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3화. 고군분투
밤이 깊어지고, 달이 서서히 밤하늘에 떠오르자, 조용히 때를 기다리던 이준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해 선배님, 혹시라도 예상 밖의 문제가 생긴다면…부탁드릴게요.”
“그러지.”
동해와 대화를 마친 이준은 곧바로 곁에 있던 메두사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가자.”
곧이어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메두사와 이준이 순식간에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행여나 움직임이 들킬까 싶어 이준은 청록색의 염력 날개를 쓰지 않고 에너지가 약한 보라색 날개를 소환했다. 속도는 염력 날개만 못했지만, 야심한 밤에는 매의 날개를 쓰는 편이 적들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감들이 숨어있는 성벽 가까이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가만히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보던 이준과 메두사는 투왕 강자들이 서로 반대편으로 순찰을 간 틈을 타 빠르게 성벽을 넘은 뒤 성 벽 가까이에 붙어있는 작은 집 안으로 몸을 숨겼다.
“여기서 흩어지자. 일을 마치고 다시 검은 산 요새에서 만나는 거야.”
이준의 말을 듣던 메두사의 얼굴에 순간 걱정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암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녀의 실력이라면 검은 산 요새까지 달아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의 실력으로는 적들에게 포위를 당한다면 무사히 요새까지 돌아갈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아, 난 걱정 마. 그래도 속도는 자신 있으니까, 마음먹고 도망치면 초급 투종 정도는 따돌릴 수 있다구!”
하지만 이준이 웃으며 자신을 안심시키려 하자, 여왕의 얼굴은 또 다시 평소의 그 얼음 같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흥. 건방지긴.”
메두사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라 성 안쪽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이준은 한숨을 푹 내쉰 뒤 메두사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한편, 성 중앙의 높은 곳에서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제 너희에게 달렸어.”
* * *
성 서북쪽에 위치한 모란종의 진영은 다른 곳들과 달리 밝은 불빛들이 가득 했으며, 완전 무장을 한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중에는 투왕 강자들이 날아다니며 주위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고, 높은 탑 위에 서는 여러 강자들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투종이 없는 이상, 예리한 영혼 탐지 능력을 바탕으로 적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하며 움직이는 이준을 잡아낼 수는 없었다.
이준이 소리 없이 모란종의 본진 깊숙한 곳까지 도달했을 무렵, 메두사 역시 낙안성이 부상을 치료하고 있는 금안종의 본영 깊은 곳까지 침투해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건물 앞에 이른 메두사가 손가락을 구부리자, 작고 가느다란 무지개 빛 염력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 모여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칠색의 염력을 점점 더 단단하게 압축시켰다.
단 한 번,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끝을 내야했다.
* * *
칠흑 같은 어둠 속, 모란종 진영의 중심 지대에 자리한 거대한 천막 주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이준은 자그마한 불씨 하나를 만들어 천막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조심스럽게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밝은 불이 켜져 있는 천막 안에는 세 노인이 앉아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숨을 내쉴 때마다 붉은 에너지가 흘러 나와 세 사람을 사이를 오가다가 한 노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에너지의 도착점은 이준에게 당해 치명상을 입었던 호랑이 머리의 장로였다.
‘야수의 진이 저런 능력까지 가지고 있을 줄이야. 역시 모란종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술이라 할 만하군.’
천막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렸다. 에너지의 흐름이나 노인의 안색으로 미루어보아 야수의 진을 이용한 치료가 어지간한 연금비약 못지않게 효과가 뛰어나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십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세 사람이 살며시 눈을 떴다.
“좀 어떤가?”
“조금 회복됐네. 그런데 상처가 심해서 완전히 치료하진 못한 것 같네. 아무래도 6레벨 연금비약이 필요할 것 같아.”
“그런 애송이가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너무 방심했어.”
“하지만 놈도 짧은 시간 내에 부상을 치료하기는 어려울 거야. 모란종의 강자들이 모두 도착하면 곧바로 금안종과 연합해 놈의 숨통을 끊도록 하지. 독종이 없다 해도 가한제국을 멸망시키기에는 충분해.”
휙!
바로 그 때, 날카로운 소리가 천막 안에 울려 퍼지더니 중상을 입은 호랑이 머리의 장로 뒤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이준!”
이에 모란종의 두 장로는 번개 같은 속도로 이준을 향해 돌진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쾅!
그러나 다음 순간, 이준의 형상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제길, 또 그 무투기인가!”
당황한 두 장로가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 이준의 목구멍에서 싸늘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하다니. 그쪽이 멍청한 건지 내가 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군.”
“네 이놈!”
호랑이 머리의 장로는 이준에게 뒷목을 잡힌 채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갑작스런 상황에 두 장로는 이를 갈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네가 우릴 죽이면 모란종과 철천지 원수가 되는 거다.”
“흥, 그럼 이 노친네를 안 죽이면 얌전히 물러가 주는 건가?”
이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자, 호랑이 머리 장로의 얼굴이 더욱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래. 그럼 절대 가한제국과 불의 연맹을 건들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어떤가?”
“뭘 믿고? 네 놈들은 셋이 합쳐야 제대로 된 힘이 나오니 이참에 싹을 자르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겠어?”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두 장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 모란종이 가진 ‘야수의 진’을 주도록 하지. 2격 중급 무투기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너도 알겠지.”
“야수의 진을?”
제법 달콤한 제안에 순간 이준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두 장로가 기뻐하기도 전에 또 다시 싸늘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등을 때렸다.
“관심이 가긴 하는데, 그래도 살려 둘 생각은 없어.”
푸쉭!
다음 순간, 청록색의 불꽃이 피어오르며 호랑이 머리 장로의 머리에서 시뻘건 피가 터져 나왔다.
손 쓸 도리조차 없이 호랑이 머리 장로가 죽어 시신이 되어버리자, 두 장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이놈이 감히!”
곧이어 두 장로의 몸 속에서 부터 강맹한 염력이 폭발하며 새하얀 천막을 날려버렸고, 덕분에 천막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저 새끼를 잡아! 죽이든 살리든 잡아내!”
호랑이 머리 장로의 죽음은 모란종에게 있어 실로 어마어마한 타격이었다. 그가 없이는 ‘야수의 진’도 불가능 했고, 이는 모란종 자체가 더 이상 서북 지역의 삼대 세력 중 하나로 인정받지 못 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의미였다. 두 장로가 미친 듯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자, 천막 주위 곳곳에서 강자들이 눈을 번뜩이며 자리로 모여들었다.
순간 이준의 민감한 영혼 탐지능력에 투황 강자 세 명의 존재가 감지됐다. 모란종의 두 장로를 포함하면 다섯…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이에 이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빠르게 발돋움을 하며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저 놈을 잡아! 반드시 잡아야 한다. 저 놈을 죽이는 자에게는 장로의 지위를 주겠다.”
두 장로의 호통 소리에 모란종의 세 투황이 앞 다투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에 이준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세 장로 중 실력이 가장 약한 자를 골라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청록색의 불꽃에 휩싸인 주먹과 맞부딪히자, 세 투황 중 하나가 곧바로 뒤로 날아가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 이준 역시 계급 상으로는 이제 막 투황이 된 수준에 불과했지만, 평범한 1성 투황 정도는 이미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1성 투황을 상대하느라 시간을 뺏긴 사이, 모란종의 두 장로가 번개처럼 날아와 이준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들의 주먹에는 붉은 빛이 모여 있었고, 두 사람의 머리는 이미 곰과 사자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태산 부수기!”
“사자의 힘!”
두 사람은 이준의 앞뒤에서 돌진하며 그의 퇴로를 차단한 채 공격을 펼쳤다. 이에 맞선 이준이 염력을 폭발시키며 손을 휘두르자, 그의 몸을 중심으로 청록색 불꽃 고리가 형성되며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불의 고리!”
청록색 불꽃은 두 장로의 공격과 맞부딪혀 폭발을 일으켰고, 이준과 두 노인의 입에서 동시에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숨 돌릴 틈조차 없이 십 여 갈래의 에너지가 이준의 급소 곳곳으로 날아들었다.
이준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염력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화염 갑옷을 만들어냈다.
펑! 펑!
“젠장…!”
상대의 염력 공격은 불꽃 갑옷을 뚫을만한 위력을 갖지는 못 했지만, 상대가 달아나는 것을 저지하기에는 충분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결국 이준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적들 한가운데 발이 묶어 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 때, 혼란스러운 하늘을 가르고 시커먼 형상 하나가 날아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색 그림자는 투황 강자들의 염력을 단숨에 박살낸 뒤 이준의 곁에 멈춰 섰다.
“흥, 자신만만한 척 하더니 결국 이딴 놈들에게 발이 묶여 있는 거냐?”
“채린!”
메두사가 자신을 도우러 왔다는 것은 낙안성을 처리하는데 성공했다는 의미였으니, 이준의 입에서는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먼저 가. 내가 뒤를 따라가지. 더 시간을 끌었다간 금안종 강자들도 몰려올 테니까.”
이어지는 메두사의 말에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몸을 돌려 날아가기 시작했다.
메두사의 출현에 모란종 강자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들이 지금까지 싸워본 상대 중 가장 강한 존재였다. 게다가 ‘야수의 진’도 쓸 수 없었으니, 지금 그들의 실력으로 메두사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게 모란종의 장로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는 사이, 메두사의 손에 무지개 빛 장검이 나타났다.
“저 여자를 막아!”
메두사의 움직임에 모란 두 장로는 질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실력으로 결코 메두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두 장로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모란종 강자들은 잠지 주춤거리다가 결국 이를 꽉 문채 메두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사방에서 몰려오는 공세에도 메두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돌연 수 백 마리의 무지개 빛 뱀이 허공을 뒤덮었다.
뱀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파도 앞에 모란종의 강자들은 감히 메두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메두사가 모든 강자들의 공격을 막아내자, 두 장로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결국 두 노인은 잠시 시선을 주고받다가 이를 악문 채 메두사를 향해 전력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온 힘을 다해 공격을 펼치는 두 사람을 보며 메두사는 가볍게 날아올라 또 다시 휘황찬란한 칠색의 염력을 내뿜었다.
투종 강자의 일격에 두 장로의 몸이 세차게 떨리며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힘 없이 날아가고 말았고, 그들의 입에서는 검붉은 선지피가 뚝뚝 흘러 내렸다.
“야수의 진이 없으면 네 놈들은 그냥 쓰레기야.”
메두사는 만신창이가 된 두 장로를 보며 차갑게 웃음을 지었다. 곧이어 그녀가 다시 한 번 검을 움켜쥐자, 두 장로는 새파랗게 질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화려한 빛이 번쩍이더니 날카로운 검이 날아가 두 장로 중 한 명의 등 뒤에 꽂혔다. 이 광경을 목격한 나머지 한 장로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더욱 힘껏 내달렸다.
그러나 채 열 걸음도 가기 전에 그의 가슴팍에도 날카로운 장검 하나가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세 장로가 시체로 변하자, 나머지 모란종의 강자들은 고양이 앞에선 쥐 떼 마냥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