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0화. 사대 장로
삼국 연합군은 이미 철수했지만, 검은 산 요새는 여전히 삼엄한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구름제국의 변방으로 잠입해 낙안성과 모란종의 세 장로를 죽이겠다는 계획을 알리자, 회의실이 발칵 뒤집어졌다. 위험부담이 너무 큰 일 이었다.
“만일 그 쪽에서 함정을 판 거라면, 너도 메두사도 위험해진다. 설마 두 사람에게 가한제국의 명운이 걸려있다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지?”
이정의 표정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의 곁에 있던 동해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낙안성과 모란종의 세 장로가 곧 다시 가한제국을 침공할거야. 투종 둘에 새롭게 가세한 모란종과 금안종의 강자들을 상대하는 것 보다는 이게 훨씬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이어지는 동생의 말에 이정은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매만졌다. 그 역시 이것이 가장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전략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방법이기도 했다.
“정말로 독종의 종주를 믿어도 되겠어?”
이정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물었다.
“응. 믿을 수 있어. 내가 불의 연맹에 남아 있었다면 애초에 벌어지지도 않았을 전쟁이야. 확실해.”
“후우…좋아. 그럼 일단 네가 말한 대로 해보자. 단, 그 날 불의 연맹의 강자들도 함께 움직여 성 주변에 잠복해 있을게. 혹시라도 잘못되면 바로 구출할 수 있게.”
이준의 결심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정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 뿐 이었다.
형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준이 무겁게 가라앉은 회의실을 쭉 둘러보며 웃음을 지었다.
“여러분, 그렇게 심각하게 계실 거 없어요. 앞으로 저희 불의 연맹은 점점 더 강해질 거고, 서북 지역이 아니라 투기 대륙 전체에서도 우리의 적수를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금안종과 모란종의 투종을 쳐내는 것은 그 시발점이 될 거예요.”
이준의 당돌한 선언에 사람들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시커먼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 * *
이준이 회의실에서 걸어 나오자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가지. 오래 기다렸다.”
그는 힘겹게 뒤를 돌아 상대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회의실 밖에 서 있던 사람은 역시나 메두사였다.
이준이 메두사를 향해 걸어갈 때, 마침 동해와 가철이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준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때, 곁에 있던 메두사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랑 이준은 볼 일이 있으니 따라오지 말거라.”
하지만 동해와 가철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짓다가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이준을 뒤로하고 재빨리 달아났다.
순식간에 꽁무니 빼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이준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가. 가자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상대의 표정에 메두사의 입에서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메두사를 따라 널찍한 거리를 지나 한참을 걷자, 갑자기 주위가 초저녁처럼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했다. 성벽의 외곽에 자리한 뱀인간들의 주거지는 높이 서 있는 성벽에 의해 그늘져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주거지 주위로는 뱀인간족의 병사들이 무기를 쥔 채 순찰을 돌고 있었다. 얼음 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순찰을 돌던 병사들은 메두사를 발견하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예를 갖추었다.
그렇게 길 하나를 지나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커다란 정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메두사가 손을 휘두르니 대문이 열렸고 메두사는 거침없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준은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그녀의 뒤를 쫓았다.
이준이 안으로 발을 들이기 무섭게 거대한 형상이 나타나 세차게 바닥을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이준은 질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번개처럼 청록색 불꽃을 쏘아내며 상대의 공격에 맞섰다.
콰앙!
묵직한 두 개의 힘이 뜰 안에서 충돌하자 바닥에서는 희뿌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이준에게 공격을 펼친 그 자는 공중에서 몇 바퀴나 구르고 나서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준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건장한 남자 뱀인간이었다. 험악한 생김새를 한 사내의 팔뚝에는 커다란 뱀 두 마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문신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대는 모습에, 보고만 있어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는 몸 밖으로 염력을 쉬지 않고 뿜어대며 험상궂은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넌 누구지?”
이준이 험상궂은 사내를 주시하며 물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상대는 투왕 최고계급에 이른 상당한 실력자였다. 물론 자신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 인물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헤파스다.”
상대는 이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물었다.
“네 놈이 이준이지?”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파스라는 자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순간 그의 단단한 팔 근육이 더욱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새까만 뱀 문신이 생명을 가진 것처럼 꿈틀댔다.
“후…한 번 더 공격하면 그 땐 나도 봐주지 않겠어.”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고 죽자고 달려드는 상대의 태도에 분노한 이준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손바닥 위로 불꽃을 소환했다.
“죽어라!”
하지만 헤파스는 겁을 먹기는커녕 더욱 분노한 듯 곧바로 몸을 벌떡 일으켜 이준을 향해 돌진했다.
“다들 그만!”
그 순간, 메두사가 두 눈을 치켜뜬 채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헤파스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헤파스. 지금 네 앞에 있는 자가 이 메두사의 손님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모양이구나.”
메두사의 서늘한 목소리에 헤파스는 입도 뻥긋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 대한 애정과 존경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여왕과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 했다.
그는 이준을 한 번 더 노려보고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곁으로 물러섰다.
헤파스가 길을 비키자 이준의 손에서도 불꽃이 사라졌다. 정원을 훑어보니 넓은 정원에 수많은 뱀인간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인반사(半人半蛇)의 강자들은 하나 같이 이준을 향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졌다.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메두사의 태도였다.
표정은 변함없이 차가웠지만 이준을 감싸는 듯한 말투는 오랜 시간 그녀를 보필해온 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따라 와.”
메두사 여왕은 입구에 서 있는 이준을 향해 한 마디를 던지고는 곧장 뒤 돌아 뜰 안으로 걸어갔다. 이준은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메두사는 말 한마디 없이 한적한 길을 한참이나 걸어 깊은 숲 속에 위치한 작은 대나무 집 앞에서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대나무 집에 발을 내딛자 순식간에 등불이 타오르며 넓은 방을 비췄고, 그 안에는 네 명의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메두사가 그들에게로 다가가 조용히 자리에 앉자 노파가 천천히 눈을 떠 이준을 바라봤다. 눈꺼풀 아래 숨어있던 다이아 모양의 눈동자는 흡사 독사(毒蛇)를 연상케 했다.
그녀가 눈을 뜨기 무섭게 나머지 세 노파도 잇따라 눈을 떴고, 곧이어 네 여인에게서 음산한 기운이 솟구치더니 공중에 모여 까만 뱀 한 마리를 형성했다. 거대한 뱀의 감정 없는 눈동자가 이준에게 고정되어 있자 무형의 압박감이 그를 천근만근 짓눌렀다.
강력한 기운과 압력을 느낀 이준은 청록색 불꽃을 피워내 자신의 몸을 감쌌다.
불꽃이 나타나자 실내의 온도가 순식간에 뜨겁게 치솟으며 네 노파에게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기운을 밀어냈다.
“천지의 불꽃이라니…”
이준의 몸을 둘러싼 청록색 불꽃을 발견한 노파들의 눈빛이 일순 크게 흔들리며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거대한 뱀의 형상이 빠르게 소멸되었다.
“자네가 바로 불의 연맹주 이준인가? 나는 뱀인간족의 대장로, 그리고 이쪽은 차례대로 둘째 장로, 셋째 장로, 넷째 장로네.”
그녀의 목소리는 돌로 유리를 긁는 듯 거칠기 짝이 없었다.
“이준입니다. 네 장로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실 오늘 자네를 부른 것은… 그저 궁금한 것이 있기 때문이니 너무 긴장하지 말게.”
대장로가 다이아몬드 모양의 동공을 쉴 새 없이 움직여 이준의 온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말했다.
“네, 말씀하시죠.”
“이 일은 우리 종족, 그리고 메두사와 관련된 것이네.”
헤파스와 달리 대장로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냉정한 말투가 도리어 이준의 속을 바싹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이번에 메두사 족장이 돌아왔을 때 확인해보니 그 안에 다른 영혼이 들어있더군. 듣자 하니 불꽃 연맹주의 책임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순간 네 장로의 눈빛이 이준에게로 쏟아졌다. 이에 당황한 이준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네, 하지만 그것은… 제 의지와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전달 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자세한 연유야 어찌됐든 자네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
대장로가 자신의 말꼬리를 끊으며 반문하자 이준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우리의 규정대로라면 자네는 뱀 구덩이에 던져져 온 몸을 뜯어 먹혀야 하네. 우리의 여왕을 반쪽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 때, 대장로 옆에 있던 둘째 장로가 섬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이준은 곧바로 염력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로님, 그건 정말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메두사의 의지도 아니었지요. 이 일에 대해 저희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이준이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면 메두사는 평소답지 않게 빳빳하게 굳은 채로 인상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기개가 넘치는 군.”
하지만 대장로는 더 이상 이준을 질책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예상 밖의 반응에 놀란 준은 곧바로 염력을 가라앉히며 가만히 그의 눈을 응시했다.
“이제 장난은 그만 하지. 비록 한시적이나마 가한제국과 동맹을 맺은 판에 자네와 사이가 틀어질만한 일을 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저를 부르신 이유가 뭐죠?”
대장로는 나머지 세 장로와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뒤 한참동안이나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 했다.
“이번에 메두사 족장에게 세례 의식을 진행하면서 뱃속에서 작은 생명의 기운을 발견했지. 그러니까… 칠색 이무기의 영혼이 융합되거나 사라진 게 아니라 그녀의 아이가 된 것 같단 말일세. 그리고 듣자하니 메두사와 칠색 이무기의 영혼이 융합된 것은 자네의 책임이라지? 그렇게 따지면 자네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겠군.”
이어지는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에 이준과 메두사의 얼굴이 순간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대나무 집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이준과 메두사는 모두 놀란 토끼 눈을 하며 네 장로를 빤히 바라봤다.
아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렇다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란 말인가?
메두사의 반응도 이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항상 냉혹하고 침착하던 메두사도 이번만큼은 평정심을 잃고 마른 침을 꿀꺽 삼킬 뿐,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많이 당황한 것으로 보였다.
“저어… 저기 혹시 대장로님께서 잘못 느끼신 건 아닐까요? 그게… 그 때 지하에서 칠색 이무기의 영혼이 메두사 여왕과 융합된 지는 벌써 일 년도 넘게 지났습니다만 단순히 영혼이 남아있다면 모를까, 대장로님의 말대로 칠색 이무기가 메두사 여왕의 아이가 되었다면 이미 진작에…”
이준은 간신히 정신을 붙잡으며 더듬더듬 설명을 늘어놓았다.
“뱀 인간은 인간과 다르다네. 게다가 메두사 족장은 칠색이무기까지 삼킨 상태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 회임을 일 년, 심지어는 수년 하는 건 흔한 일이네.”
대장로의 침착한 답변에 이준은 더욱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