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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349화 (349/818)

제349화. 정세 변화

거실에 오자, 안에서 이정과 이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 하나, 낯익은 여자 목소리 하나가 그 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준은 그 목소리가 황실의 후계자, 초아의 목소리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기에는 왜 온 거지?’

“아아, 이준씨. 얼굴 뵙기가 쉽지 않네요. 몇 번 찾아 왔었는데 한 번도 못 뵈고 그냥 돌아갔거든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초아가 몸을 일으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준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이찬의 곁에 있는 의자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이준씨가 저희 황실의 큰 골칫거리를 제거해 줬으니, 직접 찾아와 인사를 드리는 게 당연하죠.”

이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차를 들이켰다. 그녀가 겨우 감사인사를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올 리가 없었다.

상대의 반응을 살피던 초아는 생글 생글 웃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준이 자신의 의중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 역시 눈치 챈 것이다.

“이준씨가 가한제국내에 세력을 세우려 한다고 들었어요.”

“아직도 이씨 가문을 노리는 적이 많으니, 가문 사람들을 지키려면 힘이 필요하거든요.”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을 늘어놓는 이준의 모습에 초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군요.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리 황실에서 그것을 도와드린다면 어떻겠습니까? 다만…이씨 가문이 제 2의 운남종이 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말이죠.”

상대가 단도직입적으로 황실의 입장을 밝히자, 그제서야 이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너무 걱정 마시죠. 황실이 저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저도 항상 황실을 돕겠습니다.”

“아, 너무 불쾌해 하지는 마세요. 저희도 이준씨가 운산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원래 이런 일이라는 것이 상대에게 확약을 받아야 하니 결례를 무릅쓰고 여쭤본 것입니다. 게다가 운남종이 사라진 이상 가한제국을 대표할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니, 황실에서도 전력을 다해 이씨 가문을 지원할 것입니다.”

상대의 예의바른 태도에 조금 기분이 풀어진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실례했군요. 불과 얼마 전까지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던 전우인데. 하지만 아직은 세력을 세우는 일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대략적으로나마 윤곽이 잡히면 바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좋은 소식 기대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된 듯하자, 초아는 곧바로 저장 반지 안에서 십 여개의 옥 상자를 꺼내 그것을 이준 앞에 내밀었다.

“할아버지께서 보내신 물건입니다. 이준씨께서는 연금술사이니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으실 테고, 그러니 약재를 드리라고 하시더군요. 그럼 저는 황실에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초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뒤돌아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황실에서도 이 일을 꽤나 신경 쓰나 보네.”

눈앞에 펼쳐진 옥 상자를 보며 이찬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운남종과의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니만큼 이씨 가문의 위상이 달라지리라는 것은 그 역시 예상했지만, 이렇게 황실에서 직접 찾아와 먼저 선물을 건네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운남종을 피해 쥐새끼처럼 숨어 다녀야 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글쎄. 그것보다 우리 옆에 그들이 무서워할만한 강자들이 많아서 이러는 것 같은데.”

이정이 덤덤히 웃으며 말했다.

“뭐가 어떻든 일단 우리 일을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는 게 중요하지.”

이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젓자, 이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좋아. 그럼 이제 새로운 세력을 세우는 것에 대해 얘기해보지. 내 생각에는 아예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것 보다, 가한제국 내의 유력한 세력들과 손을 잡고 큰 연맹을 만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하면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세력을 만들 수 있으니까. 게다가 황실은 이미 우리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니까, 제국 내에서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끌어 모으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다만 새로운 투사들을 키우려면 고급 수련법이나 무투기가 필요한데…”

“수법이나 무투기는 나에게 맡겨줘, 하지만 세력을 만드는 일은 큰 형이 맡아줘. 그쪽은 내 전문이 아니라서 말이야.”

이미 이준의 손에는 상당한 수의 무투기와 수련법이 있었다. 한샘과 약로가 모아둔 수련법과 무투기 정도라면 대륙내의 어줍 잖은 세력들과는 당장이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 알겠다. 그보다, 상처는 좀 어때?”

“며칠만 더 지나면 완전히 나을 것 같아.”

이준의 대답에 이정과 이찬이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음을 지었다.

“좋아. 네가 완전히 회복하면 나는 흑각성으로 돌아갈게. 그쪽에 남아 있는 우리 이씨 가문의 근거지도 관리를 해야지.”

“좋아. 그 쪽에는 가람 아카데미에서 보내준 인재들도 있을 테니까, 잘만 키워내면 아주 쓸 만한 전력이 될 거야. 우리 가문이 세력을 넓혀 흑각성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면 앞으로 투기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세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이정의 의견에 이준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원은 그야말로 대륙 전체에서 내로라 하는 인재들이 모이는 곳 이었으니, 어쩌면 가한제국 전체보다도 그쪽에서 수급할 수 있는 인재가 더 많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세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시녀 한 명이 걸어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준 도련님, 설아 아가씨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나…설아?”

갑작스러운 나설아의 방문에 이준은 귀신이라도 본 마냥 깜짝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그래, 일단 들어오라고 해.”

“오, 나설아라고? 제수씨가 될 뻔 한 친구였는데 아직 얼굴도 제대로 못 봤군.”

시녀가 자리를 떠나자, 이찬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나설아가 이씨 가문에게 저질렀던 일을 아직 잊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때 일은 셋째가 가서 해결한지 오래야. 괜히 마음에 담아두지 마.”

하지만 이정은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둘째를 나무랐고, 이에 이찬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와 함께 나설아가 나타났다.

“우리 가문에는 무슨 일이지? 너와는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상대의 냉담한 반응에 나설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마지막으로 널 보고 싶어 하셔서.”

“마지막이라고?”

순간 이준의 주먹에 불끈하고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의미지? 다시 한 번 해보자는 건가? 흩어진 운남종의 제자들을 찾아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을 텐데.”

이에 나설아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이준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런거 아니야. 다만 너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어.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오고, 아니면 말아.”

기분이 상한 나설아는 이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관저 밖으로 나가버렸고, 이준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루마리 하나를 이찬에게 던졌다.

“둘째 형, 거기 적힌 약재 좀 찾아줘. 내가 쓸 데가 있어서 그래. 최대한 빨리!”

이찬은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준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에게 두루마리를 넘긴 이준은 곧바로 나설아를 쫓아 방 밖으로 나섰다.

저택을 나선 이준은 곧바로 날개를 펼쳐 나설아를 따라 성 밖으로 날아갔다.

나설아는 빠른 속도로 황도를 벗어나 운남종 방향으로 쉴 새 없이 날아갔다. 이준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계속해서 그녀의 뒤를 쫓았다.

빠르게 평원지대를 지나, 이제는 텅텅 비어버린 운남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올 무렵이 되어서야 나설아는 천천히 비행 속도를 낮췄다.

몸을 숙여 아래쪽을 바라보니 한 때 가한제국 최고의 세력으로 명성을 떨쳤던 과거가 무색하게 황량해진 풍경만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보기 힘든 산봉우리 위로 가을바람이 불자, 폐허가 된 광장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준과 함께 굳은 표정으로 발 밑 풍경을 바라보던 나설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렇게 해야만 속이 시원했어?”

“내가 한 달만 늦었어도 가한제국에 남은 유일한 이씨는 나였을걸? 그런데도 그런 말이 나와?”

이준의 날선 말투에 나설아는 이내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운산은 문자 그대로 이씨 가문의 씨를 말릴 요량이었으니, 이준이 나타나 운산을 죽여 버리고 운남종을 해체하지 않았더라면 이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죽었을 것 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설아의 입가에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때 일은 아직도 후회 중이야. 내가 철없이 행동하지만 않았더라면…”

“이제 와서 후회해서 뭐 할 거야.”

침통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어두운 이야기만 늘어놓는 나설아의 태도에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한 소리 말고 데려가기나 해. 어차피 다 지난 일이니까.”

“그 때 일을 잊어 달란 소리 아니야…그냥, 내가 너무 철이 없었다는 소리야…”

나설아는 혼잣말을 하듯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린 뒤 몸을 돌려 뒷산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따라와.”

이에 이준 역시 날개를 움직이며 빠르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뒷산에 이르자, 빽빽이 서 있는 나무 사이로 낭떠러지 하나가 보였다.

“스승님은 저기 낭떠러지 끝에 계셔. 직접 가서 만나봐. 오늘이 지나면 나랑 스승님은 같이 가한제국을 떠날 생각이니까.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떠난다고? 어디로?”

“그건 아직 모르겠어. 이 넓은 땅덩어리에 우리 두 사제 갈 곳이 없겠어?”

말을 마친 나설아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절벽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나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의 입에서 가벼운 탄식이 새어나왔다.

진율희가 기다리고 있다던 절벽 쪽으로 날아가니,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여인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나.”

이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진율희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가한제국을 떠난다고?”

“운남종은 끝났어. 그러니 종주인 나도 더 이상 여기 남아있을 이유가 없지. 이번 기회에 투기대륙을 좀 돌아보려고.”

“후…”

이에 이준은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진율희와 그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일이 얽혀 있었으니, 이제는 어떤 말을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걱정 하지 마, 널 탓하거나 복수하고 싶은 게 아니야. 운남종이 이렇게 된 건 따지고 보면… 인과응보니까.”

“그럼 왜 굳이 떠나겠다는 거야?”

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날 원망하지 않는다면…차라리 여기 남아서 날 도와주는 건 어때? 투기대륙은 여자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위험하다고. 내가 새 세력을…”

이준은 마지막으로 상대를 설득해보려 했지만, 진율희의 눈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원망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결코 꺾을 수 없는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아니, 그건 안 돼. 아무리 그래도 난 운남종의 종주잖아. 운남종이 사라져버렸다 해도 말이야. 그것만은 안 돼. 대신… 네 마지막 배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운남종이 가지고 있던 보물들을 너에게 줄게. 새로운 세력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될 거야. 사라진 종파의 종주 따위보다는 훨씬 큰 힘이 되어 줄거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이준을 바라보던 진율희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말을 마친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겨 이준의 손에 녹색 저장 반지 하나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너한테 준 첫 번째 선물이 망가졌었잖아. 내가 잘 고쳐 놨어. 지금은 필요 없는 물건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잘 보관해줘. 혹시라도 내가 다시 돌아오면 그 때 돌려줬으면 좋겠다. 언젠가 운남종의 이름이 잊혀 질 때 쯤…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뭐, 기분이 내키면 말이야. 이제는 내 기분 내키는 대로 한번 살아보려고.”

그렇게 진율희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준의 손에 푸른 갑옷 하나를 쥐어주고는 청색의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지독하게 얽히고설킨 사람의 인연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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