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1화. 후계자
“대장로님, 아마 잘못 느끼신 걸 겁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요?”
메두사도 넋이 나간 상태에서 회복 되어 황급히 물었다.
“생명의 기운이 아주 미약해 우리도 장로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비술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정도이니, 네가 느끼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지. 그 자그마한 생명의 기운이 정말 새 여왕이 될 씨앗인지는… 우리도 지켜보아야겠지만 말이다.”
대장로가 메두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요?”
당황한 이준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되물었다. 그 무시무시한 메두사가 어머니라니. 게다가 자신을 위해 아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삼대 제국의 연합군에 맞서 최전선에서 일 년을 싸워왔단 말인가.
“글쎄…우리는 인간들과 다르니까. 조금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런 일은 우리 종족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라 우리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네. 다만 보통 여왕의 ‘씨앗’은 3년에서 5년은 기다려야 하네. 확실한 것은 그 때 가서야 알 수 있겠지. 참으로 기이한 일이야.”
이어지는 대장로의 말에 이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뱀인간족의 장로들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일인데다가, 앞으로 3년에서 5년은 지켜봐야 한다니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돌연 억울함과 당혹감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잠깐… 근데 내가 왜 책임을 져야하지? 아니, 나는 그냥 칠색 이무기를 데리고 다녔을 뿐이잖아. 칠색 이무기의 영혼이 메두사와 융합한 것도, 사라져가는 이무기의 영혼이 그녀의 체내에 자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온전히 내 책임은 아니잖아. 아니, 나를 따라다니다 당한 일이니 내 책임이 맞나? 아니…’
그러나 이준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대장로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칠색 이무기, 아니, 이제 메두사의 아이지. 그 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네. 우리 종족은 비술을 통해 여왕의 씨앗에게 상급, 중급, 그리고 하급의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고 당연히 높은 등급의 에너지가 주입되어야만 더욱 강한 후계자를 낳을 수 있지. 이는 우리 종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앞으로 모든 뱀인간들이 하나가 되어 에너지를 공급하게 될 거야.”
그렇게 이준이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대장로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비술로 여왕의 씨앗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데에는 꽤나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네. 중급 비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뱀의 비약’이 필요하고, 상급 비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무기의 정수’가 필요하지. 각각 6레벨, 7레벨 연금비약이네. 그 비약으로 메두사의 체내에 자리 잡은 잠재능력을 폭발시킨다면 나중에 아주 큰 인물이 될 수 있을 테지. 다만…그 연금비약을 만들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이 문제네.”
대장로의 이야기를 듣던 이준은 멍하니 넋을 잃고 메두사 여왕을 바라보았다. 모체에 있을 때부터 이런 방식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흡수해 길러졌다니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일 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놀라운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대로 멍하니 있다가는 뜬금없이 만들지도 않은 아이의 아비가 될 판이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저와 무슨…?”
“이보게. 지금 우리 종족의 미래가 걸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유는 중요하지 않네. 그것이 자네 탓이든, 불의의 사고였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일단 여왕의 씨앗이 자라고 있단 말일세. 우리는 전력으로 새로운 여왕을 키워내야 해. 괜히 시간을 끌다가 적절한 시기를 놓치게 되면 그땐 돌이킬 수 없단 말이야.”
대장로의 진중한 말투에 이준의 얼굴이 점점 더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메두사의 모습이었다.
매번 자기를 죽이네 살리네 하며 독살스런 말을 뱉어내던 그녀의 온화한 표정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그 순간, 이준과 메두사의 표정을 살피던 대장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 일은 이준 연맹주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는 일이니, 그대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아, 아니…그게…”
“그럼 자네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인가? 메두사가 작은 이무기로 변했을 때 그것을 데리고 간 것이 누구지? 그녀를 우리 뱀인간들에게로 바로 돌려보내지 않고 몇 년이나 데리고 다닌 것은? 자네가 그 천계의 탑인지 나부랭이인지에 있는 불바다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 칠색 이무기와 메두사 여왕의 영혼이 융합될 일이 있었을까? 그리고 듣자하니 칠색 이무기는 몇 번이나 자네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는데 자네를 구하다가 자아를 잃고 여왕의 씨앗이 된 그 아이를 버리겠다는 말인가? 참으로 뻔뻔하군.”
이어지는 대장로의 말에 이준이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대장로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걱정 말게. 자네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고 시인하라는 것이 아니야. 그건 가당치 않지. 다만 우리 입장에서는 종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고, 이 일에 자네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점을 명백히 하려는 것일세. 게다가 한 가지 더, 이번에 자네와 가한제국을 돕기 위해 우리는 그간 쌓아놓은 수많은 보물들을 모두 사용해 버렸어. 그러니 불의 연맹의 수장으로서도 자네에게는 우리를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지.”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이준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메두사와 칠색 이무기, 자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결국 새로이 태어날 자신들의 여왕을 위해 연금비약을 만들어 달라는 말을 꺼내기 위해서였던 것이 분명했다.
“연금비약을 원하시는군요.”
“그렇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자원을 사용했어. 지금 상태로는 하급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네. 그러니 자네에게 6레벨 연금비약인 ‘뱀의 비약’을 요구하고 싶은데 어떤가? 동맹의 대가라고 생각하게. 게다가 자네를 위해 애쓰다 이렇게 되어버린 칠색 이무기가 이대로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면 자네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는가?”
대장로의 마지막 말에 준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지던 칠색 이무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 아이 덕분이 목숨을 건졌던 적이 몇 번이던가. 칠색 이무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참동안 고민에 잠겨있던 이준은 칠색 이무기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6레벨 ‘뱀의 비약’이 아니라 7레벨 ‘이무기의 정수’를 만들려하는데 어떻습니까?”
상대방의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네 장로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 했다.
“왜요? 그건 안 되나요?”
“아…아닐세, 되지, 되고말고.”
대장로는 행여 이준의 마음이 바뀔세라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7레벨 연금비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는 6레벨 연금비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지만, 뱀 인간들은 새로운 여왕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솔직히 7레벨 연금비약은 아직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만, 대장로님의 말대로 칠색 이무기는 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그 아이가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다면 저도 최선을 다하는 게 맞는 거죠. 게다가 이번에 가한제국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뱀인간 여러분들이 그간의 감정을 잊고 전심전력으로 인간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니까요. 저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이무기의 정수 같은 고급 연금비약을 만든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시간만 충분히 있다면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칠색 이무기에게 에너지가 필요한 시기까지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이준의 눈길이 슬며시 메두사를 향했다. 앞뒤야 어찌됐든, 그녀는 이미 뱃속의 후계자를 길러낼 각오를 굳힌 듯했다.
“음… 지금 몸속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주 미약하네. 이로 미루어보아 칠색 이무기의 영혼이 완전히 작아져 메두사의 아이가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이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2년 안에는 영양분을 공급해야 하네. 그러니 2년 안에는 연금비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소리일세.”
“2년이라……”
나지막하게 탄식을 내뱉던 이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장로님 걱정 마시죠. 2년 안에는 반드시 연금비약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마침내 이준의 입에서 확답이 나오자 대장로의 얼굴에 꽃이 폈다. 독사 같던 그녀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이준 연맹주가 확약을 해주니 이 노인네도 마음이 놓이는군. 자네는 약속을 꼭 지키는 자라는 평이 자자하던데, 정말 임신이 맞다면 우리 스네이크족에 전무후무한 최고 강자가 나올 것 같네.”
원하던 것을 얻어낸 탓인지, 네 장로의 표정은 처음의 그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피가 얼어붙기라도 한 것 마냥 싸늘하기 짝이 없던 얼굴에는 어느 새 따스한 온기가 어려 있었다.
대나무 집에서 나온 두 사람은 고즈넉한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말없이 걸음을 옮기를 한참, 이준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쓴 웃음 지으며 말을 꺼냈다.
“그게……”
“걱정할 거 없다. 임신이 사실이더라도 나는 이 아이의 아비가 너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장로님도 너에게 연금비약을 얻어내기 위해 그런 말을 꺼냈을 뿐, 정말로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너는 연금비약만 만들어주면 된다. 그리고 우리 종족에게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나의 핏줄이 맞느냐, 정말로 우리 뱀인간들을 이끌어 줄 새로운 여왕이 되어줄 수 있느냐 하는 것 뿐이니까.”
마치 남의 말을 하듯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메두사의 모습에 이준도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물론 자신을 한 순간에 매정한 사람처럼 만들어버리는 듯한 메두사의 발언에 기분이 조금 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칠색 이무기에게 가진 애정이라면 자신이 더 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칠색 이무기는 고독한 수련 기간 동안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고 몇 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차분히 생각해보면 메두사의 말을 따르는 편이 나았다. 스승님과 아버지, 이씨 가문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판에 칠색 이무기의 아버지 노릇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매정한 말이기야 하지만 아버지가 아닌 것이 사실이 아닌가.
“난 여기까지만 배웅하지. 낙안성과 모란종의 세 장로를 암살하러 가기 전에 연락해.”
그녀는 그 말만을 남긴 채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홱 하니 등을 돌려 걸어갔다.
“아니…”
이준은 차츰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목숨을 건 싸움을 하겠단 말인가?
* * *
메두사를 보내고 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이준의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어이, 거기 서!”
한 명은 아까 전 이준에게 달려들었던 헤파스였고 그 곁에는 또 한 명의 뱀인간이 서 있었다. 헤파스와 달리 그는 엄연한 투황이었고 실력은 2성에서 3성 정도 되는 듯했다.
“헤돈 형, 이 자식이 이준이란 녀석이야!”
헤돈이라는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로운 세모꼴의 눈동자로 이준을 노려봤다.
“인간이여, 나는 뱀인간들의 제2 여단장, 헤돈이다. 우리가 인간들과 동맹을 맺은 건 사실이나 우리 종족과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갑자기 도발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꺼져.”
“다음번에는 여기서 널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결국 상대의 마지막 한마디에 이준의 마음에 남아있던 마지막 인내심마저 바닥이 나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