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7화. 구름제국으로
여단장이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신의 동굴로 사라지자, 메두사의 시선이 다시 이준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도움이 필요해서 왔어. 구름제국에서 영혼의 궁전 놈들을 찾았대.”
“그 자에 대한 정보는 있나? 실력은 어느 정도지?”
“실력은 모르겠어…하지만 우리 셋이 함께 덤빈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투종 강자인 메두사에, 아직 투황이지만 어지간한 투종 강자 못지 않은 실력을 갖춘 이준, 투황 보람까지. 확실히 약로의 영혼을 거둬간 도영호를 다시 만난다 해도 겨뤄볼만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메두사는 못내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싸하군. 하지만 나는 아직 독종의 종주를 믿지 못 하겠다. 게다가 이번에는 구름제국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야 할 텐데 내가 왜 그 여자를 믿고 그 위험한 곳까지 가야하지?
메두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준의 입장에서야 아라를 믿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입장일 뿐, 1년 가까이 그녀와 목숨을 걸고 싸워왔던 메두사가 선뜻 그녀를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그건…”
하지만 이준이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메두사의 입에서 뜻 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뭐 됐어. 네가 그 여자를 믿는다고 하니 일단 따라가 보지. 그럼 이제 꺼져.”
“어어…? 정말?”
“그래. 그러니까 얼른 꺼져.”
말을 마친 메두사가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이준의 시선이 그녀의 팔뚝에 고정됐다. 메두사의 새하얀 팔뚝에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상처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쳤어? 어쩌다가?”
“별 것 아니다. 이 지역은 천둥산이랑 가까이 있으니까 마수들과 싸우면서 조금 긁힌 것뿐이야.”
한결같이 싸늘한 메두사의 태도에 이준은 서운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왜 불의 연맹으로 날 찾아오지 않았던 거야? 더 안전한 곳으로 뱀 인간들의 거주지를…”
“날 우습게 보는군. 설마 내가 이깟 마수들도 당해내지 못할 것 같나? 그딴 것보다는 구름제국으로 언제 갈지나 말해.”
그러나 메두사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내비추자, 결국 이준도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말을 하더라도, 메두사 여왕의 성미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빠를수록 좋아.”
“그럼 잠깐만 기다려. 우리 종족 일들을 처리 해놓고 바로 돌아오지.”
“매번 정말 고마워.”
“쓸데 없는 소리. 연금비약이나 제 때 내놔.”
말을 마친 메두사는 곧바로 회의실을 향해 날아갔다.
푸른 하늘을 헤치고 날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말은 냉정하게 했지만, 이제 막 거처를 옮겨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그녀의 입장에서 구름제국으로 향한다는 것은 여간 번잡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매번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는 메두사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난관을 헤쳐 나올 수 있었을지 새삼 의문이 들 정도였다.
메두사가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을 모두 마친 메두사가 돌아오자, 이준과 보람, 메두사 세 사람은 나란히 뱀 인간족의 거주 지역을 벗어나 국경으로 향했다.
* * *
구름제국 변경의 산봉우리 상공에 나타난 세 개의 빛은 빠른 속도로 산봉우리 위에 내려 앉았다.
“보람이를 꼭 데려가야겠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조용히 구름제국의 영토를 바라보던 메두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자, 보람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불의 연맹으로 돌아간다면 또 다시 놀아주는 사람 없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이준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하. 걱정 마. 보람이도 투황인걸. 그것도 보통 투황이 아니잖아. 도영호 때 일 기억 안나?”
이준의 답변에 메두사의 머릿속에 도영호를 공격하던 보람의 모습이 스쳤다. 확실히 어지간한 투황 강자는 그녀의 상대조차 되지 못 했고, 상황에 따라서는 투종 강자라 해도 그녀를 쉽게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좋아. 그렇다면 같이 가지. 대신 이번에는 절대 장난 같은 거 치면 안돼. 만져선 안 되는 것들은 호기심으로라도 만지면 안돼, 절대로. 구름제국에는 독술사가 많으니까. 실력은 너보다 약할지 몰라도 맹독을 가지고 있으니 절대 함부로 손대지 마.”
메두사의 말에 보람은 곧바로 눈을 반짝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래, 그럼 잘됐네. 이제 다시 움직이자. 독종은 구름 제국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니까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해.”
이준이 웃으며 날개를 펼치자, 메두사와 보람 역시 곧바로 날개를 펼쳤다.
* * *
구름제국은 가한제국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를 자랑하는 곳으로, 가한제국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독술사들이 가득한 곳 이었다.
덕분에 구름제국의 곳곳에는 독술사 특유의 복장을 한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마치 가한제국에서 약재를 거래하듯 이곳 저곳에서 독을 사고 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구름 제국의 모든 성에는 독의 원료가 되는 독초나 독충을 비롯해 정제된 독을 파는 상점이 있을 정도였다.
독 속성의 염력은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했지만, 맹독을 품은 염력이라는 점에서는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이 기이한 염력은 이준의 불속성과 달리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것으로, 구름 제국에서는 자신의 몸을 독극물에 담근 채 염력을 단련해 독극물과 자신의 염력을 뒤섞는 수련법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게 되면 독속성의 염력을 사용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독술사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짧은 수명을 갖게 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게다가 독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성격도 삐딱하게 변해버려 구름 제국의 독술사들은 흑각성의 무법자들 못지 않게 난폭하고 잔인했다. 또, 독술사들은 투왕이 되지 못한다면 몸 속의 독성으로 인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에, 실로 ‘목숨을 걸고’ 수련에 임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 * *
구름 제국의 중심지까지 가는 데에는 이준과 메두사, 보람의 실력으로도 무려 사흘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흘간, 이준은 구름제국이 어떤 곳인지를 뼛 속 깊이 실감할 수 있었다.
발 아래 펼쳐진 도시 곳곳에서는 피비린내와 독향이 진동했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싸움이 없는 곳이 없었다. 이런 곳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 아라가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아야 했을지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 * *
독종의 본부는 구름제국 중심지역에 위치한 ‘천독성(天毒城)’이라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천독성에서 독종의 권력은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고, 구름 제국 황실 사람들조차 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또, 천독성은 구름제국 독술사들의 성지로, 구름 제국의 역대 최강 세력의 본부가 모두 이곳에 세워지며 사방에서 몰려 온 독술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 이기도 했다.
먼지바람이 휘날리는 천독성 바깥 산봉우리 위에 도착한 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큰 성이 독종의 손 안에 있다니…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독종의 위상이 대단한 모양이야. 불의 연맹은 비교도 안되겠는걸.”
이준이 거대한 성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뱉자, 메두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네 마음이 그 여자보다 무른 탓이지. 제대로 피 맛을 한 번 보면 가한제국도 완전히 불의 연맹 손에 들어갈 거다.”
이에 이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세력을 키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흥, 물러 터진 놈. 이제 어떻게 할거지? 성으로 들어갈 생각인가?”
“그럴 필요 없어…”
이어지는 메두사의 질문에 이준은 조용히 회색 옥 조각 하나를 꺼내 천천히 그것을 움켜쥐었다.
“독종 강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게 아니었음 좋겠군.”
회색 옥이 부서져 가루가 되자, 메두사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나 아라를 믿지 못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준은 그런 메두사의 반응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천독성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영혼의 궁전…두고 보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준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 * *
이준 쪽 세 사람이 산봉우리 위에서 기다린지 30분, 마침내 새까만 형상 하나가 그 위로 날아들었다.
누군가가 날아오자 그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그 쪽을 향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새하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에 그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숨을 돌렸다.
“미안. 종파 내부에서 회의가 있어 조금 늦었어.”
아라가 가느다란 허리를 살짝 굽히며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며 보람과 그 뒤에 서 있는 메두사를 힐끔 보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왠 망토에 모자? 설마 그걸 변장이라고 한건 아니지?”
아라의 조롱 섞인 한마디에 메두사가 두르고 있던 커다란 망토가 바람을 일으키며 그녀 쪽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아라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메두사의 망토가 산산이 찢어졌다.
“됐어, 다들 그만! 내가 싸움 구경 하자고 여기까지 온게 아니잖아!
철천지원수마냥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준이 참지 못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못 마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리자, 이준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라, 네가 영혼의 궁전 쪽 소식을 직접 들은 거야?”
“응. 구름제국에 돌아오니 놈들이 또 날 찾아왔어.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널 못 잡아둔 것 때문에 엄청 화를 내더군. 나와 언쟁을 벌이고는 떠나버렸어. 그 때 사람을 붙여서 놈의 행적을 알아냈지.”
“실력은?”
“나보다 약하지는 않은 것 같아.”
이어지는 이준의 질문에 아라는 목소리를 내리깔며 옆에 있던 메두사를 바라봤다.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잡아둘 수는 있을 정도.”
순간 이준의 눈에서 형형한 빛이 번득였다. 쥐새끼마냥 도망 다녔던 때와 달리, 지금은 자신이 그들을 찾고 있었다. 예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이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영혼의 궁전과 정면 대결을 펼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그 놈을 치면, 그 놈과 끈이 닿아있는 다른 세력이 관여할지도 몰라.”
아라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구름제국의 독술사 세력들은 독종이 모두 쓸어버렸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하지만 ‘전갈문’이라는 세력은 예외야. 그 종파에는 아주 옛날부터 구름제국에서 이름을 날렸던 노인이 하나 있거든. 좀처럼 바깥 세상에 나오는 일은 드물지만, 아직 살아 있는 건 확실해. 게다가 전갈문에는 그 노인 말고도 제법 강자들이 많거든. 속세의 일에 관여하는걸 좋아하는 세력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곳이야.”
잠자코 아라의 말을 듣고 있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라의 말대로라면, 영혼의 궁전의 사자를 붙잡더라도 그 전갈문이라는 종파와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불의 연맹의 강자들을 부르기도 어려우니, 그들이 움직이게 되면 적잖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