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0화. 거래
이준은 갑옷을 저장반지에 잘 넣어둔 뒤 진율희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조심히 잘 다녀와…”
곧이어 그의 등 뒤에서 청록색의 불꽃 날개가 돋아났다.
적막한 산봉우리를 벗어나 황도로 날아가는 동안, 그는 자신이 투황 계급의 벽에 한걸음 가까워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투왕의 벽을 깨고 진정한 투황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운산과의 목숨을 건 대전 이후, 준은 다른 사람이라면 수 년 동안 수련에 매진해야 얻을까 말까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벽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준은 그리 초조해 하지 않았다. 아직 투황으로 승급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작은 계기만 마련된다면 금방 승급할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황이라…”
게다가 전투의 결과는 단지 염력의 수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그의 실력은 어줍잖은 투황 최상급의 강자와 싸운다 해도 크게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여기에 「천계의 불꽃」을 이용한 염력 증폭에「번개의 춤」과 「태초의 힘」, 「산의 힘」과 「태양검」등의 고급 무투기, 그리고 천지의 불꽃의 힘이 더해지면, 어지간한 투황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의 비장의 무기인 세 개의 불꽃을 결합한 「화련」은 3 성 이하의 투종 강자에게 적잖은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수준의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전투 실력만 놓고 본다면 이미 어설픈 투황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렇지만, 이준이 자신의 실력만으로 투종 강자를 죽일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못했다. 운산과의 싸움에서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현재 이준의 진짜 실력은 겨우 투왕 최고단계밖에 되지 않았고, 투종 강자와는 수준 차이가 너무 컸다. 고급 무투기와 비술, 천지의 불꽃이 아니었다면 상대에게 언제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투황 계급에만 오르게 된다면 온갖 진귀한 무투기와 비술, 천지의 불꽃과 자신의 염력 수련법인 「불개」를 이용해 더 힘든 상대와도 맞붙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 개의 불꽃을 결합한 화련의 위력 역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테니, 어쩌면 자신의 힘만으로 투종을 꺾을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가급적이면 화련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화련은 염력 소모량이 너무 커 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다면 뒤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매번 이판사판식으로 싸워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투황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도영호라는 놈도 투종 정도였어. 게다가 영혼의 궁전에 얼마나 더 많은 강자들이 있는지 모르니 아버지와 스승님을 구하려면 최소 투황 최고 단계나 투종 초기 단계는 되어야겠지. 그리고 은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투종급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날아가다 보니, 어느새 이씨 가문의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동생이 방 안으로 돌아오자, 이찬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더 늦었으면 동해 선생한테 부탁해서 운남종까지 찾아가려고 했어.”
이에 이준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곧바로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큰 형, 내일 해길 선배님이랑 유력한 세력들을 모두 모아보자.”
“상처는 다 나은 거야?”
이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두 형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 * *
다음 날 아침, 따뜻한 햇살이 제도 위를 비추기 시작하자, 제도 중심부에 자리한 이씨 가문의 저택 앞으로 가한제국내의 유명 인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택의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회의실 주위에는 무장한 호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가한제국 내에서 내로라하는 세력의 수장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강자들의 면면이 무색하게,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이었다. 청년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 나타난 강자들의 얼굴을 한번 쭉 훑어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철 장로님과 초아 공주님까지 오실 줄은 몰랐는데, 귀한 분들을 모시게 됐군요.”
“이렇게 큰 사건에 황실이 빠질 수는 없지 않겠나. 운남종을 대신할 가한제국의 대표 세력이 만들어지는 자리인데 말이야.”
이준과 채린, 보람을 보는 가철의 눈빛에는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다들 모였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곧이어 이준이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됐다.
“이제 운남종이 가한제국에서 사라지고, 운산의 야망도 물거품이 됐습니다. 그렇지만 운남종은 가한제국을 대표하는 세력이었으니, 저희가 운남종을 멸망시키면서 가한제국의 힘 역시 크게 꺾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해서…제가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보려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세력을 가한제국을 넘어 서북 지역 전체에서 인정받을만한 세력으로 키울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여러분 역시 가한제국을 벗어나 서북지역 전체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겠지요.”
사람들은 이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묵묵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간 가한제국은 서북지역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고, 가한제국에서 제법 위세를 떨치는 세력이라고 해봤자 밖으로 한발자국만 나가면 삼류 세력 취급을 받기 일쑤였으니, 그들의 사업 역시 오로지 가한제국 내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씨 가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 서북지역의 일류 세력으로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이고, 국외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더욱 큰 이득을 남길 수 있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운남종 이상의 힘을 가진 세력을 만들어 가한제국을 서북지역의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는 것. 그것이 현재 저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을 모은 것은, 바로 그 세력을 만드는데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준의 이야기가 끝나자, 회의실 안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준 선생의 뜻은 아주 잘 알겠네. 그러니까, 우리 가문을 모두 합쳐서 단일 세력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인가?”
무이신이 먼저 말을 꺼내자, 동해와 주희를 뺀 나머지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준이 운남종처럼 다른 세력들을 모두 흡수해 자신의 휘하에 두려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 했다.
“하하. 분위기를 보니, 조금 오해가 있는 듯 하군요. 막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러분들이 연맹에 가입해 협약을 맺자는 의미입니다. 이건 운남종처럼 여러분들을 이씨 가문에 복속시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가 구상한 조직은 서로 이익을 공유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를 보호해주는, 문자 그대로 ‘연맹’입니다. 그리고… 조금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 저희 가문도, 가한제국의 황실도, 나머지 3대 가문도 서북지역 전체로 보자면 삼류세력에 불과합니다. 그 운남종조차도 가한제국을 벗어나면 간신히 이류 세력 취급을 받았던 것은 모두들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연맹을 결성하면, 가한제국을 벗어나 서북지역의 일류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 입장에서도 절대로 손해를 보는 거래는 아니라는 의미이지요.”
이정이 웃으며 설명을 덧붙이자, 자리에 있던 다른 세력의 수장들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오늘 이 거래를 받아들이시고, 연맹이 세워진다면, 전문적으로 연맹내 강자를 양성하기 위한 시설을 만들 예정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곳이 앞으로 연맹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 되겠지요. 여러분들이 각자 우수한 인재들을 추천해주신다면, 고급 수련법과 무투기는 물론, 수련에 도움이 되는 연금비약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지원해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의 가주인 이준은 연금술사입니다. 그것도 아주 재능이 넘치는 연금술사이지요. 젊은 시절의 고하에 비교해도 제 동생이 나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고하보다도 더 대단한 연금술사가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 조건이라면 가한제국내의 그 어떤 세력도 내걸 수 없는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하하, 그럼 저희는 앞으로 뭘 해야 합니까?”
이정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나원승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연맹에 가입하시면 앞으로는 가문이 아니라 연맹을 하나의 가문처럼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거죠.”
하지만 이어지는 이정의 대답에 자리에 있던 이들 중 대부분이 흠칫 놀라며 고민에 빠졌다. 이는 자칫하면 가문이 해체되는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연맹의 이득을 위해 죽어라 노력하고 그 이득을 분배받지도 못하면서 가문의 결속력만 약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정은 이미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으며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씨 가문이 연맹을 독점할까 우려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희는 각 가문의 장로들을 모아 연맹의 장로회를 만들고, 이를 연맹의 최고 의사 결정기관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맹주라 하여도 장로회의 결정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단, 초기에는 각 가문별로 일정한 비율에 따라 장로직을 드리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공과에 따라 장로직이 배분될 것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도 양해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허허.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 새로운 조직의 장로 자리를 맡아봐도 되겠습니까?”
모두가 망설이는 와중에, 동해가 먼저 연맹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하지만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 망설이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싸늘한 표정으로 이준의 뒤에 서있는 메두사 여왕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 퍼뜩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사실 지금 이씨 가문의 힘이라면 다른 세력들을 박살내고 강제로 그들을 자신의 휘하에 복속 시킬 수 있었다. 이준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은 거래의 상대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속내인지는 몰라도, 상대가 자신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것이다.
이를 깨달은 무이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우리 가문도 연맹에 가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저희 문씨 가문을 잘 돌봐주셨으면 합니다.”
“연맹에 가입하시면 저희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약속드리죠. 누군가가 우리 연맹의 구성원들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이씨 가문은 목숨을 걸고 연맹원을 지킬 것입니다.”
삼대가문 중 두 가문이 연맹원에 가입하기로 하자, 나원승의 얼굴에도 씁쓸한 표정이 번져갔다. 이미 3대 가문 중 두 가문이 이씨 가문과 손을 잡기로 한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희 나씨 가문도 동참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연금술사 협회였다. 하지만 이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해길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준, 자네도 알지 않나. 우리 협회는 다른 가문들과 다르네. 협회의 결정은 그렇게 큰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해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이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력이 서북 지역 전체에서도 인정을 받을만한 힘을 가지려면, 연금술사 협회를 가입시키는 것이야말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