤이 되자, 짙은 어둠이 온 산을 뒤덮었다. 밤이야말로 독을 가진 생물들이 산을 지배하는 시간이었다. 산에서는 끊임없이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울렸다. 등불을 비춰 보니 화려한 색깔을 한 독사와 전갈이 사방에 가득했다.
밤이 되자 진영 밖은 더욱 조용해져 장작 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 때, 독종의 진영 안에서 새카만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와 어두운 숲 속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새까만 옷을 입은 그림자는 조용히 하늘을 가르고 계곡 쪽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오공이 막 계곡을 건너려던 그 때, 갑자기 공중에 또 다른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갑자기 붙잡힌 오공은 순간 격렬하게 발버둥치며 온 몸에서 악취와 함께 독을 뿜어냈다.
하지만 상대가 그의 이마에 대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오공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시체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노인을 붙잡은 정체불명의 그림자는 곧바로 척추를 부러뜨려 숨통을 끊은 뒤 그의 저장반지 안에서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찾아냈다.
다음 순간, 그림자의 손에서 청록색 불꽃이 피어나며 첩자의 시체를 깔끔하게 불태워 버렸다.
‘모두 준비 되었습니다.’
종이 위에 적힌 글자를 보고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나 독종 안에 전갈문의 첩자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준은 오공에게서 빼앗은 두루마리를 자신의 저장반지에 집어넣은 뒤 멀리 떨어진 전갈산의 산봉우리를 바라봤다.
“먼저 아라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줘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