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6화. 대여단장
고하의 제안에 이준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알기로, 가한제국에서 연금술로 고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해길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봐, 자네. 조건을 좀 바꿔보는 건 어떤가? 자네 연배에 연맹주와 연금술대결을 한다는 것은 조금…”
해길이 타이르듯 말했지만, 고하는 그딴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광기 어린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흥,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 이자는 이미 선배님과 저와 비슷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은데요.”
고하의 말대로, 이준의 실력은 이미 해길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최근에 이준과 함께 ‘초월의 비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해길은 그가 이미 자신과 비슷한 수준에 올라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준이 고하를 이길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방법을 찾으려는 해길과 달리, 이준은 순순히 고하의 제안에 응했다.
“어쩔 수 없군요. 한입으로 두말하시기 없습니다.”
“역시 불의 연맹의 연맹주답군. 화끈해. 가한제국을 통틀어 내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일거야.”
이준이 대결을 승낙하자, 고하는 화를 내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오두막을 향해 몸을 돌렸다.
“좋아. 그럼 함께 방으로 들어가지. 회장님은 밖에서 기다려주시지요. 유슬, 너는 손님들을 좀 챙겨 드리거라.”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간 뒤 초가집 문이 닫히자, 해길과 동해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누가 이길 것 같나?”
동해의 질문에 해길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글쎄. 고하가 단왕이라 불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하지만 연맹주도 절대 무시할만한 위인이 아니야. 지금까지 만들어낸 연금비약의 향만 맡아봐도 그가 6레벨 연금술사에 견줄 수준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니까…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고하가 한 수 위야. 하지만 연맹주가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대결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모르겠네. 연맹주는 승산없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해길의 말에 그들 곁에서 차를 따르던 유슬의 손이 순간 가늘게 떨렸다. 그는 주전자를 바위 위에 올려 놓은 뒤 고개를 돌려 꽉 닫힌 오두막의 문을 바라봤다.
‘스승님은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 * *
둘의 연금술 대결은 장장 이틀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준과 단왕 고하가 얼마나 치열한 대결을 펼치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지만, 오두막 사이로 새어 나오는 짙은 약향을 통해 대결의 수준을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 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자, 굳게 닫혀 있던 오두막의 문이 서서히 열리며 녹초가 된 고하와 이준이 걸어 나왔다.
해길을 비롯한 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쏜살같이 둘에게로 달려갔다.
“누가 이겼지?”
대결의 결과는 이준도 고하도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 쪽 세 명이 다시 불의 연맹으로 돌아간지 이틀째 되는 날, 고하가 자신의 제자인 유슬과 함께 황도에 나타났다.
고하가 불의 연맹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해길과 동해는 화들짝 놀라 이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준은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일 뿐이었다.
고하의 가입으로 불의 연맹의 연금술 부서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고하의 합류는 불의 연맹의 연금술사들에게도 자극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제국 곳곳에 흩어져있던 여러 무소속 연금술사들이 불의 연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고하가 연금술 본당에 가입한지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이준에게 한 장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영혼의 궁전 사람이 나타났어. 어서 구름제국으로 와줘.’
높은 누각 위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쪽지를 바라보던 이준은 한참 후에야 손가락을 튕겨 불꽃으로 종이를 태워 없앴다.
곧이어 이준의 까만 눈동자에서 섬뜩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또 다시 굳은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말없이 누각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준이 다시 가한제국을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잠시 입을 다물고 한숨을 내쉬던 이정은 결국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은 이정의 방을 나서자마자 보람을 찾아 그녀와 함께 천둥산으로 향했다.
* * *
현재 천둥산 인근은 완전히 뱀 인간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마수와의 싸움이 잦기는 했지만, 선천적으로 강하고 싸움을 좋아하는 뱀 인간들에게 마수와의 싸움은 그다지 신경쓸만한 일이 아니었다.
천둥산에 정식으로 뱀 인간들의 거주 구역이 생긴 이래로 뱀 인간들은 서서히 인간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금은 뱀 인간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경계선 쪽에 인간 전용 통로도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의 거주 지역을 찾는 인간도 드물고, 그들 역시 인간들의 마을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타르사막에 살던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와 보라색 머리의 소녀가 나타나자, 뱀 인간들은 다소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상대가 이준임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메두사 여왕을 만나러 왔는데…길을 좀 알려줄 수 있을까?”
하지만 마을의 경비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준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족장님은 지금 나올 수 없다. 꼭 만나야 한다면 우릴 따라서 먼저 대여단장님부터 뵙도록 해. 족장님이 계신 방은 장로님들만 들어갈 수 있으니까.”
“대여단장?”
경비병의 말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대여단장이 메두사 바로 아래의 강자라는 얘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수련에 미친’ 사람이라는 것만은 이준 역시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삼대제국과의 전쟁이 있을 때에도 일 년간 사막에 갇혀 수련에만 몰두했던 인물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하나는 그가 정말로 수련에 미쳐있다는 점 이었고, 또 한 가지는…그가 인간에게 호의적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 이었다. 하지만 영혼의 궁전의 인물을 포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메두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후…알겠어. 그럼 대여단장을 만나게 해줘.”
이준의 요청에 뱀 인간족의 강자들은 곧바로 이준과 보람을 데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걱정 마. 혹시 그 대여단장이란 사람이 싸움을 걸면 내가 대신 혼내줄게!”
이준이 어두운 표정을 짓자, 보람이 히죽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안돼. 싸우러 온게 아니잖아. 제발 부탁인데 말 좀 잘 들어. 아니면 너 안 데리고 간다?”
“흥. 네가 안 데리고 가면 나도 류지안이나 임동수처럼 혼자 떠나버리지 뭐.”
이준의 핀잔에 보람은 잔뜩 토라져 입술을 내밀며 툴툴 댔다.
이준이 천둥산에 갇혀 두문불출하는 사이, 임동수와 류지안, 임수혁 세 사람 모두 가한제국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불의 연맹 소속이 아니었고, 단지 이준을 따라 가한제국에 온 것뿐이었으니 이준이 없다면 굳이 그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었더라면 삼대 제국과의 전쟁에서 큰 힘이 되었을 텐데, 이준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 이었다.
뱀 인간들의 부락은 천둥산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완전무장한 경비병들이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뱀 인간들의 뒤를 따라 부락의 길을 가로질러 한 광장 앞에 멈춰서자, 일직선의 기다란 돌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늘어선 돌 계단 위로 시선을 들어 올리자, 이마에 회색의 뱀 문신을 새긴 대머리 사내 하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대의 실력은 투황 최고 수준으로, 확실히 메두사나 장로급이 아니라면 뱀 인간중에서는 그를 상대할 자가 없어보였다.
이준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 역시 상대의 시선을 느꼈는지 두 눈을 크게 뜨며 이준을 바라봤다.
“불의 연맹 이준입니다. 메두사 여왕을 만나러 왔는데, 먼저 대여단장님을 만나야 한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이준?”
순간 사내의 꼬리가 꿈틀대더니 그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내려 앉았다.
쉬익!
곧이어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이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준의 예상대로 역시 ‘대여단장’이라는 사내는 인간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상대방이 염력을 폭발시키자, 이준 역시 곧바로 청록색의 화염을 끄집어냈다. 그의 몸에서 아름다운 청록색의 화염이 피어나는 순간, 땅바닥에 있던 풀들이 빠른 속도로 말라가기 시작했다.
쾅!
대여단장과 이준이 맞부딪히는 것과 동시에 광장에서는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대여단장의 눈빛은 이준의 청록색 불꽃에 고정되어 있었다. 천지의 불꽃은 뱀 인간들에게 있어 천적과도 같은 물건이었으니,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난 너와 싸우고 싶은 생각 없어. 어서 메두사나 불러줘.”
하지만 이준이 불꽃을 거두어 들이며 다시 한번 자신이 이곳을 찾은 용건을 말하자, 눈 앞에 선 뱀인간의 입가에 또 다시 기분 나쁜 웃음이 걸렸다.
“지금은 누구도 여왕님을 만날 수 없다.”
“그래?”
계속되는 상대의 무례에 기분이 상한 이준은 곧바로 상대를 향해 청록색의 불꽃을 날렸다.
신비한 청록색 화염에 담긴 무시무시한 열기에 대여단장은 또 다시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잽싸게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빠르게 도망쳐도 청록색 화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뒤를 쫓아왔다.
“젠장, 뭐 하자는 거야?”
겁에 질린 대여단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청록색의 화염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이제 메두사를 불러줄 수 있겠어?”
“너 이 자식…”
대머리의 대여단장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자신의 머리와 가까이 붙어 있는 불꽃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여기서 기다려!”
결국 목숨이 아까웠던 그는 이준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뒤 빠르게 돌 계단 위로 날아 올라갔다.
이준은 잽싸게 계단 위로 날아가는 대여단장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다시금 불꽃을 자신의 몸속으로 거두어 들였다.
주변에 있던 뱀인간들은 하나 같이 겁먹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준은 이를 짐짓 보지 못한 척하며 메두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십 여분 정도를 기다리자, 메두사가 계단 위로 날아왔다.
여왕의 출현에 주위에 있던 뱀 인간들은 곧장 무릎을 꿇으며 자신들의 여왕을 맞이했다.
“흥, 또 무슨 일이지?”
“채린 언니!”
메두사가 등장하자, 보람이 껑충 뛰어 그녀의 품에 쏙 안겼다. 이에 메두사는 저도 모르게 온화한 표정으로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언니, 저 대머리 아저씨가 우릴 공격했어. 내가 투황이 아니었으면 저 녀석한테 맞아 죽었을 수도 있다고.”
메두사의 품 속에서 머리를 비벼대던 보람이 대여단장을 가리키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사내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여왕 폐하, 저는 이준이라는 자의 실력이 궁금했을 뿐, 이 귀여운 아가씨에게는 절대로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보람을 바라보는 메두사의 시선에 애정이 가득한 것을 느낀 대여단장은 서둘러 변명을 해댔지만, 그를 바라보는 메두사의 표정은 얼음처럼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이준은 우리 종족의 귀빈이다. 감히 나의 허락도 없이 저 자를 공격하다니, 앞으로 한 달간 네 굴에 들어가 나오지 말거라.”
여왕의 한마디에 여단장은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