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9화. 환영
준은 산굴의 입구를 막자마자 동굴 벽에 월광석 몇 개를 붙여 놓았다. 덕분에 햇볕이 들지 않는 동굴 깊숙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불빛이 은은하게 동굴 안을 밝히고 있었다.
이준은 푸른 돌 위에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반듯한 돌 위에 얹어 놓은 엉덩이를 타고 흐르는 냉기 덕에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푸른 돌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천계의 탑에서 사라진 연화대가 생각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위에서 수련을 하게 되면 에너지 흡수 속도가 높아졌을 뿐 아니라, 에너지를 정련하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제는 연화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준은 쓴 웃음을 한 번 짓고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수련상태에 들어서자 정맥 속에서 홍수처럼 파도치는 염력이 선명하게 눈을 가득 채웠다. 그 동안 수많은 연금비약을 흡수하고, 천지의 불꽃을 흡수하며 단련된 자신의 혈관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온 몸이 폭발하고 말았을 것이 분명했다.
영혼 에너지의 도움을 받아 뒤죽박죽이었던 염력이 빠르게 혈관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누군가가 자신의 영혼을 찌르는 듯 찌릿찌릿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준이 그 이상한 감각에 집중하고 있을 때, 동굴 안에서는 천지의 에너지가 미친 듯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윽고 공중에서 소용돌이가 형성되어 이준의 머리에 맞닿았고, 번개처럼 그의 몸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방대한 에너지가 주입되기 시작하자, 이준의 눈썹이 꿈틀댔다. 동굴 안에 차있던 에너지의 농도는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시작단계에서부터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이준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다시금 정신을 집중해 청록색 불꽃을 틔워냈다. 불꽃은 이준의 몸을 포근히 감싸 안은 채 뜨거운 온도를 방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형의 화염으로 변화했다.
구름불꽃이 이준의 몸을 감싸자, 폭발적으로 요동치던 에너지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고, 불꽃을 거쳐 정련된 에너지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니 몸에 주는 부담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투왕의 벽을 넘어 투황 계급으로 올라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계급이 오를 때마다 보람이 그렇듯, 방대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 에너지는 결코 하루아침에 흡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단언할 수 없었다.
이준이 동굴 안에 틀어 박힌 지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지만, 산골짜기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거대한 반딧불이 마냥 빛을 방출하는 보람도 별다른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고, 한 달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빛을 발할 뿐이었다.
메두사는 큰 돌 위에 걸터앉아 턱을 괸 채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보람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돌 더미가 쌓여 있는 동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준이 들어가고 3일 정도는 그의 기운이 언뜻언뜻 느껴졌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그 기운마저도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은 메두사의 실력으로도 이준의 생사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성가신 놈 같으니…”
메두사는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뒤 눈을 감고 수련 상태에 돌입했다.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한 달 내내 이곳에만 붙어있었으니, 온 몸에서 곰팡이가 피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 * *
그로부터 다시 두 달 뒤. 동굴 쪽에서 미약한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 녀석……”
얼마 지나지 않아 산골짜기에 가득한 농밀한 에너지가 일제히 산 동굴 쪽으로 모여 들더니, 동굴 위로 거대한 에너지 소용돌이가 형성됐다.
“승급하는데 저렇게나 방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단 말이야?”
메두사는 경악에 찬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그녀 역시 투왕에서 투황까지 진화하는 것을 겪어보았지만, 지금 이준이 승급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투황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치고는 그 양이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물론, 메두사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처럼 천지의 에너지를 미친 듯이 끌어올 수 없었다. 흡수할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준에게는 「불개」가 있었기 때문에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정련할 수 있었고, 세 개의 천지의 불꽃이 그의 신체를 보호해주니 다른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에너지가 주입 되어도 그것을 모두 흡수할 수 있었다.
팔뚝만한 에너지라 해도 세 개의 불꽃을 지나 이준의 몸 속으로 들어가면 겨우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로 줄어들었고, 거기에 불개를 통해 또 한 번의 정련을 거치면 그 크기가 더욱 작아졌다. 덕분에 이준은 다른 사람이라면 목숨을 잃을 정도의 에너지를 흡수하고도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똑같은 투황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순도 높은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실력이 확연히 달라졌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도 쉬웠으니, 투황이 된 이준의 실력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중급 투종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일 것임이 분명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주변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며 점점 더 단단하게 응집하는 모습에 메두사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천둥산의 강한 마수들은 예민한 에너지 감지 능력을 갖고 있었으니, 강한 파동이 일어날수록 그들이 몰려올 가능성도 더욱 커지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때, 보람의 보랏빛이 주변의 강력한 천지 에너지 파동 영향을 받은 듯 강렬한 빛을 폭발적으로 발산해냈고, 갑자기 산골짜기 안의 에너지 중 일부가 방향을 바꿔 보람에게로 달려들었다.
“난리도 아니군.”
메두사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뱉은 뒤 빠르게 산골짜기 위로 몸을 날렸다.
메두사의 손이 춤추듯 잔상을 남기며 움직이자, 산골짜기 위의 공간이 뒤틀리며 동굴 위에 형성된 에너지 소용돌이가 일그러진 공간에 가려졌다.
“공간 봉쇄!”
메두사의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순간, 기이한 파동이 온 산골짜기 위를 뒤덮었다. 일을 마무리한 메두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산골짜기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산골짜기 아래로 내려가 고개를 들자, 공중에서 다채로운 색깔의 거대한 에너지 소용돌이가 계속해서 응집되는 것이 보였다. 메두사의 이마에는 어느새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그녀의 실력으로도 산골짜기의 공간을 완전히 봉쇄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간을 봉쇄하지 않았더라면 곧 온갖 마수들이 몰려왔을 테고, 그 편이 더 골치가 아플 것이 분명했다.
‘한 시도 마음 놓을 날이 없군…’
일을 마친 메두사는 다시 천천히 눈을 감고 수련 상태에 돌입했다.
* * *
그렇게 이준이 동굴에 들어 간지도 어느새 3개월이 지났다. 산골짜기의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메두사는 여전히 지루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시간이 흘러 이준이 동굴에 틀어박힌 지 4개월째 되는 날, 수련에 몰두하던 메두사가 돌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매끈한 이마에는 일곱 빛깔의 비늘이 나타나 있었다. 이마의 비늘을 매만지던 메두사의 호흡이 빠르게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 비늘은 영혼의 제단에 보관되어 있는 영혼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뱀 인간족의 장로들이 영혼을 태워 그녀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장치였다.
메두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뒤 어쩔 줄 몰라 하며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서성였다. 결국 그녀는 반짝이는 빛 덩어리와 산 동굴을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전력으로 산골짜기 상공에 펼쳐진 결계를 강화했다.
산골짜기를 가득 뒤덮은 일곱 빛깔의 에너지가 더욱 단단하고 농밀해지자, 그녀는 이마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뱀 비늘을 만지작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메두사가 떠나자, 산골짜기는 완전한 정적 속에 잠기고, 밝은 빛을 번쩍이는 보랏빛 덩어리만이 남게 되었다. 마치 모든 걸 다 보고 있었다는 듯.
메두사가 남긴 에너지는 산골짜기를 외부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격리 시켰고, 여러 마수들이 산골짜기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메두사의 공간 봉쇄와 불빛 덩어리에서 방출 되는 위압감 때문에 감히 산골짜기 안으로 발을 들이지는 못 했다.
깊은 산골에 자리한 사람 한 명과 마수 한 마리는 시간이 흘러가며 점점 더 강한 기운을 뿜어댔다. 산골짜기의 잡초들마저 짙은 에너지에 감염된 듯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는 빛 덩어리를 그물처럼 뒤덮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동굴과 빛 덩어리를 모두 감싸 안았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메두사가 떠난 지도 어느덧 반년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준과 보람이 승급을 위해 산골짜기에 머무른 지도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갔지만 산골짜기는 여전히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반년이 지났지만 메두사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산골짜기의 잡초는 더욱 무성하게 자랐고, 온 산골짜기를 다 뒤덮을 정도로 만연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던 골짜기에 이상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공중에서 선회하던 거대한 에너지 소용돌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에너지가 폭풍우마냥 바닥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에너지는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줄기는 동굴 안으로 다른 한 줄기는 빛 덩어리 안으로 흡수 되고 있었다.
곧이어 골짜기 안에 공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잡초들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메마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공중에 있던 에너지 소용돌이가 사라지자, 산골짜기 안에서 격렬히 요동치던 에너지 파동이 점차 정상적인 흐름을 되찾았다.
보라색 빛 덩어리는 방대한 에너지를 흡수한 뒤 더 짙은 색깔을 띠었고, 표면에 특이한 문양 하나가 떠올랐다. 문양에서는 반짝거리는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후로는 또 다시 지루한 정적이 계속됐고, 아무런 변화 없이 또 보름이 흘러갔다.
* * *
보람에게 작은 변화가 일어난지 정확히 이십 일이 지나던 날, 갑자기 동굴안에서 강력한 기운이 터져 나오며 이준이 앉아 있던 곳을 기점으로 동굴벽과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콰직!
이준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던 푸른 돌은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위에 앉아있던 자가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돌이 깨졌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망토를 입은 소년은 여전히 아무 움직임 없이 공중에 뜬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게…투황이 된 느낌인가?”
이준은 양 팔을 천천히 뻗어 자신의 온 몸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염력을 느껴보았다. 신체 중앙에 있던 영혼 에너지가 폭발적인 속도로 몸 곳곳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곧이어 거대한 영혼 에너지가 신속하게 산 동굴 밖으로 빠져나가 온 산을 뒤덮었다. 준은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보랏빛 덩어리에서 강한 생명력이 용솟음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 에너지가 닿는 모든 곳이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민감한 마수들은 이준의 영혼 에너지를 감지하고는 커다란 포효소리를 내고 있었다.
폭발적인 에너지는 그렇게 수천 미터가 넘는 곳까지 뻗어나갔다.
잠시 후, 이준의 정신이 돌아오며 거대한 영혼 에너지가 거짓말처럼 그의 몸 안으로 회수되었다.
영혼 에너지를 모두 거두어들인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긴 숨을 내뱉었다. 손을 들어 올려 이마의 하얀 불꽃 문양을 문지르자,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떨림이 발생했다.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해 영혼 에너지를 끌어낸 준은 그것을 곧바로 이마의 문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영혼 에너지가 불꽃 문양으로 들어가자마자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이준의 눈앞이 깜깜해지며, 눈앞에 하얀 불꽃으로 이루어진 작은 길이 만들어졌다. 작은 길의 양 옆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