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4화. 철새의 날개
자신의 앞길을 막는 이들을 모두 치워낸 메두사는 공중에 떠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손으로 검은 산 요새 방향을 가리켰다.
“어서 가지. 이제 곧 금안종의 강자들이 올 거야.”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서쪽 하늘 멀리서 형형색색의 염력 날개를 펄럭이며 십 여 명의 강자들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이준과 메두사 두 사람은 금안종과 모란종의 강자들을 뒤로 한 채 유유히 성을 벗어나 검은 산 요새로 향했다.
* * *
성과 멀리 떨어진 지점의 밤하늘, 두 사람은 천천히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금안종과 모란종, 두 거대 세력의 종주가 죽었으니 이제 서북 지역에서 감히 가한제국을 침략할 수 있는 세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휴우…다친데는 없어?”
“그 독충 같은 계집만 아니면 내 상대가 될 사람은 없다.”
자신을 걱정하는 듯 한 이준의 질문에 메두사는 불쾌하다는 듯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고는 아래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지상을 내려다보니 동해를 비롯한 연맹원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동생! 어찌 됐는가!”
“낙안성과 모란종의 세 장로 모두 제거했습니다.”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연맹원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준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천천히 날개를 접고 숲으로 내려앉은 이준은 곧바로 품속에서 저장 반지 하나를 꺼내 그 안에서 붉은 색 두루마리 하나를 끄집어냈다. 붉은 색의 두루마리에는 검은 색으로 ‘야수의 진’이라는 네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두루마리에 적힌 글자를 확인한 이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서북 지역 일류 세력의 장로 중 하나이니만큼 제법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호랑이 머리 장로의 손에 끼워져 있던 저장 반지에 ‘야수의 진’의 수련법이 들어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루마리 안의 내용을 확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 나갔다.
“왜?”
“휴. ‘야수의 진’이 맞긴 한데… 반쪽 짜리야. 여기 적힌 대로라면 이 무투기는 총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 하나만 익혀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
이준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자, 메두사가 품 안에서 저장반지 두 개를 꺼내 이준에게 건넸다.
“그럼 이 안에 나머지 두 장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겠군.”
“설마… 그 장로들을 다 죽인거야?”
메두사가 그저 장로들을 따돌린 줄로만 알고 있던 이준이 그녀의 손에 들린 저장반지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래.”
투황 최고 계급 강자 두 명을 죽인 사람치고는 너무나 태평한 표정이었다. 마치 닭 모가지를 비틀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한 번 메두사의 무시무시한 실력을 실감한 이준은 허탈하게 웃으며 그녀가 내민 저장 반지 두 개를 건네받은 뒤 잽싸게 그 안을 살폈다.
“역시…!”
곧이어 이준의 손바닥 위에 두 개의 붉은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메두사는 즐거워하는 이준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짓더니 저장반지 안에서 황금색 족자 하나를 꺼내 그것마저 그에게 넘겼다.
“이건 낙안성이 갖고 있던 거다. 아마 금안종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무투기겠지.”
황금색의 두루마리를 펼치자, 휘황찬란한 금빛이 사정없이 그의 눈을 찔러댔다.
「철새의 날개.」
‘비행 무투기인가?’
겉면에 적힌 글자를 읽던 이준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이미 투황 계급의 강자였으므로, 일반적인 비행 무투기는 그의 염력 날개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한마디로 금안종 비전의 무투기이든 뭐든 그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건 평범한 비행 무투기와는 다르다. 낙안성이 진짜 같은 거대한 날개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무투기 덕분이니까. 그 놈이 마음먹고 도망가면 나도 잡기 힘들 정도지. 정확히 말하면 비행 무투기라기보다, 비행 무투기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해야 할거다.”
어리둥절해 하던 이준을 바라보던 메두사는 마치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귀찮은 표정으로 자신이 건넨 무투기에 대해 설명했다.
“비행 무투기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메두사의 말에 이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비행 무투기가 투기대륙에서 보물 취급을 받는 까닭은 그 제조방법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낙안성이 바로 그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니…메두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두루마리의 가치는 2격 무투기인 ‘야수의 진’와 비등한 수준이었다.
“채린 네가 쓰는 게 좋지 않겠어?”
이준이 조심스럽게 되묻자, 메두사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지간한 날개로는 투종 강자의 비행속도를 따라올 수 없다.”
이에 이준은 흡족한 표정으로 황금빛 두루마리를 자신의 반지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내가 가져갈게. 재료를 모으면 네 것도 하나 만들어줄게!”
자신의 날개를 만들어 준다는 이준의 말에 메두사는 피식 웃으며 보일 듯 말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일이 다 해결됐으니 검은 산 요새로 돌아가자. 큰 형도 오래 기다렸을 거야.”
* * *
이준을 비롯한 이들이 무사히 돌아오자, 검은 산 요새 주위에서 기다리던 이정도 한시름 놓은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준이 목표물을 모두 처단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평온하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정말로 전쟁이 끝난 것이다.
낙안성과 세 장로를 잃은 금안종과 모란종은 분노로 이를 갈았지만, 이미 메두사와 이준이라는 두 강자가 버티고 있는 불의 연맹과 싸울 힘을 잃은 상태였다.
불의 연맹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암살이 성공하고 3일 뒤에야 두 세력의 정예들이 도착했고, 이와 동시에 독종이 연맹에서 탈퇴할 것을 선언했다고 했다. 각 종파의 최강자를 잃은 상태에서 연합군의 유일한 투종 강자인 아라마저 발을 뺐으니, 두 종파가 불의 연맹에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이 없었다.
전란의 불꽃이 사그라지자, 가한제국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불의 연맹은 이준의 의견에 따라 이번 전쟁에서 큰 도움을 준 뱀 인간들에게 천둥 산맥 인근의 한 구역을 나누어 주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북 지역 전체에 ‘불의 연맹’과 ‘이준’이라는 이름이 퍼지기 시작했다.
* * *
제국이 안정을 찾자, 이준의 생활도 점차 예전처럼 평화롭고 조용하게 변해갔다.
요즘 그는 수련을 하다가 시간이 나면 불의 연맹 내부의 연금술당 안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그 곳에서는 매일 같이 불의 연맹에 소속된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연금비약을 제조하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은 투사들과는 또 다른 의미로 이준을 동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현재 이준의 연금술은 가한제국에서 제일가는 수준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지금 가한제국에서 6레벨 연금비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준과 해길, 고하 정도였으니, 모든 연금술사들이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해길, 고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금술사가 된 그를 존경해 마지 않았다.
한편, 아라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준은 그녀가 사람들을 이끌고 ‘재난독체’ 치료를 위한 약재를 찾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좋은 소식이 있다면 아마도 자신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
그 사이 뱀 인간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이번 전쟁으로 인해 오랜 숙원이었던 그들만의 영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지긋지긋한 타르 사막을 떠나 천둥산 인근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렇게 평안 무사한 나날이 지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이준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공허한 느낌이 가득했다.
* * *
구름으로 둘러싸인 높은 산봉우리 위…
“돌아오셨군요.”
바위 위에 앉아있던 소녀가 입을 열자, 바위 아래에 있던 그림자에서 불쑥 사람의 형상 하나가 솟아나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죠?”
천천히 몸을 돌려 노인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청초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그 위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준과 이은이 헤어진지도 어느새 4 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녀의 외모는 누구라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아름답게 활짝 피었지만, 그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그 아름다움마저 빛을 바래게 할 정도로 짙었다.
“도련님의 소식을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세형의 입에서 이준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얼굴 위에 끼어있던 먹구름이 삽시간에 걷히고, 눈동자에 햇살이 내렸다.
이준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밝은 표정을 되찾는 이은을 보며 세형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세형이 전해준 소식을 듣는 내내 이은의 눈은 한 여름의 햇살을 받은 호수처럼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4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투황이 됐다니…!”
“오라버니가 정말로 투종을 이겼다고요?”
“불의 연맹… 좋은 이름이네요!”
노인의 입에서 이준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그녀의 입가에는 밝은 미소가 걸렸고, 앵두 같이 빠알간 입술에서는 연신 웃음과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후우…정말로 영혼의 궁전이 움직였을 줄이야. 그나저나 오라버니의 스승님은 우리 가문에 대해 잘 알 텐데… 설마 오라버니에게 제 신분에 대해 이야기 했을까요?”
“안 했을 겁니다. 도련님이 아가씨의 정체를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우선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파견해 영혼의 궁전의 위치를 알아봐주세요. 아저씨의 실종도 영혼의 궁전과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까요.”
이은의 명령에 세형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비밀리에 진행하죠. 다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희 가문도 그들과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지만, 영혼의 궁전의 본부 위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요. 또…워낙 위험하고 음험한 자들이라, 약로나 도련님의 아버지가 어찌 되었을지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세형의 말에 이은의 눈동자에 순간 금색의 불꽃이 치솟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화염이 깃들자, 곁에 있던 암석이 부르르 떨리며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에 이은의 반응을 살피던 세형의 입에서는 더욱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난 4년간 이준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흐려지기는커녕 더욱 깊어진 것이 틀림 없었다.
노인은 한참이나 끙끙 앓으며 다음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준의 스승이나 아버지가 해코지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말만 듣고도 이토록 살기를 피워대는데, ‘그 이야기’를 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심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감출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아가씨께서 ‘열쇠’를 가져오시지 못한 것 때문에…결국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이씨 가문에게서 열쇠를 받아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펑!
세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은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곧이어 그녀의 몸에서 금색 불꽃이 터져 나오더니, 이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녹여 없애기 시작했다. 예상한대로의 반응이었다.
“하아…”
이은의 눈동자는 완전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한숨을 내쉬는 세형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산봉우리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