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아라
“아라, 너였어?”
이준이 크게 소리치자 그의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퍼지며 메아리 쳤다. 순간 빠르게 날아가선 검은 형상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준은 잠깐 멈춰선 상대를 보고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이 곳에서 그녀를 만난 셈이었다. 그렇지만 예전과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혹시 몸 속의 독이 완전히 폭발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속에서 여러 생각이 뒤엉키자 이준은 더 이상 고민 않고 곧바로 염력 날개를 펼쳐 검은 형상을 향해 날아갔다.
상대는 이준의 행동을 보자마자 고개 한 번 돌리지도 않고 짙은 회색 안개를 폭발적으로 쏟아내며 순식간에 그 공간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에 이준이 쫓아갔을 때 상대는 이미 모습을 감춘 상황이었다.
메두사는 이준을 바라보며 인상 찌푸린 채 말했다.
“아는 사람이야?”
“내 추측이 맞다면 오래 전 친구이긴 한데……”
이준은 쓴웃음 지었다. 굳이 그녀의 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독술이 아주 뛰어나. 그런데 아까 싸우면서 느낀 건데 정신적 동요가 너무 커. 정신이 깨어났다가 넘어갔다가를 반복하는 것 같아. 널 보지 않으려는 이유일 수도 있고.”
메두사는 굳이 캐묻지 않으며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이준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와 이별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일이 결국 나타난 것 같았다.
“이미 사라진 것 같은데. 일단 돌아가자. 보람이가 아직 산골짜기에 남아 있어,”
메두사의 말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몸을 돌려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득히 펼쳐진 수풀 쪽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아라야! 그 동안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약속한 것처럼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여전히 내 친구야. 이 약속은 지금도 절대 변함 없고!”
그의 목소리는 염력을 싣고 널리 퍼져 나갔다.
이어 이준은 빠르게 메두사를 따라 산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
괴석이 서 있는 산봉우리에 검은 형상은 멀찍이서 돌아서는 이준을 바라봤다. 창백한 손은 한 켠의 돌멩이를 꽉 움켜 쥐었고 돌은 순식간에 연기를 뿜어내며 치익 소리를 냈다.
이준이 산골짜기로 돌아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검은 형상은 비로소 움켜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돌 위에는 검은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있었다.
“준아……!”
망토 안에서 맑은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아까 전의 거친 목소리와 완전히 다른 이유는 조금 전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꾸며냈기 때문이다.
“또 널 만날 줄 몰랐는데…… 나는 매년 여기서 보름 정도 지내다 가. 그런데 네가 왔으니 이제 내가 다시 올 일도 없겠다……”
창백한 손은 망토의 모자를 걷어냈다. 그때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리며 바람에 따라 휘날렸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미소나 분위기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눈빛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내가 피한다고 해서 미워하지 말아줘. 네 기억 속에서는 항상 착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남고 싶으니까……. 아직 그때 약속을 기억해줄 줄은 몰랐네. 그래도 앞으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운명은 딱 여기까지야. 평생 독에 잠겨 사는 거……”
그녀는 한참이나 작은 산골을 응시했다. 예전 추억들이 머릿속에 하나 둘씩 떠오르는 그녀였다. 아라는 애처롭게 웃었다. 그 미소에서 예전의 그 착하고 따뜻한 모습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다.
* * *
산골짜기에 있던 보람은 얼굴이 살짝 보랏빛으로 질려 있었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아라의 독이 이 정도로 강할 거라 생각 못했던 그들이었다. 보람이 독을 얼마 흡입하지 않았음에도 지금 같은 증상이 나타난 것을 보면 독술사가 무서운 직업임이 분명했다.
이준은 즉시 보람의 팔을 붙잡고 염력을 몸속으로 흘려보내며 독을 수색했지만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지?”
메두사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가 안 좋은지 모르겠어. 독이 너무 몸 속 깊이 숨어있는 것 같아.”
“그 녀석의 몸에서 나오는 독성이 너무 강하긴 했어. 나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보람이는 더했겠지. 이제 어쩔 셈이지?”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아라에게서 건네 받은 옥병을 꺼냈다. 메두사는 옥병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그 녀석이 준 물건을 쓸 샘이야? 진짜 해독제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혹시라도 잘못되면 누가 책임지지?”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메두사가 보람을 이렇게나 아끼는지 몰랐던 그였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거짓말 칠 애는 아니야. 게다가 다른 방법도 없잖아?”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인간을 죽여버리겠어!”
이준은 연금비약을 천천히 보람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보람은 얌전히 약을 뱃속으로 삼켰고 순간 약의 쓴 맛 때문인지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연금비약이 먹기는 힘들어도 효과는 뛰어난 듯했다. 약이 몸에 퍼지자 마자 보람의 안색이 점점 돌아왔고 보랏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를 확인한 이준과 메두사는 비로소 깊이 안도했다. 이준은 식은 땀을 닦으며 쓴웃음 지었다. 자신의 연금술이 아라의 독소 제거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연금술과 독극술은 일맥상통한 부분이 많았기에 더욱 그랬다.
‘대체 무슨 일들을 겪었길래 메두사한테도 밀리지 않는 실력을 기르게 된 거지? 게다가 독술도 더 강력해졌어.’
이준은 시선을 초가집으로 돌리며 속으로 탄식했다.
그보다 더 걱정되는 건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예전의 그 온화하고 착하던 여자아이에게서 나올 법한 눈빛이 아니었다.
이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사념을 떨쳐내고 초가집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 이준 본인의 실력이 투황이 되고 나서야 고민할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언젠가 또 다시 아라를 만나리란 예감이 강하게 드는 그였다.
아라가 떠나자 작은 산골짜기에 떠 있던 강한 독기도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준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이준은 아라가 예전 같이 착한 소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다. 게다가 독술 공격도 예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아라가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지만 독이 조금이라도 묻는다면 얼마나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기는지는 나원승의 해독을 도우며 이미 뼈저리게 느낀 그였다.
산골짜기에 자리를 잡은 뒤 이준은 새를 보내 이씨 가문 사람들과 관련 인물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표기해 전달했다. 행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가면 이정 쪽에서 사람들을 보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이준은 산골짜리를 자세히 탐색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각종 귀한 보물들이 즐비한 곳임은 틀림 없었다. 행여나 소문이 퍼지면 각지의 연금술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몰려올게 분명했다.
산골짜기의 마수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은 이준이었지만 보람이 그를 저지했다. 이준이 수련하는 동안 그들이 자신과 놀아줄 친구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람의 의견이 아니어도, 다시 생각해보니 마수들이 있는 게 호신 효과도 얻을 수 있어 좋을 듯했다. 행여나 침입자가 들어와도 이 정도 급 마수를 보면 도망치기 마련이었다.
이준은 산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커다란 구멍을 하나 내었다. 그리고 3일치 약재를 모아다가 저장 반지에 한 가득 담아 두었다. 산 동굴에 들어가는 건 연금비약 제조를 위해서였다.
이번도 적지 않은 양의 연금비약을 제조해야 했다. 은평강 쪽 수장 세 명의 황금단, 이찬과 임동수에게 주기로 한 영혼의 정수까지. 하나 같이 평범한 연금비약이 아니었기에 제조 과정도 무척이나 복잡했다. 게다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깊은 산굴에 들어가기 전, 이준은 보람과 메두사에게 최대한 외출을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산골짜기의 에너지는 외부 세계보다 강하니 더 효과적인 수련이 가능했고, 여러 약초들을 먹으며 보람이 승급할 가능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이준이 당부하자 두 사람은 말로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메두사가 투종 강자였기에 이준은 안심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강한 마수들도 메두사 앞에서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준은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산굴에 들어가 일반 연금술사들은 학을 뗄만한 어려운 연금술을 시작했다.
* * *
어두컴컴한 산굴 속에서 이준은 푸른 돌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고 그의 옆에는 거울처럼 매끈한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로는 각종 약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약재는 전부 옥 상자에 들어 있었는데 짙은 약 향기가 풍겨져 나오며 산굴을 가득 채웠다.
약 솥을 꺼낸 뒤 이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두 연금비약 중 영혼의 정수는 제조가 훨씬 간단했다. 게다가 성공률도 높은 편이다. 반면 황금단 같은 6레벨 연금비약은 이준 실력으로는 성공 확률이 반을 넘지도 못했다. 그나마 준비물이 풍족해 다행이었다. 유씨 가문에서 여러 약재들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산골짜기에서도 꽤나 많은 양을 채집했다. 여러 번 시도하면 황금단 제조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이준은 먼저 영혼의 정수를 먼저 만들기로 결심했다. 조금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어려운 연금비약에 먼저 손을 댄다면 많은 시간 낭비를 하게 될 지도 몰랐다.
결심이 서자 이준은 마침내 긴 호흡을 내뱉고는 잡생각을 모두 떨쳐버렸다. 그는 손가락을 굽혔고, 청록색 불꽃을 손끝에 피워내 약 솥 안으로 던져 넣었다.
약솥은 불꽃으로 타올랐고, 산굴의 온도도 뜨겁게 올라갔다. 그러나 이준에겐 아무런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는 약 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약 솥에 약재가 하나씩 들어가며 연금비약 제조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 * *
산골짜기 안에 있던 보람과 메두사는 이준이 산굴에 들어간 뒤로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두 명이서도 충분히 잘 놀 수 있었다. 다만 이준이 연금비약을 만드는 기간이 길어지자 활력을 주체 못하는 보람은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특히나 산골짜기의 마수들이 애완동물처럼 순해지고 나니 더욱 재미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람은 메두사와 뜻을 맞춰 몰래 산골짜기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에 천둥산에 일시적인 소란이 일어났다.
에너지에 대한 민감도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보람은 여러 마수들이 지키고 있는 귀한 보물들을 한 눈에 찾아냈고, 이어서는 메두사가 위협을 가하며 물건을 하나 둘씩 손에 넣었다.
그들이 보물에 손을 대면 마수들은 눈이 뒤집혀서 그들을 쫓았지만 괴물 같은 여인들은 단숨에 녀석들을 처단했다. 천둥산에는 매일 같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활기로 가득했다.
그렇게 점점 더 많은 보물들이 보람과 메두사 손에 들어갔고, 그들이 손에 넣은 것들은 예외 없이 보람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무차별적인 강탈은 마수들의 분노를 축적시켰고, 마침내 실력이 강하고 사람과 비슷한 지능을 가진 이들이 모여 거대한 진영을 만들었다.
수많은 마수들이 모여 만들어낸 진영은 둘째 날에 메두사, 보람과 마주쳤다. 순간 거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보람과 메두사는 천지를 뒤흔들 듯한 포효 소리를 내며 파도처럼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마수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메두사 같은 실력자조차도 머리털이 삐쭉 설 정도였다. 그녀는 재빨리 보람을 데리고 도망쳤다.
그 안에서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보람과 메두사는 곧바로 산골짜기로 들어가지 않았고 천둥산 쪽을 몇 바퀴씩 돌다가 뒤쫓아 오던 마수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이준이 있는 산골짜기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마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연금술 중인 이준을 방해하게 될 까봐 신중했던 것이다.
그렇게 거의 5일, 6일 동안 생기발랄했던 보람에게 갑자기 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수가 줄어드는 정도였는데 점차 얼굴빛이 붉어지더니 나중에는 몸이 불구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보람의 변화에 메두사는 크게 당황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는 것도 없었다. 그가 이준을 불러야 하나 마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보람이 잠에 빠져버렸고 잠자는 그녀 몸에서 짙은 보라색 빛이 새어 나와 몸을 감싸 안았다.
그 상황을 보자 메두사는 깨달음을 얻고 안도했다. 보람은 그 동안 많은 보물들을 먹으며 체네 에너지를 충족시켰고 마침내 진화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