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 허신
“당장 그 발을 치우지 않으면 네 놈의 머리통을 짓이겨주지.”
무덤덤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 모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이에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허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다니. 아주 건방진 놈이군.”
한편 검은 형상을 발견한 카은의 눈빛은 순식간에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는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부상이 너무 심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광장에 있던 흑표 용병단의 투사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준을 응시했다. 그들 역시 지난 번에 도움을 준 소년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그때 그 이준이란 사람이냐?”
“네!”
중년의 사내가 라엘을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런데 너무 어린 거 아니니?”
하지만 중년은 이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갓 스물이나 넘었을까 싶은 청년이 허씨 가문의 가주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긴 한데 엄청나게 강해요.”
라엘의 답변에 사내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눈 앞의 청년이 정말로 허씨 가문의 가주를 꺾을 정도의 강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도 같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허씨 가문의 가주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실력으로는 이준이 어느 정도의 강자인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으로 미루어보아, 자신보다 위인 것은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인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이준의 몸이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카은 앞에 나타났다.
이준이 창백하게 질린 카은의 입에 연금비약을 넣어주자, 백지장 같던 카은의 얼굴에 순식간에 혈색이 돌아왔다.
“카은 아저씨 너무 걱정 마세요. 흑표 용병단 사람들은 전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거예요.”
“넌 누구냐! 왜 끼어드는 거지?”
이 광경을 바라보던 노인은 곧바로 손을 들어 호위병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곧바로 날카로운 무기들이 이준을 향했다.
“내가 만든 물건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네 녀석이 만든 거라고?”
이준의 답변을 듣자마자 노인의 눈이 탐욕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저들을 구하고 싶은가?”
노인의 질문에 이준은 씩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대신 그 옥병을 가져와. 옥병 하나당 한명씩을 살려주지.”
훈련장을 쓱 훑어보니 흑표용병단원들과 그들 식솔까지 다해 못해도 5백 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
“어때?”
허씨 가주는 이준의 반응을 살피며 즐겁다는 듯 연신 미소를 지어댔다.
“내키지 않는군.”
하지만 이준이 살며시 웃으며 한 마디를 내뱉는 순간, 노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흑표 용병단쪽 사람들의 얼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꺼지거라. 네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만, 감히 허씨 가문에 대적할 생각을 한다면 목숨이 온전치 못할 거다.”
“10분 줄 테니 그쪽이나 청산마을에서 꺼져. 그럼 조금 전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지.”
이어지는 이준의 당돌한 태도에 노인은 코웃음을 쳤고, 곁에 있던 호위병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끌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노인은 분노한 듯 두 눈을 치켜뜨며 싸늘한 눈빛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이에 이준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곧이어 이준이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그의 몸에서 격렬한 기운이 요동치며 해일과도 같은 염력이 뿜어져 나왔다.
훈련장에 있던 허씨 가주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을 벌렸다. 상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한 눈에 보기에도 투왕 강자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의 몸에서 염력이 뿜어져 나오기 무섭게 노인의 몸이 그 기운에 밀려 뒤로 수십 걸음을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얼굴에는 단 한조각의 웃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겨우 스무 살 정도의 청년이 투황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가한제국에 이토록 젊은 투황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카은과 라엘 역시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입만 뻐끔대며 이준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은 몇 년 전 이준이 투사 일 때부터 그를 알고 있었으니, 불과 6년 사이에 그가 투황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없었다.
허씨 가문의 가주는 몸 안에 있는 염력을 미친 듯이 쏟아내며 상대의 힘을 몰아내보려 애썼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상대의 모습에 둘 사이의 격차를 더욱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순간 노인의 동공이 팽창했다. 4성 투왕인 자신을 이렇게 압도할 수 있는 젊은 강자가 나타났다면 가한제국 전체가 뒤집어졌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한, 그런 강자는 단 한명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이 불의 연맹주, 이준이었나?!”
공포에 질린 노인의 한마디에 광장 안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노인의 질문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검은 망토를 걸친 청년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이준은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염력을 방출하며 섬뜩한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준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린 허씨 가주는 동상처럼 굳은 채 말을 잇지 못 했다. 그야말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었다.
노인은 창백하게 질린 채 황급히 모든 호위병들을 멈춰 세우고는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아아,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혹시나 마음이 상하셨다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당장 연맹주님이 명하신대로 흑표 용병단의 단원들을 풀어주고 물러나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오만하기 짝이 없던 노인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연신 머리를 조아려댔다. 그는 이준이 운남종을 어떻게 끝장냈는지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그만큼 상대에게 느끼는 공포도 더욱 컸기 때문이다. 이준이 마음만 먹는다면, 허씨 가문은 문자 그대로 씨가 마를 것이 분명했다.
“저 애가 운산을 죽였다는 불의 연맹주 이준이라고?”
한편, 몇 년만에 나타난 이준이 바로 그 불의 연맹의 연맹주라는 것을 알게 된 라엘은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의 이름이 같기는 했지만, 설마 그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가한제국 전체를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 왜 혈혈단신으로 천둥산에 찾아왔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이준은 몸 밖으로 방출해대던 염력을 천천히 거두어들이며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상대의 태도는 얼핏 보기에는 비굴하기 짝이 없었으나, 참으로 현명한 행동이었다. 만일 노인이 체면을 앞세워 자신에게 대적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까지 숙이고 나오는데 자신이 허씨 가문을 멸망시켜버린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불의 연맹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될 것이다. 노인은 체면을 버리고 가문의 생존을 택한 것이다.
“왜지? 내 불꽃이 담긴 약병을 갖고 싶어 하지 않았나?”
이준의 한 마디에 허씨 가주는 식은 땀을 흘리며 재차 고개를 조아렸다.
“아까는 늙은이가 괜한 욕심에 눈이 멀어 실수를 했습니다. 상대가 이씨 가문의 가주인줄 알았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름이 뭐지?”
이준이 살짝 웃음을 지으며 묻자, 노인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허신입니다.”
이에 이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훈련장에 모여 있는 흑표 용병단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흑표 용병단은 예전부터 나와 인연이 있었으니 오늘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오늘 일은 제가 책임지고 수습하겠습니다. 흑표 용병단 분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드리고, 그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도 충분히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더 바라는 것이 있으십니까?”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허신의 태도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얼핏 보면 비굴하고 비겁한 태도였지만, 한 가문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가주로써는 이것이야말로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행동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한 때의 분을 이기지 못해 가문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것에 비하면 그의 태도는 참으로 배울 점이 많았다.
“그리고… 송구한 말씀이오나, 저희도 얼마 전 불의 연맹 가입 요청서를 받았습니다. 그 때는 답을 드리지 못 했지만, 오늘 연맹주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저희 허씨 가문도 미약하나마 힘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이 큰 화를 입을 뻔한 상황에서 목숨을 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되려 불의 연맹에 가입해 이득을 취하려 하다니, 실로 재미있는 사내였다.
“그럼 앞으로 연맹을 위해 힘을 보태주게. 그럼 자네는 물론이고 가문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더욱 실력을 키울 수 있게 나도 최선을 다하지.”
이준의 약속에 허신은 뛸 듯이 기뻐하며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앞으로 연맹을 위해 분골쇄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등을 돌려 안색이 좋지 않은 카은을 바라보며 다시 연금비약 하나를 꺼내들었다.
“아저씨, 이 연금비약은 단시간 안에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이제 허씨 가문도 저희 연맹의 일원이 되었으니, 앞으로 다시는 흑표 용병단을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저기… 그, 이준, 아니, 자네가 불의 연맹을 이끌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 아니, 그 연맹주님…”
예전과 다름없이 공손한 이준의 태도에 카은은 허둥지둥대며 말을 더듬어 댔다. 산 속에서 만난 작은 소년이 갑자기 온 가한제국을 호령하는 존재가 돼서 돌아오니, 눈 앞의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불편해 하지 마세요. 예전의 그 꼬마를 대했던 그대로 대해주시면 됩니다. 우선 오늘 일은 대충 수습이 된 듯 하니, 저는 다시 가보겠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급한 일이 좀 있어서……”
이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싱긋 웃음을 짓고는 곧바로 날아올라 자취를 감췄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끝없이 펼쳐진 숲을 바람처럼 훑고 지나가자, 광풍이 일며 온 숲이 출렁였다.
대략 10여분 정도를 날아가자, 익숙한 골짜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간 이준을 맞이한 것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메두사였다.
“일은 잘 해결했고?”
이준이 간단하게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자, 메두사는 그딴 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거라면 대체 왜 물어봤는지 대답한 사람이 억울해질 정도로 냉담한 반응이었다.
“그보다, 승급이나 준비하지 그래? 이미 몸 밖으로 계속 염력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어.”
이어지는 메두사의 말에 이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염력을 폭발시킨 뒤 체내의 염력이 점점 통제를 잃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승급을 앞두고 천지의 에너지가 제 멋대로 몸속으로 흡수되는 통에 몸 전체의 염력이 미친 망아지마냥 날뛰고 있었다.
“고마워. 승급을 하는 동안은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없으니까, 보람이 좀 부탁할게.”
“그래.”
메두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그 동안 잠시 타르 사막에 좀 다녀오지.”
타르 사막에 가겠다는 말에 이준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되물었다.
“같이 가줄까?”
“아니. 네 녀석이 오면 괜히 분란만 생길 것이다. 우리 뱀 인간들은 인간을 싫어하니까.”
상대의 단호한 답변에 머쓱해진 이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 그럼 난 이제 정말로 동굴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보람이 좀 잘 부탁할게.”
메두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준은 곧바로 날개를 펼쳐 산굴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몸속의 염력이 사방으로 날뛰고 있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기운을 갈무리해야 했다.
곧이어 동굴에서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바위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며 동굴의 입구가 완전히 막히고 말았다. 본격적인 승급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