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5화. 연금술사의 탑
불의 연맹의 본부는 가한제국에 설립되었다. 현재 불의 연맹의 규모는 일 년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만큼 확대 되어 있었고, 무려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 중에 약 3분의 1 가량이 불의 연맹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
불의 연맹 내부는 각 부서로 나뉘어 철저하게 분업이 이루어졌고, 이런 구조는 연맹에 더욱 큰 힘을 실어주었다.
연금술 부서는 불의 연맹 내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 중 하나로, 이 곳에서는 매일 다양한 연금비약이 제조되고 있었다.
연맹의 연금술사들이 만들어 낸 연금비약은 상업 본부로 전달되었고, 이는 다시 유씨 가문을 통해 신속하게 제국 곳곳으로 팔려 나갔다.
가한제국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불의 연맹이 가한제국 최고의 세력이 되었음을 받아들였다. 특히 삼국 연합군을 물리친 이후로는 불의 연맹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세력들도 점차 불의 연맹에 기대게 되었다. 이제 불의 연맹의 지위와 명망은 명실상부하게 과거 운남종의 그것을 훌쩍 뛰어 넘어 있었다.
연금술 부서의 본당은 제도 중심부 인근에 세워져 있었고, 매일 같이 제국 곳곳에서 온 연금술사들이 그 곳에 머물렀다.
본당에는 각종 희귀한 약재들은 물론 귀한 처방전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어 수 많은 연금술사들이 그 곳에서 필요한 것을 구하거나, 필요치 않은 것을 판매했다.
삼대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불의 연맹이 얻은 이익은 가한제국 내에 그치지 않았다. 서북 지역 최강의 세력 셋을 물리친 불의 연맹의 명성이 퍼지며 서북 지역 내에 많은 사람들이 가한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불의 연맹과 가한제국 황실은 이런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고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펼쳤고, 서북 지역 내의 많은 사람들이 가한제국을 찾게 된 덕에 불의 연맹과 가한제국은 더욱 더 빠른 속도로 세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본당의 시끌벅적한 거래소와 달리, 건물 한 켠의 깊은 곳에는 조용한 밀실 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불의 연맹 연금술사들이 연금비약을 만들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로, 각 방의 바깥쪽에는 잔심부름을 하기 위해 남자 시종 하나와 여자 시종이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수 십개의 제조실이 위치한 건물의 중앙에는 엄청난 고온을 견딜 수 있는 보라색 암석으로 이루어진 밀실들이 있었다.
고온을 견딜 수 있는 밀실은 수 많은 연금술사들이 바라 마지 않는 것이었지만, 암석의 가격이 너무 높아 이런 방을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불의 연맹은 이미 가한제국을 넘어 서북 지역에서도 손에 꼽는 거대세력이 되어 있었으니, 이런 밀실을 몇 개나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단, 이 고급 밀실은 4레벨 이상인 연금술사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일반 연금술사는 바깥쪽의 일반적인 제조실을 이용해야 했다.
이런 등급에 따른 차등적인 혜택은 일부 연금술사들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지만, 이런 불만은 시간이 지나며 천천히 잦아들고, 오히려 많은 연금술사들이 이 고급 제조실을 사용하기 위해 더욱 연금술에 매진하게 되는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제조실 안에서는 짙은 약향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오며 형형색색의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그 안쪽은 뜨겁게 달구어져 마치 아궁이 같았다.
“하하. 연금 비약 제조 과정을 분업화 시키니 아주 좋군. ‘초월의 비약’ 제조 속도도 빨라지고 말이야.”
해길은 약 솥에서 타오르는 약재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곁에는 이준이 함께 약솥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초월의 비약’을 제조하려면 둘의 실력으로도 대략 보름의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5레벨 연금술사의 힘으로도 ‘초월의 비약’을 만들려면 너무 많은 힘이 필요해 현재 제조실 안에는 5레벨 연금술사 6명이 모여 초월의 비약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초월의 비약은 총 두 개입니다. 연금비약은 동해 선배님께서 보관해 주십시오. 이제…결사대의 양성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준의 말을 듣고 있던 동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말게. 초월의 비약만 잘 만들어진다면 반 년 안에 불의 연맹에는 새로운 열 명의 투왕 강자가 생겨날테니까.”
“저희는 제조 속도를 최대한 올려 보겠습니다. 우선은 저도 해길 장로님과함께 하겠지만, 저는 조만간 불의 연맹을 떠나야 하니 그 때는 해길 장로님과 선배님이 초월의 비약의 제조부터 결사대 양성까지 모든 과정을 맡아주셔야 합니다.”
독종에서 아라의 재난독체를 치료하기 위한 약재를 모두 모으면 즉시 구름제국으로 넘어가야 했으니, 이준은 언제 가한 제국을 떠나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가한제국에 남아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불의 연맹을 키우는데 신경을 쓰기보다, 대륙 곳곳을 누비며 자신의 실력을 더욱 갈고 닦고 싶었다.
불의 연맹의 가한제국이 아니라 서북 지역 최고의 세력이 된다 해도, 자신이 더욱 강해지지 않는다면 아버지나 스승을 구할 수도 없었고, 이은을 만나러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중요한 일들을 정리하고 수련을 떠나야 했다.
“최선을 다 하겠네. 하지만 초월의 비약을 만들기 위해 꼭 영입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아마 그 사람만 있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초월의 비약을 만들 수 있을게야.”
최소한 두 배의 효율은 나올 것이라는 말에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자신이 이곳에 남아있다 해도 그 정도 속도로 연금비약을 제조해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게 누구죠?”
“단왕 고하.”
하지만 이어지는 답변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단왕 고하의 실력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장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운남종에서의 일로 저와의 관계가 틀어질대로 틀어졌는데, 그가 저희를 도와줄까요?”
“하하. 둘 사이에 이런저런 일이 있긴 했어도, 그를 끌어 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지.”
고하는 연금술 분야에서는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니, 그런 그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 분명했다. 만일 해길의 말대로 그를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연맹입장에서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요?”
이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되묻자, 해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투기대륙에는 수 많은 연금술사들이 존경하는 ‘연금술사의 탑’이라는 조직이 있네. 혹시 못 들어봤나?”
“연금술사의 탑이요?”
어딘가 낯익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상세한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연금 술사의 탑은 대륙 연금술사들이 모인 자유조직으로, 그 구성원은 모두 투기대륙의 유명한 대가들이지. 고하도 예전부터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 했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려면 각지의 연금술사 협회에서 추천장을 받아야 하지. 당연히 가한제국 연금술사 협회에서도 고하의 요청에 따라 추천서를 써준적이 있네. 그는 가한제국 최고의 연금술사이니까. 하지만 우리 협회는 투기 대륙 전체에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 하고 있으니,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지. 허나 지금 불의 연맹의 연금 부서는 연금술사공회보다 훨씬 큰 잠재력을 갖고 있으니 분명 추천서를 써줄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될 것이네. 그러니 추천서를 놓고 고하와 협상을 하면 그를 끌어들일 수 있을거야.”
해길이 이야기를 마치자,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번 시도해보죠.”
해길의 이야기는 준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고, 바로 다음 날, 이준은 해길, 동해와 함께 고하의 거처로 향했다.
운남종이 해산된 이후 고하는 운남산을 떠났지만, 그렇다고 가한제국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현재 그는 운남산과 멀지 않은 조용하고 외진 산 속에 은거하고 있었다.
고하의 은거지에는 황도에서 열린 연금술사대회에서 이준과 자웅을 겨뤘던 그의 제자 ‘유슬’이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유슬은 이준을 발견하자마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이준? 네가 무슨 일이지?”
“하하. 고하님을 좀 만나 뵙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상대가 자신을 보며 가볍게 웃음을 짓자, 유슬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그마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고하의 오두막은 상당히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마치 딴 세상인양 고요했다.
잠시 후,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여길 찾아내다니…불의 연맹이란 세력이 가한제국을 제대로 장악했나 보군. 대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들이 찾던 단왕 고하였다.
“까칠하기는…”
해길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짓자, 고하는 곧바로 이준을 바라보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불의 연맹주. 할 얘기가 있으면 빨리 해주겠나? 곧 약초 밭에 가야 해서 말이지.”
“해길 장로님께서 고하 선생님은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으니, 저도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고하 선생님을 불의 연맹에 초청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불의 연맹에 가입하라는 소린가?”
이준의 제안에 고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
“됐네. 난 지금 이 생활이 좋아. 이제 바깥 세상이라면 지긋지긋해.”
“휴. 자네, 연금술사의 탑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나? 지금 불의 연맹에 있는 연금술사 조직의 위상은 과거 연금술사 협회 이상이야. 만일 자네가 불의 연맹에 가입한다면 자네의 소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해길이 끼어들자, 고하의 입가에 더욱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괜한 얘기로 꼬드길 생각마시지요. 제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가한제국에 대한 애착 때문이지 다른게 아닙니다. 제 실력이라면 다른 나라에 위치한 연금술사 조직에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끙…”
말문이 막힌 해길은 민망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고하의 말대로, 그의 연금술 실력은 투기 대륙의 어딜 가든 환영 받을만한 것이었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이준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하 선생님, 이제 보니 제국 밖의 다른 연금술사 조직에는 그다지 관심 없으신 것 같군요. 그렇다면 왜 불의 연맹에 합류하지 않으시는 것 입니까? 설마 저 때문이신가요?”
이어지는 이준의 질문에 고하는 더욱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내가 불의 연맹에 가입하길 바라나?”
“고하 선생님 정도의 인재를 어떤 세력에서 탐내지 않겠습니까?”
이준의 아부 섞인 말에 고하는 조금 기분이 풀린 듯 픽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자네를 따라가는 게 안 될 일은 아니지. 다만, 조건이 하나 있어.”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상대의 기분이 조금 풀린 듯하자, 이준의 얼굴에 곧바로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고하의 말에 이번에는 이준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나와 연금술 대결을 해보자고. 자네가 이기면 내가 불의 연맹에 들어가겠네. 어떤가?”
연금술 대결을 요청하는 그의 눈빛에는 섬뜩한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이준에게 패배했던 일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