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7화. 허씨 가문
초록잎이 무성한 산골짜기에는 향긋한 냄새가 풍겼고, 이따금씩 마수들이 돌아다니며 묵직한 울음소리를 내 산골짜기에 생기를 더했다.
산골짜기 깊은 곳은 보랏빛이 짙게 반사 됐다. 그 보랏빛은 거대한 반딧불이 모양이었다. 불 안의 물체는 잘 안 보였지만 엄청난 에너지는 느낄 수 있었다.
불빛은 밝았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에 맞춘 듯 박자감 있게 깜빡였다. 민감한 사람들이라면 불빛이 반짝일 때마다 산골짜기에 미세한 파동이 일어난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불빛이 깜빡일 때마다 상당한 에너지가 불빛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메두사는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가만히 불빛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준이 산굴에 연금비약 만들러 들어 간지도 거의 한 달이 지났다. 그렇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아직 결과가 없는 듯했다. 보람은 3일 전에 불덩이가 된 뒤로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상황을 보아하니 이 또한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한 명은 연금비약 제조, 한 명은 진화 준비. 산골짜기에는 오직 메두사만이 남아 지키고 있었다. 그녀도 무척이나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 두 사람에게 중요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메두사는 내내 산골짜기를 지키고 있었고, 잠깐의 외출 후에도 재빨리 돌아오기 일쑤였다.
이런 메마른 하루 하루가 지나 5일이 되었다. 마침내 산굴에서 인기척이 나기 시작했다.
메두사가 반쯤 수련에 몰두하고 있을 때 산굴에서 큰 폭발음이 울렸다. 메두사는 산굴 속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엉망이 된 사람이 격렬한 기침을 토해내며 나오고 있었다.
산굴을 나오자 쏟아지는 햇빛에 오랫동안 어두운 동굴 안에 있었던 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눈을 감쌌다. 시간이 조금 지나 빛에 적응되고 나서야 눈을 뜨고는 자신의 헤진 옷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황금단의 약 성질이 너무 포악해 연금술 도중에 몇 번씩이나 폭발을 일으켰다. 연금비약이 자폭하며 불길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뒤로 제조에 더 큰 신중을 기한 덕에 이준은 드디어 황금단 세 알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덕분에 이준이 준비한 약재는 거의 남은 게 없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남은 약재를 이용해 본인을 위해서도 황금단 한 알을 제조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지금의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적색 약 솥이 충격을 어느 정도 흡수해서 다행이었지 그마저도 없었으면 강한 폭발의 위력에 이준은 큰 부상을 입었을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이준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준은 밖으로 나와 얼굴에 묻은 잿가루를 털어내고는 주변을 쭉 둘러봤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형상은 단연 발광하는 보랏빛 형체였다. 그는 메두사를 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보람이가 진화하면서 이렇게 된 거야.”
이준은 멈칫하더니 이내 기뻐하며 말했다.
“진화하려 한다고?”
“아마도. 그런데 이 상태로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무런 변화도 없어. 승급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메두사는 끄덕이며 답했다.
이준은 웃으며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수가 승급할 때 본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람은 평범한 마수도 아니었다.
“연금술은 잘 끝난 건가?”
메두사는 이준을 훑어보며 물었다.
“응.”
그는 고개 끄덕이며 쓴웃음 지었다.
“그런데 욕심이 과했어. 욕심만 덜 부렸어도 지금 같은 꼴은 안 됐을 텐데.”
“네 기운도 계속 불안정하게 요동치는군.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면서 몸 밖으로 조금씩 새어 나오는 걸 보면 투왕 넘어설 날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메두사가 문득 놀란 듯 말했다.
“응. 이번에 연금비약 만들면서 더 많이 성장한 것 같아. 열흘 안에 승급하지 않을까 싶어.”
이준도 기쁨에 차 싱긋 웃었다.
“이제는 죽어라 훈련하는 일만 남았겠군.”
“이번에 연금비약 만든다고 한 달 정도 있었으니 큰 형도 내가 말한 곳에 도착했겠지. 일단 연금비약부터 전달해 주고 다시 돌아와서 수련해야지. 이번에는 투황이 되기 전에는 절대 돌아오지 않겠어.”
이준은 다시 한 번 결심을 세웠다.
‘스승님. 기다려주세요. 스승님 제자가 반드시 실력을 길러 스승님과 아버지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그래. 보람이는 걱정 마. 내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이준은 메두사를 향해 손을 모아 인사했다.
“그렇게 해주면 고맙고. 그럼 나는 일단 연금비약 주러 갔다올게. 돌아와서 다시 수련 해야지.”
이준은 말이 끝나자마자 곧 산골짜기 밖으로 날아갔다.
이준이 허공을 가르며 천천히 날아가고 있던 그때 산 아래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는 단숨에 산꼭대기 위로 날아갔다. 아래쪽에서는 여전히 기척이 느껴졌다.
“나와.”
이준이 한 마디 하자 산꼭대기에서 파동이 일어나더니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맨 앞에는 노인이 있었고 그는 이준을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연맹주님을 뵙습니다.”
노인 뒤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 같이 무릎 꿇으며 인사 올렸다.
이준은 그들의 가슴을 확인해보니 청록색 휘장이 달려 있었다. 휘장에는 아름다운 불꽃이 새겨져 있었다.
이준은 천천히 내려가 물었다.
“큰 형이 보낸 사람인가?”
노인은 황급히 앞으로 몸을 숙이며 저장반지 속에서 두루마리 한 개를 꺼내 양손으로 바쳤다.
“연맹주님, 제 이름은 백이성입니다. 불꽃연맹의 집사(执事)지요. 이정 원로님께서 보내서 오게 됐습니다.”
이준은 두루마리 족자를 받아 들어 천천히 펼쳤다. 이윽고 고개 끄덕이며 말했다.
“난 아직 해결할 일이 남아서 제도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나 대신 물건 좀 가지고 돌아가주길 부탁하지. 물건에는 내가 영혼의 표식을 해뒀으니 가는 도중 재수없게 뺏기게 돼도 찾을 수 있을 거야.”
“하하. 맹주님 걱정 마시죠. 가한제국에서 저희 불의 연맹을 건들 사람은 절대 없습니다.“
백이성은 황급히 고개 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러면 빨리 움직여. 돌아가서 큰 형한테 반 년에서 일 년 정도 걸릴 거리고, 그 동안 불의 연맹 쪽 일은 알아서 처리해달라고 전해주고.”
“네!”
백이성은 공손하게 대답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는 몇 미터 날아간 다음 뒤 따라온 사람들에게 손짓했고, 그들과 함께 빠르게 산을 넘어갔다.
“연금비약도 다 만들었으니 이제 갇혀 수행할 일만 남았네……”
이준은 중얼거리며 상공으로 날아올랐고, 막 산골짜기로 돌아가려던 그때 시야에 백 리 밖에 떨어진 장소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영혼의 흔적을 남겨둔 그곳에서 신호가 왔기 때문이었다.
이준은 위치를 확인한 뒤 나지막이 말했다.
“저기는…… 청산마을이군.”
흑표 용병단은 줄곧 청산마을에서 잘나가는 유명한 대규모 용병단으로, 천둥산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음에도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전, 뱀 용병단으로 인해 흑표 용병단의 위상은 크게 꺾이고 말았다.
뱀 용병단 역시 천둥산 주변 세력 중 가장 강한 용병단 중 하나로, 본래 흑표용병단과 막상막하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양측은 서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면서도 감히 먼저 공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뱀 용병단에게 든든한 뒷배가 생기면서 상황이 크게 변화했다.
뱀 용병단의 뒷배란 바로 검은 바위성의 허씨 가문이었다. 허씨 가문은 제국의 3대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4성 투왕을 가진 덕에 제국 전체에서도 제법 명망이 높은 가문이었다.
가한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투왕은 백 명이 채 되지 않았으니, 허씨 가문을 등에 업은 뱀 용병단이 곧바로 기세가 등등해져 흑표 용병단을 공격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흑표 용병단 단장은 7성 투령, 뱀 용병단의 단장은 8성 투령으로, 본래 두 용병단간의 전쟁이 이토록 쉽게 결판이 비슷해 싸움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하지만 일 년 사이에 두 용병단이 여러 차례 싸웠고 매번 뱀 용병단이 상승세를 유지했다. 모두 허씨 가문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에 그쪽에서 많은 강자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뱀 용병단의 단장은 허씨 가문의 사위였고, 허씨 가문의 가주는 그가 가문의 강자를 데려다 사용하는 것에 대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줄 정도로 그를 아꼈다. 덕분에 뱀 용병단이 손쉽게 흑표용병단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흑표용병단은 이준이 준 표식을 깨뜨리며 이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준이 사건을 해결해줄 거라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이대로 몰살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 * *
웃고 떠드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던 흑표 용병단 사유지에는 웃음 소리 대신 정적이 가득 찬지 오래였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몰려 있었고, 공터에는 사람의 머리와 잘린 팔다리, 그리고 시체더미가 나뒹굴었다.
광장 계단 쪽에는 커다란 의자가 놓여져 있었고, 의자 위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옥병이 들려 있었다.
“네 놈들이 이런 걸로 우리 사위를 다치게 하고 허씨 가문의 강자 두 명을 죽였단 말이지?”
옥병을 만지작거리던 노인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에 카은이 입술을 움찔거리다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 옥병을 사용한 것은 나다. 여기 있는 다른 여자들과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몰라. 죽이려면 나만 죽이고 사람들은 놓아줘.”
그의 뒤에는 중년의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중년은 투령 계급의 실력자였지만, 그 정도로는 허씨 가문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상대의 공격에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둘째 삼촌, 괜찮으세요?”
사내의 곁에 있던 라엘이 울먹이며 묻자, 중년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이제 곧 피바다가 펼쳐지겠구나…….”
“아니에요. 그 사람이 오면 괜찮을 거예요.”
“이준? 너희에게 이 옥병을 준 사람말이냐? 하하. 공교롭게도 불의 연맹의 연맹주와 이름이 같구나. 그 사람이 정말 그 이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사내의 표정에 라엘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자 위에 앉아있는 노인은 혼자서도 능히 흑표 용병단을 몰살 시킬 수 있는 수준의 투왕 강자였고, 이준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애송이에 불과했다. 이준이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투왕 강자를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라엘과 사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갑자기 허씨 가문의 가주가 옥병을 멀리 내던졌다. 그러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광장 바닥에 큰 구멍이 생겼다.
작은 옥병에서 이렇게 큰 파괴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한 번에 열댓 개를 함께 던지면 투왕 강자도 순간 위협을 느낄 정도의 위력이었다.
“이 물건은 어디서 난 거지?”
노인이 굳은 표정으로 카은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천둥산에서 사냥하면서 얻었다.”
허씨 가주가 그 옥병을 탐내고 있음을 눈치 챈 카은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댔다. 상대가 이준에게 어떤 피해를 입힐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카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곧바로 손을 휘둘러 염력을 내뿜었다.
“크윽!”
투왕 강자의 염력에 가슴을 얻어 맞은 카은은 피를 토하며 뒤로 십 미터 가량을 미끄러졌고, 이에 허씨 가문의 호위병들이 곧바로 그를 붙잡아 다시 앞쪽으로 끌고 갔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 말해. 그럼 네 녀석을 놓아주지.”
“말했을 텐데. 천둥산에서 얻었다고.”
이어지는 카은의 답변에 노인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가 카은 앞에 멈춰선 뒤 섬뜩한 미소를 띠며 한쪽 발을 들어올렸다. 그가 발에 염력을 실어 그대로 내리 찍게 되면 카은의 머리는 바닥에 떨어진 수박마냥 산산조각 날 것이 분명했다.
그 때, 광장 한구석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 하나가 홀연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