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8화. 휴전
아라는 가한제국을 떠난 뒤 구름제국의 작은 마을에서 일 년을 지냈다. 그녀가 지낸 곳은 자녀가 없는 노부부의 집이었는데, 두 노인은 마음씨 착한 그녀를 정말이지 친자식처럼 아껴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1년 정도를 두 노인의 딸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그녀의 몸에 잠재되어 있던 독성이 폭발하던 날, 그녀를 딸처럼 생각하던 노인들은 아라의 독에 의해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이 썩어문드러지고 말았고, 두 노인이 죽어버린 뒤에도 여러 사람이 같은 이유로 고통스럽게 죽어나갔다.
그녀는 두 노인의 시체를 묻은 뒤 정신을 잃을 때까지 무덤 앞을 지켰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치 노인의 그것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절망했다. 자신은 숨쉬는 것만으로도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 덩어리, 그 자체였다.
* * *
상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직감한 이준은 차마 말을 잇지 못 하고 고개를 떨궜다.
“크윽!”
그 때, 돌연 메두사의 낯빛이 새파랗게 변하며 피를 토해냈다.
“왜 그래?”
“저 녀석 피에 독이 들어 있었군…”
메두사는 고통에 찬 모습으로 이를 갈며 자신의 염력으로 독을 몰아내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게 바로 재난독체다.”
아라의 서늘한 한마디에 메두사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좋아. 독이 퍼지기 전에 네 년의 숨통을 끊어주마.”
“자신 있으면 해보시지.”
“그만!”
곧이어 두 사람이 다시 한번 염력을 끌어올리자, 이준이 몸을 날려 두 사람 사이를 가로 막았다.
“지난번에 얘기 했었잖아. 네가 어떤 상황이든 나는 항상 네 친구라고!”
“그런 말 들은 기억 없어.”
“해독약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대체 왜 이러는거야!”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아라의 입가에 또 다시 서늘한 미소가 번져갔다. 보는 사람마저 마음이 얼어붙을 정도로 싸늘한 표정이었다.
“남의 일이라고 참 쉽게 말 하는군!”
하지만 이준이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괜찮아. 난 독 따위에 당하지 않으니까.”
다음 순간, 그녀의 팔목에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이거 놔!”
자신의 살결에 와 닿는 따스한 감촉에 아라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거칠게 상대의 팔을 뿌리쳤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이준은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려 아라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녀와 닿았던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의 손은 이미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하지만 청록색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순간, 검은색의 독이 깨끗하게 불타 사라지고 말았다.
“네가 아직 날 친구로 생각한다면 내 말을 믿어봐.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재난독체의 폭발을 가속화 시키는 것밖에 안 돼. 독이 완전히 폭발한다면 그때는 수십 리 범위에 있는 사람과 마수들이 모두 죽고 말 거야.”
“흥…네가 독을 막을 순 있어도, 내 몸을 어찌하지는 못해. 난 걸어다니는 독 덩어리야.”
아라는 또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몇 년 동안이나 자신의 몸에 있는 독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모두를 죽이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더욱 커질 뿐이었다.
독종의 종주가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이준과 대화를 주고 받는 모습에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요새 위로 돌아간 동해는 사람들이 던지는 시선에 자기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릴 뿐 이었다.
“저 무시무시한 여자가 갑자기 싸움을 멈추다니 대체 무슨 일이지?”
해길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가철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이유가 뭐든 알게 뭐야. 저 여자가 멈추면 잘 된 거 아니겠나. 저 여자가 마음 먹고 독을 뿌린다면 순식간에 수 천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고 말거야.”
* * *
“아니, 난 통제 할 수 있어.”
“통제라니 무슨 말이야?”
이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라가 두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재난독체를 완전히 통제만 한다면 앞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중독사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게다가 몸 속에 있는 독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거야.”
확신에 가득찬 이준의 말투에 아라의 회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걸…정말 할 수 있어?”
“나만 믿어.”
이준은 약로가 남긴 방대한 자료 속에서 세 가지 천지의 불꽃을 사용해 어떠한 독이라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실제로 해보지는 않았지만, 자신 역시 불꽃을 사용해 각인 독을 제거한 적이 있었으니, 아라의 독을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한참동안 말없이 이준의 눈을 바라보던 아라는 결심을 굳힌 듯 이를 악물고 메두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메두사를 향해 손을 뻗자, 보라색의 독극물이 메두사의 몸을 빠져나와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흥…내 힘으로도 이 정도 독은 몰아낼 수 있다!”
메두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봤다.
“정말 재난독체를 통제할 수 있게 해준다면 내가 책임지고 군대를 물리지. 내가 이곳을 침략한 이유도 모두 재난독체 때문이니까.”
“뭐? 네 년 때문에 나의 동족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당했는데, 누구 맘대로!?”
“내 명령 하나면 가한제국은 물론 네 동족들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어. 그리고 내가 마음먹고 독을 뿌린다면, 만에 하나 내가 죽더라도 수 천, 아니 수 만명의 사람들이 시체로 변하고 말겠지. 해볼텐가?”
두 사람이 또 다시 살기를 피워대자, 이준이 곧바로 메두사의 앞을 막아섰다.
“채린! 제발 그만해! 아라가 정말로 독을 뿌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도 잘 알잖아! 지금 네가 참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고! 네 동족들도!”
“이…네 놈이 감히…좋아. 하지만 내 동족들을 해친 대가는 반드시 받아내고 말테다.”
이준의 말대로였다. 만일 아라가 마음 먹고 독을 뿌려댄다면, 자신은 어쩔지 몰라도 실력이 약한 동족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나갈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메두사가 염력을 거두어들이자, 이준은 곧바로 아라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가한제국을 공격한 게 재난독체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에 아라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체 모를 조직에서 날 찾아와서는 가한제국과 불의 연맹을 박살내고 불의 연맹 연맹주의 목을 가져다주면 재난독체의 해독 방법을 알려준다고 했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답변에 이준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그 동안 가한제국을 쓸어버릴 기회는 많았어. 그런데 연맹주라는 인간은 나타나질 않더군.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가한제국과 불의 연맹을 끝장냈을거야. 하지만 그 연맹주라는 인간이 바로 너일 줄이야…”
“설마…그 조직이라는게 영혼의 궁전이야?”
이어지는 이준의 질문에 아라는 곧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혹시 영혼의 궁전의 사자가 아직도 구름제국에 남아있어?”
“나도 몰라. 그 말을 전한 뒤로 가끔 용건이 있을 때 제 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니까.”
아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스승과 아버지를 구해내기 위해서는 영혼의 궁전을 찾아가야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정보가 부족했다.
“어쨌든…오늘은 네 말을 믿고 군대를 철수하겠어.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방법을 찾아내. 재난독체의 독성이 점점 더 내 통제를 벗어나고 있으니까.”
곧이어 아라가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구체적인 폭발 시기는 언제쯤인 것 같아?”
“빠르면 반 년, 아무리 길어봤자 2년이야.”
“생각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군…”
빠르면 반 년 이라는 말에 이준의 낯빛이 다시 어둡게 물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어.”
“좋아. 어찌됐든, 최선을 다해볼게. 재료만 다 모으면 바로 독을 통제할 수 있을거야.”
아라는 다시 한번 이준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려는 듯 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곧바로 등을 돌려 날아갔다.
“믿어보지. 자세한건 오늘 밤에 다시 얘기해.”
아라가 날아가자, 공중에 떠 있던 세 강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세 세력은 구름제국으로 철수합니다.”
“종주님…!”
‘철수’라는 두 글자에 세 강자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요, 그럼 저는 빠질테니 세 분이서 메두사와 불의 연맹을 상대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질문에 세 강자는 울며 겨자먹기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동안 이어져 온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요새 위에 있던 가한제국의 강자들은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연합군의 모습에 연신 눈을 비벼대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잠시 후, 요새 위쪽에서 폭발적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영문이야 어찌됐든, 1년을 넘게 가한제국을 침범하던 적들이 물러가고 있으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동해는 허탈한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이준을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몰라도, 이준이 무언가 거래를 했고, 그것을 상대가 받아들였다는 것만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준이 대체 어떻게 저 독한 여자를 구워삶았는지 궁금하군.”
가철 역시 다소 얼이 빠진 표정이었지만,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황실의 일원인만큼 자리에 있던 그 누구보다도 이 전쟁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뭐 어찌됐든…일단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 같군요.”
지난 1년간 불의 연맹을 지휘해오던 이정 역시 이마를 문지르며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공중에 있던 이준은 요새에서 울려 퍼지는 떠들썩한 환호소리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메두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 년 동안 고생 많았어.”
“네 녀석 인맥이 이렇게 넓을 줄이야. 어딜 가나 아는 사람이 있군.”
“옛 친구일 뿐이야. 이렇게 변했을 줄은 몰랐지만.”
“천둥산에서 우리랑 만났던 그 자와 같은 사람이지?”
이어지는 메두사의 질문에 이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요새 쪽을 가리켰다.
“맞아. 그보다, 어서 가자. 이제 전쟁이 끝났다는 걸 알려줘야지.”
* * *
장장 1년 동안 이어져 온 대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은 날개라도 달린 것 처럼 빠르게 가한제국 전체로 퍼져나갔고, 이에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고 만세를 외쳐댔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제국을 지켜온 메두사와 불의 연맹, 갑자기 나타나 전쟁을 끝내버린 이준의 이름 역시 바람처럼 온 제국 안으로 퍼져나갔다.
바깥 세상이 온통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할 때, 검은 산 요새의 회의실에서는 동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준은 오랜 시간 비워져 있던 상석에 앉아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은 뒤 동해에게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1년 사이에 영혼의 궁전 사람들이 나타난 적이 있었나요?”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궁전이었다. 그가 불의 연맹을 결성한 것도, 이토록 미친 듯이 실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도 모두 영혼의 궁전 때문이었다. 이씨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도, 스승님과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서도, 영혼의 궁전에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없네.”
동해의 대답에 이준은 안도한 듯 긴 한숨을 내쉰 뒤 곧바로 이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큰 형, 불의 연맹은 지금 어떤 상태야?”
“제국에 있는 크고 작은 도시 안에 모두 불의 연맹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지금 불의 연맹은 예전 운남종보다 훨씬 거대하고, 또 많은 일들을 하고 있어. 그들은 우리처럼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으니까.”
이정은 씨익 웃음을 지으며 지난 일 년간 벌어진 일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연맹 내 투왕 강자는 마흔 명 이상이고, 투황은 열 명이 조금 안돼.그리고 불의 연맹내에 ‘불씨’라는 육성 조직을 꾸려서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키워내고 있어. 상업과 관련된 문제는 주로 유씨 가문이 맡고 있고, 연금비약 판매나 생산은 모두 연금술사 협회에서 지원해주고 있지. 우리는 그들에게 재료를 지원해주고 말이야. 이번 전쟁에서 연금술사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을지 몰라.”
이정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신이 만든 연맹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커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큰 형이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조직을 이토록 완벽하게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이제 흑각성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제든지 이쪽으로 돌아오라고 전해줘. 상황도 제법 안정이 됐고…불의 연맹이 이정도로 커졌다면 흑각성 놈들도 흑각성 쪽에 있는 우리 쪽 사람들을 건드리지 못 하겠지.
“그래. 알겠어.”
형과 대화를 마친 이준은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일단 전쟁이 끝났으니 뒷수습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준의 한마디에 이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이…갑자기 나타나서 일을 해결해 놓고는 또 어려운 일은 형에게 다 떠넘기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