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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369화 (369/818)

제369화. 극약처방

하늘이 어두워지자, 1년간의 싸움이 거짓말인 것처럼 온 산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준은 요새와 멀지 않은 곳에 솟아 있는 낮은 산봉우리 위에 앉아 조용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나무 기둥에 기댄 메두사가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그 여자 안 올 것 같은데. 아무래도 괜히 기다린 것 같군.”

이에 이준은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 혼자 올걸. 아직 나를 못 믿어서 그런 건가?”

“누가 알아, 군대를 퇴각시킨 것도 퇴각시킨 척만 한 것일지도 모르지. 밤에 만나자고 약속해 놓고 널 죽이고 가한제국을 치려고 한 걸지도 모르고 말이야.”

메두사가 입을 내밀며 중얼거리자, 이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그 순간, 허공에 기이한 파문이 일더니 새하얀 형체 하나가 빠르게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아라를 발견한 이준은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잘 왔어.”

곧이어 아라가 사뿐히 산봉우리에 착지했다. 신비한 회보라색 눈동자는 달빛을 받아 더욱 신비한 빛을 발했다.

“세 세력의 군대를 전부 철수 시키느라 처리할 일이 많았어. 철수한 다음에 큰 소란이 일어나서 그걸 가라앉히는데 시간이 좀 걸렸거든.”

“세 종파가 모두 철수하지 않겠다고 하는 거야?”

“아니, 구름제국은 이미 독종(毒宗)의 소유나 다름없고, 독종의 종주는 나야. 그러니 구름제국의 군대나 독종 사람들이 내 명령에 거역할 수는 없지. 하지만 금안종과 모란종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우리와 연합한 것뿐이지 내 부하는 아니니까. 아마도 아무 소득 없이 철수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겠지.”

아라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낙안성도 그렇고, 모란종의 세 장로도 그렇고, 내가 치명상을 입혔는데 그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다는 말이야?”

“금안종과 모란종은 강한 세력이야. 이번 전쟁에서 종파 내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을 보낸 것은 맞지만, 아직 그 아래에는 수많은 강자들이 남아있지. 상황을 보니 내가 전쟁에서 발을 빼도 그들은 여전히 가한제국을 치려할거야.”

아라는 이준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낙안성과 모란종의 세 장로가 중상을 입은 건 맞아. 하지만 그쪽에도 상급 연금술사가 있으니, 며칠이면 회복할 수 있겠지.”

이어지는 아라의 설명에 이준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불의 연맹과 가한제국은 또 다시 힘든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금안종과 모란종은 낙안성과 세 장로에게 기대고 있으니 그 두 쪽을 해결한다면 세력도 힘을 잃고 가한제국을 침공할 생각도 버리겠지.”

그 때,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메두사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메두사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낙안성과 모란종 세 장로가 중상을 입은 지금이야말로 그들을 말살할 적기였다. 혹시라도 그들이 다시 돌아오고 뒤이어 두 종파의 증원부대가 도착한다면 불의 연맹도, 가한제국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곧이어 메두사가 빠르게 공중으로 날아올라 아라의 퇴로를 차단했다. 아라가 그들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사생결단을 낼 듯한 기세였다.

메두사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아라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네까짓게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한 번 해보면 알겠지.”

또 다시 불 같이 타오르는 두 여자를 보며 이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두 사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불의 연맹은 내 손으로 직접 세운 세력이라 이대로 망하는 걸 지켜 볼 수 없어. 낙안성과 모란종의 세 노인네가 가장 큰 위협이니 그 사람들을 제거해야해.”

결의에 가득 찬 이준의 눈빛을 보며 아라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이를 꽉 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놈들과는 애초부터 마음이 맞지 않았어. 네가 녀석들을 처리하고 싶다면 알아서 해. 난 끼어들지 않도록 하지.”

아라의 대답에 이준은 비로소 한숨을 푹 내쉬며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이에 살기로 번뜩이던 메두사의 눈빛이 다시 평온한 빛을 되찾았다.

“잘 생각했군.”

아라는 메두사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이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세 국가의 군사들이 전부 구름제국 변방의 작은 성에 모여 있어. 낙안성이랑 모란종의 세 장로도 그 쪽에 있고. 두 사람의 부상이 심해서 경계가 더 철저할거야. 쳐들어가더라도 쉽지는 않을걸.”

“내가 잘 해결해볼게.”

잠시 고민하던 이준은 곧바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움직이면 내가 성 밖에서 방어하고 있는 사람들을 철수시킬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야. 단, 공격은 너희가 직접 해야 해. 내가 너희를 도와줬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내 명예가 실추되니까.”

“고마워.”

아라는 가볍게 고갯짓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재난 독체를 통제할 수 있게 해줄 건지 말해봐. 나한테는 이게 제일 중요하니까.”

상대의 질문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두운 색깔의 회색 두루마리 족자 하나를 꺼내 아라에게 던졌다.

“해법은 여기 적혀 있어. 네가 직접 봐.”

아라는 가느다란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친 뒤 흥분에 찬 표정으로 그것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재난 독체(毒體). ‘고난 독체’, ‘고난의 독체’라고도 불리며, 선천적으로 독을 품고 있어 접촉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독으로 사망한다. 독을 복용하며 생명을 유지하지만 복용량이 많아질수록 독성이 점점 짙어지며 일정 수준 이상 축적될 경우 완전히 폭발한다. 일단 한번 폭발을 일으키면 독성이 수 킬로미터나 뻗어 나가 주위의 모든 것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이 몸을 고칠 수만 있다면 몸속의 독을 통제해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

「재난 독체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체내에 축적된 독소를 응집해 몸속에서 ‘맹독의 결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재난 독체를 가진 이들 중 누구도 ‘맹독의 결정’을 만드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맹독의 결정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가 너무 희귀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재료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세 종류의 천지의 불꽃, 7레벨 전갈이무기의 마정석, 보리점액.”

이에 희망으로 반짝이던 아라의 눈빛이 점점 탁하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세 종류의 천지의 불꽃이라니… 실로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었다. 보통 천지의 불꽃을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전투력이 폭증했고, 모든 연금술사의 부러움을 샀다.

투기대륙의 모든 사람이 꿈꾸는 연금술사 직업을 가진 이들이 가장 원하는 보물. 누구나 원하지만 그 누구라 해도 천운이 닿지 않는 이상 감히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보물. 그것이 바로 천지의 불꽃이었다. 그런데 그런 천지의 불꽃 세 개라니…

나머지 두 조건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갈이무기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왔던 공포의 마수로, 그 괴물과 싸워 마정석(魔晶石)을 얻어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이 없었다.

아라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자 이준의 입가에서도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맹독의 결정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 중 가장 귀한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종류의 천지의 불꽃은 내가 갖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하지만 전갈이무기의 마정석과 보리점액…너도 같이 찾아줘야 해.”

“뭐라고?”

아라는 귀신에 홀린 사람마냥 토끼 눈을 뜨고 상대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떻게 이제 나이갓 스물을 넘긴 연금술사가 천지의 불꽃을, 그것도 세 종류씩이나 갖고 있단 말인가?

이준은 화들짝 놀란 아라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튕겨 청록색의 불꽃을 만들어냈다. 곧이어 청록색 불꽃은 푸른 불꽃과 무형의 불꽃으로 나뉘었고, 이내 그의 이마에서 또 하나의 하얀 불꽃이 피어올라 그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투황인 네가 투종 강자랑 맞붙을 수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군. 어쩐지… 하지만, 이화만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 전갈이무기의 마정석도 그렇고, 보리점액도 그렇고… 평생 구경이나 한번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물건들이야.”

풀 죽은 아라의 모습을 보며 이준은 위로하듯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낫지. 내가 찾을 수 있게 도울게.”

이에 아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천지의 불꽃 세 개에 비하면 나머지 두 개는 ‘구할 가능성조차 없는’ 수준의 물건은 아니었으니, 희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내가 돌아가서 관련된 정보를 수소문 해보면서 정보를 얻으면 바로 알려줄게.”

아라가 두루마리를 다시 이준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네가 움직일 때 이 옥 조각을 부숴서 신호를 줘. 그럼 나도 최대한 협조할게.”

이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옥조각을 저장반지 안에 집어넣었다.

용건을 마친 아라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아라의 뒷모습이 검은 밤하늘 저 멀리 완전히 사라지자, 이준은 비로소 허리를 뒤로 젖히며 기지개를 펴고 고개를 돌려 메두사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돌아가자.”

자신을 보며 환히 웃는 이준의 표정에 메두사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여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우리가 움직일 때 그쪽에서 우릴 포위할 수도 있는 거잖아. 가한제국과 뱀인간들의 운명이 우리에게 걸려있다고.”

“난 믿어.”

너무나 단호한 이준의 한마디에 메두사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무언가 못 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사람 잘못 본 게 아니길 빌지. 그보다 내일 나와 함께 뱀인간들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어때?”

“내가? 왜?”

순간 메두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이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설명했다.

“후…복잡해. 우리 뱀인간들 중에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있지. 그 중에 하나가 내 영혼에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렸어.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아. 여왕의 몸에 인간에게 꼬리를 살랑대는 이무기의 영혼이 섞였으니…그리 좋아하지는 않겠지.”

이어지는 메두사의 말에 이준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래서… 어,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칠색 이무기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너 하나뿐이니, 너를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려 할지도 모르지.”

오랜만에 메두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죽여 버린다는 말에 이준은 새삼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만! 죽여서 문제를 해결한다니. 잘 생각해봐야지 않겠어? 지금 나는 불의 연맹의 연맹주라고. 나한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너희 뱀인간들과 가한제국 사이에 갈등만 생길 거야.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잖아.”

“그런 사정은 장로들한테나 가서 말해봐.”

메두사의 단호한 말투에 이준은 이마를 짚으며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생각지도 못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그럼, 내일 데리러 오도록 하지.”

메두사는 이준의 표정을 본체만체하며 곧바로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 후,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녀가 멈춰 서자 이준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나와 한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거, 걱정하지 마. 혼백의 비약은 반드시…”

“그래, 알겠어.”

‘그래? 그게 끝이야?’

준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그 말을 삼키며 멍하니 메두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죽이네 살리네 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그래, 알겠어’라니.

담담한 그녀의 한마디에 이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가 잠시 안심했다. 하지만 당장 내일 뱀인간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야 된다면 가야지 별수 있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동해 선배님과 가 장로님과 함께 가는 게 좋겠어.’

생각을 정리한 이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불꽃 염력 날개를 소환해 검은 산 요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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