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3화. 악전고투
“물론 여왕 폐하께서 당하실리는 없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놈들은 투종 둘에 투종과 대적할 수 있는 놈들이 셋이나 있지만, 우리는 사실상 여왕 폐하 혼자서 악전고투 하고 있으니까.”
설명을 이어나가는 월녀의 얼굴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이번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뱀 인간족 역시 멸망을 피할 수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검은 산 요새로 데려가주시죠.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네요”
이준의 말에 월녀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 쉬었다.
“따라와. 그렇지만 가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수도 있어. 네가 대단한 건 알고 있지만, 투종들의 싸움이 다르니까. 네가 모란종 장로놈들처럼 연합 무투기라도 쓴다면 모를까…”
하지만 월녀의 말을 들은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꼬꼬마, 아직도 안 내려오고 뭐해?”
이준의 행동에 월녀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아무 기운도 감지하기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 조그마한 여자 아이 하나가 공중에서 내려왔다.
“저 어린 애가 투왕 강자야?”
월녀의 말에 보람은 입을 삐쭉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흥… 눈앞에 있는 게 투왕인지 투황인지도 모르고…”
이어지는 소녀의 말에 월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바보처럼 입을 벙긋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준은 생전 처음 보는 그녀의 우스꽝스런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본체는 마수예요. 그러니 어려 보인다고 무시하면 안 돼요. 엄청 강하거든요. 아무튼, 빨리 움직여요. 그쪽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으니.”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월녀는 곧바로 염력 날개를 펼쳐 앞장서서 요새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검은 산 요새는 가한제국 동북 변방지역에 위치한 최대 규모의 요새로, 수백 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보존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난공불락의 요새가 함락될지도 몰랐다.
삼대 세력들은 계속해서 맹렬한 기세로 요새를 침공하고 있었고, 만일 이 요새가 뚫린다면 가한제국은 단숨에 멸망할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가한제국의 운명이 걸린 상황이었다.
* * *
끝없이 펼쳐진 평원 위에는 거대한 산맥들이 장엄한 모습을 뽐내며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었으며, 두 개의 산맥 사이로 거대한 요새가 버티고 있었다.
이 요새는 가한제국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방어선으로, 만약 이 방어선이 뚫린다면 가한제국 안으로 3대 제국의 군대가 물밀 듯이 밀려오게 될 것이 분명했다.
요새의 면적은 그야말로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어 국경에 위치한 귀신의 관문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요새의 성벽은 온통 새까만 암석으로 축조되어 매우 견고했고, 성벽은 투황 강자의 공격조차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했다.
성벽 위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병사들이 가득했으며, 거대한 전차가 빽빽이 자리하고 있어 삼대제국이 똘똘 뭉쳐 돌파하려 한다 해도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성벽의 중심에는 열 명 가량의 강자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요새 밖에 새카맣게 몰려든 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안종에 모란종의 삼대장로까지… 그나마 독종의 종주가 오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군.”
동해는 수차례의 대전투를 거치며 가철과 상대할 수 있는 진정한 투황 최고수준의 강자가 되어 있었으며, 멀지 않은 시일에 그마저 뛰어 넘어 어쩌면 투종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투황 최고 수준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투황은 투황이니, 진정한 투종 강자와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준이 운산과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최고의 염력 수련법과 무려 세 개의 천지의 불꽃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해뿐 아니라 가한제국의 그 누구라도 ‘불개’같은 수련법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천지의 불꽃이나 최고급 무투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흑각성에 사람을 보내 둘째에게 연락을 했으니 아마 곧 원군이 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급한 불을 끄는 정도에 불과하겠지요.”
휠체어에 앉아 있던 이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아무리 불의 연맹이라 해도 삼대 제국의 연합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여왕 폐하, 상처는 좀 괜찮으신가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던 이정이 고개를 돌려 메두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연금비약이 제법 효과가 있더군.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전투에는 지장이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메두사의 냉담한 표정에 이정은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든든한 아군은 분명 투종 강자인 메두사 여왕이었지만, 그녀의 얼음 같은 표정을 볼 때 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 뱀인간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메두사가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돌려 천둥산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휴우. 그나저나 셋째는 어찌 된 건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소식이 없군요. 나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요?”
메두사가 천둥산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이정 역시 천둥산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우리끼리 최대한 버텨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래도 이준 동생이 나타나면 상황이 나아질 테니까. 믿고 기다려보세. 어차피 지금은 다른 수도 없지 않은가.”
곁에 있던 동해가 이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독종의 종주에 금안종의 낙안성, 모란종의 3대 장로까지…모두 여왕폐하가 두려워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저쪽에서도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습니다. 부디 여왕폐하도 조심하십시오. 지금 시점에서 우리 가한제국의 가장 중요한 전력은 바로 여왕폐하이니까요.”
옆에서 표정을 굳히고 있던 가철의 얼굴에도 무거운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메두사가 끄덕이며 무언가를 얘기하려던 그 때, 갑자기 멀리서부터 웅장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젠장. 놈들이 온다!”
북소리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멀리서부터 엄청난 인파가 파도처럼 요새를 향해 돌진했다.
“모든 연맹원들과 뱀 인간족의 투왕들은 각자 경계선으로 흩어져 적의 투왕들을 철저히 막아내도록!”
휠체어에 앉은 이정이 명령을 내리자 성벽 위에 줄줄이 서있던 병사들과 투사들은 물론이고 뱀인간족의 강자들까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바로 그 때, 허공 위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하하. 가한제국이 이렇게까지 완강하게 버틸 줄이야. 삼대제국을 상대로 일년을 버텨내다니, 아주 훌륭해!”
“낙안성…”
요새에 있던 메두사가 조용히 상대의 이름을 읊조리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금색 망토를 두른 사내의 등 뒤로는 태양처럼 찬란한 금빛 날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메두사는 표정을 차갑게 굳히고 살기 담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겨우 2성 투종 주제에 겁도 없이 내 앞에서 잘난 체를 하려 들다니.”
“하하. 역시 그 유명한 메두사답군요. 기백이 넘치는 게 듣던 대로입니다. 어디 저와 모란종의 세 장로를 상대로도 그 기세가 계속될지 한번 봅시다.”
그리고 낙안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갈래의 빛이 허공을 가르며 폭발적인 속도로 날아왔다.
공중에 나타난 세 노인은 모두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었으며, 망토 위에는 각각 사자, 호랑이, 곰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망토는 평범한 재질로 만들어지지 않은 듯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망토에 새겨진 마수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세 노인의 기운은 투황 최고 계급 정도였지만, 메두사의 표정은 전에 없이 어두워져 있었다.
“빌어먹을… 서북지역 최강자들을 모조리 데려왔군.”
동해가 굳은 얼굴로 세 노인을 바라보며 중얼대자, 가철 역시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서 메두사 여왕을 도와야 하는 거 아닌가?”
“일단 지켜봅시다. 만일 다 같이 나선다면 저쪽 세 세력에서도 손 놓고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더 큰 전투가 발발하고, 시간을 벌기는커녕 더 힘들어질 겁니다.”
가철의 곁에 있던 이정이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다가 메두사 여왕이 당하면 정말로 모든 게 끝장일세.”
그러자 이정의 곁에 있던 동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떨궜다. 이정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메두사 여왕은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전력이었기 때문이다.
“휴. 지금으로서는 메두사 여왕이 저들을 막을 수 있길 바라는 게 전부입니다.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동해의 말에 이정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를 들은 동해와 가철은 초조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며 다시 한 번 메두사를 바라봤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하아… 이준 연맹주가 있었더라면 메두사 여왕과 함께 어떻게든 이 난국을 돌파해줄 수 있었을 텐데…”
옆에 있던 해길이 조용히 한숨을 내뱉으며 말하자, 이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하. 메두사 여왕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가한제국의 강자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금안종의 종주 낙안성이 날개를 펄럭이며 짐짓 예의 바른 말투로 입을 열었다.
“흥, 주제 파악은 되는 모양이군.”
메두사 여왕이 콧방귀를 끼며 자신을 비웃자, 낙안성은 피식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상대가 뭐라고 말을 하든, 그는 절대로 메두사와 일 대 일로 붙을 마음이 없어보였다.
곧이어 금색 불꽃이 낙안성의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며 금색의 괴상한 장검 하나가 솟아났다. 장검 위에는 뾰족한 가시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종주, 괜히 메두사 여왕을 도발하지 마시오. 정말로 죽기 살기로 달려들면 우리도 무사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 때, 낙안성의 곁에 있던 곰 문양을 새긴 모란종 장로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지요.”
낙안성의 신호가 떨어지자, 세 명의 장로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진형을 갖추었고, 이내 청색, 붉은색, 파란색의 염력이 세 사람의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솟구치는 염력은 밖으로 퍼지지 않고 대형 안으로 모여들어 서로 뒤엉키며 하나가 되어갔고, 이내 세 사람의 정신과 염력이 마치 한사람의 것처럼 완벽하게 융화되기 시작했다.
세 염력이 하나로 뭉치자, 세 노인의 망토에 새겨진 짐승 문양에서 흉흉한 붉은 에너지가 폭발하며 그들의 몸을 감쌌다.
“하하. 모란종의 「야수의 진」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영광이군요.”
옆에서 발산되는 세 노인의 강력한 기운을 느낀 낙안성은 탐욕스러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하하, 금안종의 무투기나 비술에 비하자면 보잘 것 없는 잔재주이지요.”
비술을 사용하자 세 장로의 모습은 짐승과 인간이 뒤섞인 반인 반수의 형상으로 변했으며, 목소리 역시 맹수의 울음소리처럼 섬뜩하기 짝이 없게 변화해 있었다.
메두사는 그들을 지켜보며 빠르게 정신을 집중해 재빠르게 자신의 무지개색 염력을 뿜어냈다.
눈앞에서 칠색의 염력이 폭발하자, 낙안성은 곧바로 모란종의 세 장로에게 눈짓을 했고, 네 명의 강자는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메두사 여왕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