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0화. 투황, 이준
불꽃으로 이루어진 길은 도저히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준은 영혼 에너지를 내보내 앞으로 돌진했다.
작은 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길었지만 영혼 에너지는 빛의 속도로 빠르게 날아갔고, 십 분 후에는 그 길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곳에는 작은 불꽃 구멍이 있었다.
이준의 영혼이 불꽃 구멍에 들어가자 하얀 불꽃이 사라지며 주위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어두운 공간은 마치 궁전 같았지만, 섬뜩할 정도로 넓어 그 끝이 어디인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궁전의 한 가운데에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으며, 청록색 불빛 덩어리가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덩어리는 바로…인간의 영혼이었다.
“설마 이곳이 영혼의 궁전…?”
이준이 넋을 놓고 중얼거리자, 그의 목소리가 곳곳에 메아리치며 공간이 깨진 거울처럼 갈라지더니 모든 환영이 깨어졌고, 그의 정신은 곧바로 산골짜기 안에 위치한 동굴로 돌아갔다.
산골짜기에서 눈을 감고 있던 이준의 이마에는 차가운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스승님이 남긴 영혼의 표식을 통해 본 것은 틀림없이 ‘영혼의 궁전’이었다.
적막한 동굴 안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이준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벽에 기댄 채 깊은 사념에 빠져 있었다.
아까 전에 보았던 거대한 궁전은 틀림없이 영혼의 궁전이었다. 아마도 약로가 남긴 영혼의 표식과 약로의 영혼이 연결되며 그곳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공간이 쪼개질 때 잠깐 나타났던 무시무시한 영혼은 아마도 혼전의 수호자인 듯 했다. 그가 혼전의 주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점 이었다.
“그 괴물 같던 도영호가 우습게 느껴질 정도의 강자라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아까 보았던 초록색의 영혼체 중에 스승의 영혼이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스승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준은 주먹을 꽉 쥐며 다짐하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약로의 영혼은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이면 충분했다.
“부서져라!”
생각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손을 휘둘러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돌더미를 치워냈다.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가자, 일 년 만에 맞는 햇빛이 그의 눈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이준은 눈을 감은 채 입구 앞에 서서 오랜만에 맞는 따뜻한 햇살을 만끽했다.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보랏빛 물체가 여전히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직 진화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채린은 어디 갔지?”
미소를 머금은 채 주위를 둘러보던 이준은 무언가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곳에서도 메두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 그의 시야에 작은 두루마리 하나가 들어왔다. 이준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옮겨 두루마리를 펼친 뒤 빠르게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타르 사막의 뱀 인간들에게 뭔가 일이 생겼군. 일이 끝나면 돌아온다고 했는데… 대체 무슨 일인거지?”
순간 이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메두사의 실력으로도 빨리 해결되지 않는 일인 것으로 보아, 보통 일이 아닌 듯 했다.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두루마리를 저장 반지 안에 넣은 뒤 다시 보람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내가 잠깐 지키고 있지 뭐. 어차피 두고 가도 마음이 안 놓일 거고…….”
* * *
아직 진화중인 보람을 두고 혼자 떠날 수 없었던 준은 산골짜기에 남아 다시 수련에 매진했다. 투황이 되면서 폭증한 염력을 길들이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으니, 보람의 진화를 기다리며 염력을 가다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또 다시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꿈쩍 하지조차 않았던 빛 덩어리가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 덩어리의 표면에서 번쩍이던 빛은 더욱 짙은 보라색을 내뿜었고, 그 사이로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보람의 진화도 머지않은 듯했다.
* * *
산골짜기의 허공에서는 검은 망토를 두른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이며 염력을 짜내고 있었다. 손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잔영이 남을 정도였다. 곧이어 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이마에서 가느다란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바다의 힘!”
이준이 힘차게 고함을 내지르는 순간, 그의 손 위로 에너지가 모여 들며 한 층의 초록색 장막을 형성했다. 기이한 초록색 장막은 빠르게 이준의 손을 감쌌고, 이내 녹색 섬광을 쏘아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초록빛은 수정처럼 찬란했고, 그 안에는 거대한 에너지가 넘실대고 있었다. 빛이 닿는 곳마다 공간이 왜곡되며 아지랑이가 일어났다.
초록색 수정 같은 빛이 메두사가 펼쳐놓은 염력가 충돌하자, 천지를 울릴 정도의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광풍이 몰아쳤다.
이준은 결계 가운데에 생겨난 커다란 구멍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의 힘은 제왕의 권 중 두 번째 무투기로, 그 위력은 산의 힘보다도 훨씬 더 대단했다.
지난 보름간 이준은 이 무투기를 수련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밖에 성공하지 못 했었다. 게다가 그 한 번마저도 완벽하지 않았다. 완벽히 익힌다면 어느 정도 위력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제대로 연습해야겠어. 투종 강자를 만났을 때는 반드시 이 무투기가 필요할 테니까.”
고개를 들어 하늘색을 확인한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산골짜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막 산골짜기 아래로 내려가려던 찰나, 아래쪽에서 돌연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산골짜기 중앙부의 보라색 빛 덩어리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진화에 성공한 건가?”
빛은 점점 더 강해졌고 마침내 쩍 소리를 내며 불빛 덩어리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틈이 벌어지자, 그 안에서 찬란한 보랏빛이 터져 나왔다. 외부 공간과 단절되어 있어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온 산의 마수들을 불러 모으고 말았을 것이다.
보라색의 불빛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갈라지며 빛을 내뿜었고, 보라색의 빛기둥이 메두사의 결계에 부딪히자 사방으로 파문이 일었다.
보라색의 빛은 그렇게 한참을 더 사방으로 뻗어나가다가 서서히 옅어졌고, 불빛 기둥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 안에서 기다란 보라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보람이라고?”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갑자기 보람의 몸에서 초록색 섬광이 뿜어져 나와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녹색 빛에 둘러싸인 보람은 다시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결국 예의 그 어린 아이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런 개 같은…!”
자신의 몸이 다시 콩알만한 꼬맹이로 돌아가자, 환희에 차있던 보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돌처럼 굳어버렸고, 그녀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이 어때서. 얼마나 귀여운데.”
“네가 뭘 알아! 얼마나 고생해서 진화했는데…이런게 어디 있어! 처음부터 커지지나 말던가! 왜! 왜 다시 꼬맹이냐고!”
이준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보람은 더욱 길길이 날뛰며 발을 동동 굴러댔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화를 가라앉힐 수 없다고 판단한 이준은 곧바로 화제를 돌려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뭐 어쨌든…승급도 성공했는데 이제 가자. 여기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청 긴 시간이었을 거야.”
“채린 언니는 먼저 간 거야?”
이에 보람은 산골짜기를 훑어보더니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비죽였다.
“응. 뱀 인간들에게 무슨 큰 일이 생겼나 봐. 편지만 남겨놓고 돌아오질 않고 있어. 타르 사막으로 가보자. 우리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보람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체 없이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오르던 보람은 허공에 펼쳐진 결계를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이거 공간 봉쇄술이지? 투종은 돼야 만들 수 있는 거라던데, 채린 언니가 해놓고 간 거야?”
“응. 급하게 가야 하는데 우리가 승급하는 데에 방해 받을까봐 결계를 쳐놓은 것 같아.”
말을 마친 이준은 메두사가 펼쳐 놓은 결계를 향해 미친 듯이 염력을 쏟아 부었지만, 지금 그의 힘으로도 메두사의 염력으로 이루어진 장벽을 깨기에는 무리였다.
“무식하게 힘만 쓸 줄 알아가지고……”
이를 지켜보던 보람은 혀를 차며 위로 날아올라 일그러진 공간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보랏빛이 터져 나오더니 물고기처럼 유유히 결계를 통과했다.
보람이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던 바였지만, 투종 강자가 펼친 공간 봉쇄의 영향까지 무시해버리자, 제 아무리 준이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준이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보람이 다시 일그러진 공간 안으로 들어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내가 데리고 나가줄게.”
이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산골짜기에는 희귀한 약재가 많았으니, 공간을 계속 봉쇄해 놓고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곧이어 보람의 보랏빛 에너지가 이준을 감싸자, 그 역시 메두사의 결계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 * *
끝없이 펼쳐진 숲 위로 세찬 바람이 불어오자, 나뭇잎 소리가 시끄럽게 일어나며 적막한 산에 생기를 더했다.
“겨우 빠져 나왔네.”
이준은 발아래 펼쳐진 숲을 바라보며 상쾌한 바람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동굴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머무른 탓인지, 풀냄새가 가득한 바람이 너무도 반가웠다.
그의 곁에 있던 보람은 주변에 마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채린과 함께 마수 군단에게서 도망치던 그 때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는 듯 했다.
“이제 가자.”
이준은 방향을 확인한 뒤 곧바로 등 뒤의 불꽃 날개를 펄럭이며 산 밖으로 날아갔고, 보람 역시 천천히 이준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움직이는 곳마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녹색의 파도가 일어났다. 그 때, 이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멈춰 섰고, 덕분에 보람의 작은 몸이 이준의 등에 꽝 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뭐 하는 거야?”
보람이 이마를 문지르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투덜댔다.
“너무 조용한 것 같은데……”
이준의 말 대로였다. 온 숲에 마수가 퍼져있는 천둥산에서 마수의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다니, 분명히 무언가 이상했다. 이준의 말에 보람 역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아 주위를 탐색했다.
“응. 주변에서 마수의 기운이 안 느껴져. 게다가 이상한 냄새도 나고……”
이어지는 보람의 말에 덩달아 냄새를 맡아보던 이준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숨 쉬지 마. 공기 속에 독이 섞여 있어. 아주 연하긴 하지만……”
순간 이준의 마음속에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가자. 일단 청산마을에 가보자고. 우선 사람이 있는 곳에 가야 뭐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독은 그 사람이 퍼뜨린 거 아니야?”
보람이 말하는 ‘그 사람’은 바로 아라였다. 하지만 이준의 생각은 달랐다.
“아닐 거야. 그렇게 강한 독은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독을 흩뿌린 거지?”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날개를 펄럭이며 청산 마을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