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362화 (362/818)

제362화. 월녀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불의 연맹과 메두사 여왕이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아니면……”

말끝을 흐리는 비호를 보며 이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차분한 태도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시죠. 불의 연맹은 쉽게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연맹주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비호를 비롯해 자리에 있던 투사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불의 연맹은 연맹주도 없이 1년을 버텨내지 않았던가! 운산을 쓰러뜨린 연맹주가 합류한다면, 불의 연맹이 세 세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네, 어서 가한제국을 구해주십시오. 현재 동쪽의 검은 산이 위급하다고 들었습니다.”

이준은 비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날개를 펼쳤다.

“감사합니다. 지금 당장 전장으로 가야겠습니다.”

* * *

청산마을을 떠난 이준은 곧장 보람과 함께 비호가 말한 검은 산의 요새 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투황 계급에 들어선 이준의 속도는 이전보다 더욱 빨라져 그가 날아가고 있는 것을 멀리서 보자면 유성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검은 산으로 향하는 내내 그의 표정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세 제국이 연합해 가한제국을 침공하다니, 상상만으로도 오싹한 일 이었다. 메두사가 아니었다면 가한제국은 구름제국에 의해 진작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독종이라……”

이준의 뒤를 따라가는 보람 역시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이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전력으로 비행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널따란 평원지대가 나타났다.

평원지대가 보인다는 건 검은 산 요새와 가까워졌음을 의미했다. 이준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더욱 세차게 날개를 움직였다.

* * *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전속력으로 검은 산을 향해 날아가던 그 때, 무언가를 느낀 이준이 갑자기 허공에서 멈춰섰다.

“왜 그래?”

“저쪽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져. 셋이야. 앞 쪽에 있는 사람들은 도망가고 있고, 뒤쪽 사람들이 쫓아가는 것 같아. 추격당하고 있나봐. 추격당하는 쪽은 뱀 인간 인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이준은 빠르게 들판의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 * *

“저 망할 자식들. 내 상처만 회복되면 너희들의 뼈와 살을 분리해서 우리 아기들에게 먹여주마.”

월녀는 폭발적인 속도로 바닥을 내달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저놈들이 감히 우리 성을……”

월녀는 현재 영암성의 수호자로, 7성 투왕 강자였다. 그녀는 휘하의 병력들을 이끌고 제법 오랫동안 도시를 지켜내는데 성공했지만, 삼대 세력에서 갑작스레 투왕 계급의 강자 셋을 투입하면서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월녀는 세 투왕 중 한 명에게 부상을 입혔지만, 본인도 8성 투왕 강자에 의해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가 시간을 벌어준 덕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사히 도시를 떠날 수 있었고, 이에 분노한 투왕 강자들이 그녀의 숨통을 끊기 위해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월녀를 쫓는 두 명의 투왕은 금빛 날개를 펄럭이며 점점 더 빠르게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이에 월녀 역시 사력을 다해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부상이 심한 탓에 점점 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오, 왜? 힘이 다 빠졌어?”

마침내 월녀가 힘을 잃고 자리에 주저앉자, 뒤를 쫓던 두 사람이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곧이어 그의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금빛 염력을 내뿜었다. 사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 섬광은 빠르게 한 곳으로 모여 커다란 금색 기러기로 변화했고, 곧바로 월녀를 향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눈부신 금빛 염력이 점점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번개 소리와 함께 검은 색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어 금빛 기러기를 산산조각 냈다.

예상하던 통증이 찾아오지 않자 당황한 월녀는 천천히 눈을 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확인하려 했다.

“괜찮아요?”

그녀의 앞에는 낯익은 청년 하나가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가한제국 사람인가?”

뱀 인간족의 여인이 검은 망토를 입은 청년을 위 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월녀가 경계하는 모습을 보며 이준은 안심하라는 듯 또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걱정 마세요. 가한제국 사람이니까요.”

상대가 아군임을 확인한 월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릿한 느낌이 들며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때, 상대가 은은한 향을 내는 둥근 연금비약 한 알을 건네며 말했다.

“독약은 아니니까 한 번 먹어봐요.”

조금 망설이다 약을 건네받은 월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손톱만한 연금비약을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연금비약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약 기운이 사지로 뻗어나가며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맙군. 보다시피 나는 뱀 인간족이다. 월녀라고 부르면 돼.”

예전에 자기를 끌고 가 노예로 삼겠다고 했던 포악한 여인의 온화한 태도에 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뱀 인간들과 가한제국 사람이 동맹을 맺다니,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조심해. 저 둘은 모두 투왕이니까.”

월녀는 연금비약의 도움으로 기력을 조금 회복한 듯 꼬리를 움직여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젊은 친구. 실력이 제법인 것 같은데 아까운 목숨 버리지 말고 가던 길 가시게.”

이준은 이미 투황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앞에 서 있는 두 투왕은 그의 실력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상대가 자신들보다 강한 것은 확실해 보이니,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조용히 눈치를 살폈다.

이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월녀 앞으로 다가가 말없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행동으로 자신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이런…젊은 친구가 너무 잔정이 많군.”

중년의 사내는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은 뒤 곧바로 동료에게 눈짓을 보냈고, 사내의 동료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찬란한 금빛 염력이 폭발하며 두 사람 주위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내가 한 사람을 붙잡아 놓을 테니 너는 나머지 한 놈을 때려 눕혀. 최대한 빨리.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시간을 조금 끄는 게 다니까.”

두 사람의 실력을 알고 있는 월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눈 앞의 사내가 자신보다 강한 것은 확실해 보였지만, 낙안제국의 두 강자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에 이준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 상태로 어떻게 싸우려고. 쉬고 있어, 저 놈들은 내가 처리할게.”

혼자서 두 명을 맡겠다는 말에 월녀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센 척하지 않는 게 좋을 걸. 두 놈 다 만만치 않다고.”

“네 놈이 센 척을 하든 말든 죽는 건 매한가지일 거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차갑게 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움켜쥐자, 특이한 모양의 무기 하나가 그의 손에 나타났다.

무기는 금색 고리처럼 생겼으며, 주위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했다. 가시에 보랏빛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독이 묻어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조심해. 저건 금안종놈들이 사용하는 특별한 무기야. 독성이 강한데다가 놈들의 무투기와 결합되면 그 위력이 더욱 강해져.”

두 사람에 손에 들린 무기를 보자마자 월녀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갔다.

월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은 빠르게 흩어져 한 사람은 이준을 향해, 또 한 사람은 월녀를 향해 돌진했다.

“불의 고리!”

그러나 상대가 월녀에게 닿기도 전에 가벼운 뇌성과 함께 이준의 몸이 월녀의 앞에 나타났고, 눈 깜짝할 새에 청록색의 불꽃이 원형으로 퍼져나가며 두 사람을 후려쳤다.

쾅!

불의 고리가 폭발하자, 앞으로 돌진하던 두 사람의 몸이 단숨에 뒤로 날아가며 입에서 피를 뿜었다.

“투황 강자였어?”

“가한제국에 이렇게 어린 투황강자가 있다는 말을 왜 못 들었지?”

놀란 것은 두 사람 뿐만이 아니었다. 월녀 역시 눈앞의 인간이 가진 무시무시한 실력에 화들짝 놀라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슉! 슉!

상대가 투황 강자임을 알아차린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향을 틀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실력으로는 눈 앞의 상대를 당해낼 수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도망가게 둬선 안돼!”

두 사람이 도망가는 것을 발견한 월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월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준은 이미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저렇게 빠를 수가……”

월녀는 또 한 번 멍하니 넋을 놓았다. 가한제국에서 이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메두사 여왕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곧이어 두 개의 금빛 물체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바닥에 처박혔다. 둘 모두 숨통이 끊어진 상태였다.

“열심히도 도망가는군.”

이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체를 발로 툭툭 차대며 중얼거리자, 월녀는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너…정체가 뭐야?”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이준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기억 안 나세요? 몇 년 전에 호수에서 목욕하시는 모습을 봤다가 죽을 뻔 했었는데……”

월녀의 얼이 빠진 모습을 보고 이준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기억이 나셨나요?”

뱀 여인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 소년과 눈앞의 청년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 꼬맹이는 고작 무투사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5~6년 만에 투황이 되어 나타난단 말인가.

“걱정 마세요. 저는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은 아니예요. 예전 일은 벌써 다 잊었어요. 뭔가 오해가 있지만,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봤다고 생각하셨으니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하고요.”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그녀는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준? 이준이라고 했지? 네가 불의 연맹주인가?”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월녀는 또 다시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 너였구나……. 몇 년 사이에 그 무투사 꼬마가 가한제국에서 가장 가한 세력의 주인이 될 줄이야.”

“주인까지는 아니고요. 말 그대로 연맹이니까요. 음… 서로 잘 살아보자. 상부상조. 뭐 그런 겁니다.”

이준의 겸손한 말에도 불구하고 월녀의 입가에서는 쓴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말이 좋아 상부상조지, 그런 세력들을 한 곳에 모아두려면 압도적인 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대체 몇 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무투사가 투황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연맹주 치고는 너무 책임감이 없군. 불의 연맹이 이렇게 큰 사건에 휘말릴 동안 코빼기도 안 비추다니. 우리 여왕 폐하가 아니었다면 불의 연맹과 가한제국은 모두 끝장이 나고 말았을 거다.”

월녀의 지적에 이준은 민망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동안 수련 한다고 갇혀 지내느라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진 지도 몰랐어요.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연맹주 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려고요. 상황이 어떤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좋지 않아. 며칠 전에 여왕폐하께서 독종의 종주와 겨루시면서 양측 모두 부상을 입었어. 하지만 놈은 휴식을 취하고 있고, 여왕 폐하는 계속해서 격전을 벌이시고 있지. 부상을 입은 채 말이야. 여왕 폐하가 아니면 금안종과 모란종을 막을 사람이 없으니까. 한심한 인간 놈들!”

비호를 통해 들은 것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에 이준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