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353화 (353/818)

제353화. 청산

흑각성의 세 투황을 비롯해 자신을 도와준 이들과 대화를 마친 이준은 곧바로 조용한 방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두 형에게 수련에 전념하겠다는 의중을 밝혔다.

“흠…산으로 가겠다고?”

“응. 투황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수련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

이에 이정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불의 연맹 일은 나와 찬이에게 맡기고 안심하고 다녀와.”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찬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이미 이정 몰래 이찬에게 장생의 비약을 넘겨주었고, 약효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을 마친 뒤였다.

“찬이 형, 나중에 은평강 쪽 세 사람이 흑각성으로 돌아갈 때 형도 같이 돌아가도록 해. 형은 그 곳에서 최대한 실력을 기르는데 집중해서 십 년 안에 투황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 수련하는데 필요한 연금비약은 내가 얼마든지 만들어줄게.”

가만히 이준의 말을 듣고 있던 이찬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큰 형과 달리, 그는 왜 자신이 10년 안에 투황이 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준이 준 장생의 비약의 도움을 받아도 초월의 비약의 효과를 완전히 몸에서 몰아내려면 투황이 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디로 들어가 있게?”

이정이 이준을 보며 물었다.

“천둥산으로 갈 거야. 옛날에 좋은 약재가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한 적이 있거든. 그런데…얼마나 오랫동안 그 곳에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천둥산? 호위대를 좀 붙여줄까?”

“아니야. 보람이만 데려가면 될 거야. 앞으로 불의 연맹과 관련된 일들은 모두 큰형에게 맡길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을 시켜 연락을 해줘.”

말을 마친 이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의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래. 이씨 가문의 미래가 다 너에게 달려 있으니 잡다한 일들은 모두 형에게 맡기고 수련에만 집중해. 언제 출발하려고?”

“지금…”

이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불의 연맹’에 대한 일을 형제들에게 맡긴 뒤 보람과 함께 홀연히 떠나버렸다.

황도를 벗어난 이준이 막 날개를 펄럭이며 속도를 올리려던 찰나, 곁에 있던 보람이 그의 소매를 잡아 당기며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채린 언니 저기 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굵은 나뭇가지 위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네 녀석과 꼬맹이만 보내기는 영 찝찝해서 말이지. 내가 따라가야 마음이 놓일 것 같거든.”

메두사는 덤덤한 표정으로 답하며 이준의 곁에 있던 보람을 자신의 옆으로 끌어 당겼다.

“그래, 그래. 같이 가. 어차피 난 한동안 은거하면서 갇혀 지낼 거라 보람이를 돌보기는 어려우니까. 다만 이 아이가 승급하려면 방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적절한 곳으로 데려가려던 것뿐이었어.”

말을 마친 이준은 자신의 청록색 날개를 서서히 펼쳐 천둥산쪽으로 날아올랐고, 메두사 역시 보람의 손목을 잡은 채 공중으로 날아올라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 * *

아라와 함께 지냈던 작은 산골짜기가 있는 곳은 천둥산의 깊은 곳으로, 황도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비행마수나 마차를 탄다면 닷새나 엿새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준은 예전의 꼬마가 아니었다. 온 가한제국을 횡단하는 데도 하루면 충분했다.

이준은 자신이 저택을 나설 때 가지고 나온 지도에 표기된 길을 따라 쉬지 않고 날개짓을 거듭했다. 반나절 가량을 비행하자, 우뚝 솟은 천둥산의 산봉우리가 보였다.

자신이 처음 수련을 시작했던 곳에 돌아오자, 아련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용병단에게 쫓겨 들어간 동굴에서 ‘매의 날개’를 얻은 것부터 진율희를 만난 것, 그리고 아라를 만났던 일까지…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산 아래 위치한 작은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집들이 줄줄이 늘어선 청산 마을을 보고 있자니, 하얀 치마를 펄럭이며 온화한 표정으로 약국에 앉아 부상당한 용병들을 치료하던 아라의 모습이 문득 뇌리에 스쳤다. 그녀와 헤어진지도 벌써 7년이었다.

한참동안 상념에 빠져있던 이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메두사와 보람을 바라봤다.

“가자. 먼저 마을에 들러야겠어.”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몸을 움직여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빠르게 산 아래로 내려갔고, 메두사와 보람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청산 마을. 오랜만이네……”

마을에 도착하자, 몇 년 전 처음으로 집을 떠나 거대한 검은 송곳을 짊어진 채 비지땀을 흘리던 기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여기가 내가 처음 수련을 하던 곳이야. 그 당시에는 겨우 투사 계급의 꼬맹이였는데…”

이준은 웃음을 지으며 보람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고개를 들어 사방을 훑어봤다. 청산 마을은 예전보다 제법 커져 있었고, 오가는 사람의 수도 예전의 배는 되어 보였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집을 떠난 뒤 7년 간 천둥산에서 타르 사막으로, 타르 사막에서 운남종으로, 다시 흑각성을 거쳐 가람 아카데미로… 쉴 새 없이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고, 그 후로는 천계의 탑에 갇혀 죽을 고비를 겪었다가 다시 가한제국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런 저런 감상에 빠져 마을을 돌아다니던 이준은 커다란 약재상 앞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발걸음을 멈췄다. 아라를 처음 만났던 그 곳은 예전보다 훨씬 커져 있었지만, 그 때처럼 따뜻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이에 이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뒤따라오던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약재상의 달라진 분위기에 왠지 모르게 평화롭던 기분이 사라지고 되려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됐다. 가자. 오늘 천둥산까지 가는 거야.”

하지만 말을 마친 그가 막 등을 돌리려던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이 일더니, 곧이어 사람들 틈을 뚫고 두 사람이 나타나 빠르게 이동했고 그 둘이 나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몇 사람이 날아와 조금 전 두 사람을 붙잡았다.

“크큭. 도망가려고? 흑표 용병단 놈들은 한 놈도 살려둘 생각 없어,”

얼굴에 선명한 칼자국이 나 있는 중년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와 사람들에게 붙잡힌 남녀 한 쌍을 보며 말했다.

사람들에 포위된 두 사람 중 남자는 건장한 몸집에 중년이었고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여자는 훨씬 젊어 보였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자태에 생김새도 예뻤지만 낯 빛이 유난히 창백했다.

“빨리 도망가. 내가 저 놈들을 막아볼 테니까!”

중년은 얼굴에 칼자국이 새겨진 남자를 죽어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한서! 흑표용병단은 이미 청산의 대부분 지역을 양보했다. 너희 뱀굴용병단에서 감히 학살을 해대다니. 아무리 허씨 가문을 등에 업고 있다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너무하다 한들 뭘 어쩔 셈이지? 내가 말 했을 텐데. 흑표용병단은 한 명도 남겨두지 않는다고! 생각이 있다면 그 계집을 빨리 이리로 넘겨라. 오늘 밤 그 여자를 탐해볼 생각이니.”

흉터 있는 중년이 씩 웃었다.

“미친놈!”

중년은 분노에 차 소리치며 여인의 몸을 세게 밀쳐냈다. 원기가 터져 나오며 그녀를 십 미터 밖으로 밀어냈다.

“라엘아, 도망가! 어서 천둥산으로 가!”

중년의 행동에 흉터 남자는 냉소하며 손을 치켜 올렸다.

“놈을 죽여!”

명령을 들은 몇 사람은 곧바로 우렁찬 대답을 하며 무기를 손에 쥐고 중년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흉터 남자는 사색이 된 여자를 빠르게 쫓았고 입가엔 사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준은 갑자기 거리에서 일어난 소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들 싸움 구경하는 데에는 취미가 없었지만 흉터남 입에서 나온 ‘흑표용병단’이 이준의 케케묵은 기억을 끌어냈고 라엘이라는 이름에 마침내 인상을 찌푸렸다.

“켁!”

이준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원래 부상 입었던 중년은 몇 사람의 미친 듯한 공세에 맞서지 못하고 한 대에 뒤로 날아가며 피를 토해냈다.

중년의 부상에 정신없이 도망가던 여자도 뒤를 돌아보며 울먹이며 소리쳤다.

“카은 아저씨!”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했지만 감히 나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칼자국 난 남자의 배경이 두려웠으리라.

흉터 남자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했다. 그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귓전에 날카롭게 꽂혔다.

“크큭. 소리쳐도 소용없어. 얌전히 돌아와. 이 대장님이 잘 놀아줄게.”

그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자는 저항할 힘없이 두 눈 뜬 채로 상대방의 큰 손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눈빛은 절망과 비참함이 가득했다.

“이 짐승새끼!”

카은이라 불린 중년은 흉터 남자의 행동을 보고 욕을 뱉으며 그를 향해 날아갔고, 그가 욕을 하기 무섭게 사람 형상이 빠르게 카은 앞에 나타나 그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흉터 남자는 냉소 지으며 땅을 구르는 카은을 힐끗 보고는 계속해서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여자를 잡으려던 그 순간, 갑자기 강력한 원기가 폭발하며 가슴 위를 내리쳤다.

“쿨럭!”

갑자기 날아온 공격에 흉터 남자는 창백하진 얼굴로 연신 피를 토해냈고 곧바로 바닥을 향해 떨어지다가 몇 미터 내려가고 나서야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돌발상황에 길거리 분위기가 순식간에 침묵으로 물들었고 수많은 이들이 경악에 찬 눈빛으로 칼 흉터 난 남자를 바라봤다. 상황 파악이 아직 안 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라엘이라는 여자는 비참하게 신음하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홱 돌렸고 검은 망토 뒤집어쓴 이를 눈 안에 담았다.

라엘은 검은 망토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고 뒤이어 그의 평온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살짝 입술을 벌린 채 그의 얼굴을 응시하던 라엘은 넋이 나간 모양새였다. 자꾸만 그 얼굴이 어디선가 본 것 같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쓰러진 카은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입가서 흐르는 피 따위 신경 쓸 겨를 없이 곧장 라엘을 지키려고 날아갔다. 그는 검은 망토 입은 자를 보며 감격에 차 말했다.

“신사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리에 모여 있던 군중들도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그들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청년을 빤히 응시했다. 한 방에 3성 무투사인 상대를 때려 눕힌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청산마을에서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뱀굴용병단을 건드리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허씨 가문에는 투왕 계급의 강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뱀굴용병단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흉터 있는 남자가 나가 떨어진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날아가 검은 망토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퉤-엣!”

흉터 있는 남자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입에 고인 침을 뱉어냈다. 그는 독기에 찬 눈빛으로 담담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준을 노려봤다.

“이 새끼가. 겁도 없군. 감히 청산마을에서 우리 뱀굴용병단을 건들 생각을 해? 우리 단장이 허씨 가문의 사위인 것도 모르는 놈인가?”

흉터 남자를 힐끗 보고는 고개 젓는 이준이었다. 그는 허씨 가문에 대해 들은 적도 없었다.

“신사분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것보다 빨리 도망가시지요. 괜히 뱀굴용병단 쪽 강자까지 몰려온다면 힘드실 겁니다.”

카은은 독기에 찬 눈빛을 쏘아대는 남자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그리고는 라엘을 이준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라엘이를 마을 밖까지 데리고 나가주세요. 혹시 번거로우시다면 읍내만 벗어나게끔 도와주시면 됩니다. 제가 막아볼게요!”

“저는 안 가요! 죽어도 같이 죽을 거라고요. 어차피 흑표용병단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제가 살아봤자 무슨 소용이냐고요!”

라엘은 꼼짝 않고 서서 눈물을 쏟았다.

“너 이……!”

카은은 욱하고 화를 낼 뻔했지만 이내 하얗게 질린 라엘의 얼굴을 보고는 힘 없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저었다.

“됐다, 됐어. 단검을 잘 챙겨 두거라. 만일 겁탈하려 든다면 목숨을 끊어 모욕을 피하거라.”

이준은 어쩔 줄 몰라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다 결국 고개 저으며 가볍게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