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8화. 독종(毒宗) 맹독파
동해와 상의가 끝난 뒤에도 이준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조용히 이씨 가문의 저택에 남아 부상을 치료했다.
앞으로 가한제국 내에 운남종보다 강한 세력을 세우기 위해서는 충분한 힘과, 강자들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운남종보다 강한 세력을 만드는 것은 헛된 꿈에 불과했다.
그렇게 이준이 치료에 몰두하고 있을 때, 운남산은 완전히 텅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운남산이 완전히 비어버리자, 운남종의 해체를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생각하던 이들도 비로소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운남종이 힘을 잃자 많은 세력들이 그 위치를 탐냈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어리석은 이는 없었다.
운산을 꺾은 이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이상, 함부로 나서서 설쳐댔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의 눈과 귀는 이준의 다음 행보에 집중되어 있었다.
* * *
황성의 조용한 궁전 안에서는 가철과 초아가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로 진율희가 운남종의 제자들에게 해체 명령을 내릴 줄이야… 이제 운남종의 이름은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겠군요.”
초아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녀는 그 날 이후로 운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했고, 율희가 약속대로 제자들을 쫓아내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 오랜 세월 가한제국 황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대상이 마침내 사라진 것 이다.
이에 가철 역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전해 받은 소식으로는 이준이 가한제국에 새로운 세력을 세우려는 것 같더구나. 그 세력이 또 다른 운남종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질 않느냐.”
가철과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초아도 더욱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준이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은 결코 과거 운남종보다 약하지 않아요. 이준 본인만 해도 투종 강자랑 싸울 수 있는 수준이고, 그 옆에는 투종 강자인 메두사가 있잖아요. 함부로 나섰다가는…”
“그렇다고 해서 이준이 새로운 세력을 만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느냐?”
“그래도 이준은 운산처럼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의리를 중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탐욕스러운 사람 같지도 않고요. 이런 유형은 강경책보다 회유책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회유책이라…”
공주의 제안에 가철은 고민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빠졌다.
“이준은 상대가 잘해주는 만큼 베푸는 사람이에요. 상대가 속으로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리고요. 그러니…차라리 한배를 타죠. 적어도 이번 전쟁에서 우리는 그와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켰잖아요. 어설프게 건드려 벌집을 쑤셔놓는 것 보다는 차라리 계속 지금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훨씬 안전하고 확실할 거예요. 어차피 지금 우리 힘으로 그를 제거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네 말은, 그 녀석이 세력을 만드는 것을…도와주자는 소리냐?”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가철의 질문에 초아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 하나도 버거운데 메두사에 다른 투황들과 투왕들까지 있으니 황실 혼자 그에게 맞설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가한제국 삼대세력이 이제 와서 황실과 연합해 이준과 맞설 가능성도 전무해 보였다.
한참동안이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가철이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해보자. 그 녀석이 운산과는 다른 인물이길 바랄 수밖에…”
가철이 동의하자, 초아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어렸다.
“사실 운남종이 몰락한 게 황실 입장에서 꼭 좋은 것은 아니기도 하잖아요. 운남종이 없으면 앞으로 열리는 서북지역 종파대회에 우리 가한제국은 참가 조차 하지 못할 거고, 그렇게 되면 가까운 나라들의 조롱이 쏟아질 걸요. 아… 그리고 최근에 구름제국이 심상치 않다고 해요. 원래 구름제국 안에도 크고 작은 세력들이 많았는데, 전부 멸망해버리고 거대한 세력 하나만 남아 있다고 해요.”
“그래. 나도 들었다. 그 세력의 이름이 아마… 독종(毒宗) ‘맹독파’라지? 내가 받은 정보가 사실이라면, 맹독파의 종주가 투종급 강자라고 하던데, 어쩌면 하늘뱀족이나 천둥파 놈들과 견줄 수 있는 세력으로 우뚝 설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우리 가한제국 내에도 그들을 견제할만한 세력을 키워야죠.”
초아의 이야기에 가철은 또 다시 잠시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넌 이준 그 녀석을 믿는 모양이구나. 좋아. 이번에는 이준을 한 번 믿어보자. 뭐 딱히 다른 수도 없으니…”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손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자, 가철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초아야, 혹시 이준에게 특별한 감정이라도 느끼는 게냐?”
“아이 참, 무슨 말씀이세요!”
가철의 장난스런 질문에 초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껄껄…이상한 일도 아니지. 내가 본 젊은이들 중에 가장 뛰어난 녀석이니까. 외모도 뭐, 그만하면 됐고 말이야. 조금 냉담해 보이기는 하지만, 제 스승이나 동해 같은 인물들을 대하는 것을 보니 제법 의리 있는 녀석이더구나.”
“정말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손녀가 버럭 화를 내자, 가철은 짓궂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 그래… 뭐 아무쪼록 그 녀석의 부상이 다 회복되면 네가 황실을 대표해 안부를 물어다오. 기회가 된다면 우리 황실의 생각을 흘려보는 것도 좋지. 그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풀어 「맹독파」에 대한 정보를 모아 보거라. 조금 위험한 놈들인 듯 싶더구나.”
이야기를 끝마친 가철은 대궐 밖으로 걸어 나갔고, 초아는 가만히 자리를 지키다가 쓴 웃음을 지었다.
“독종(毒宗) 맹독파의 독녀(毒女)라…”
그녀의 머릿속에 얼마 전 황실의 첩자가 보내왔던 편지의 내용이 스쳤다.
자신으로 인해 가한제국이 뒤집어졌든 말든, 이준은 밀실에 틀어박혀 그저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데 전념했다. 최대한 몸 상태를 회복하고, 절대로 후유증을 남겨서는 안 됐다.
이번 부상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심각했다. 상처 치료를 위해서 온갖 귀한 연금비약을 다 썼지만, 완치를 위해서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준은 이런 상황에 그리 초조해 하지 않았다. 조급하게 서둘렀다가 후유증이 남기라도 하면 앞으로의 수련에 엄청난 지장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연금술사였기에 어떻게 하면 완벽하고 안전하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지를 잘 알았고, 결코 서두르지 않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데 집중했다.
한참동안이나 조용히 수련에 몰두하던 이준은 천천히 자신의 저장반지 안에서 녹색의 동그란 연금비약 하나를 꺼내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집어삼킨 것은 「원기의 결정」이라는 이름의 연금비약으로, 5레벨 연금비약 중에서도 제법 고급에 속하는 물건이었다. 그 녹색의 알약은 부상을 치료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자랑할 뿐 아니라, 부드러운 성분을 가지고 있어 신체에 조금의 해도 남기지 않아 중상을 치료하는 데에는 최고의 물건이었다.
연금비약이 입에 들어가자, 목구멍을 타고 따스한 기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이내 팔다리 곳곳으로 은은한 온기가 전해졌다. 따뜻하고 나른한 기운이 전해지자, 온 몸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다음으로 이준의 손 바닥위에 나타난 것은 붉은색 액체가 들어있는 약벙이었다. 약병을 천천히 기울이자, 붉은 액체가 이준의 손바닥 위로 쏟아졌다. 물약이 손바닥에 닿자마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난로 안에 손을 집어넣은 것만 같은 열기와 통증이 느껴졌다.
손바닥에서 강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이준은 당황하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손가락을 굽혀 푸른 알약 하나를 꺼낸 뒤 조심스럽게 그 위에 붉은 물약을 발랐다.
그러자 붉은 액체에 의해 녹아내린 푸른 알약이 화상을 입은 부위를 통해 몸속으로 스며들며 손바닥에서부터 얼얼한 통증이 전해졌다.
푸른색의 알약과 붉은 색의 연고가 몸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 산산 조각난 뼈가 빠르게 붙는 것이 느껴졌다.
약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고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오른쪽 팔목을 바라봤다.
“염력도 대충 반 이상은 회복된 것 같네. 예전이었으면 진작에 다 회복됐을 텐데… 아직도 채울 에너지가 남은 것을 보니 나도 꽤나 성장한 모양이야. 어쩌면 치료가 마무리되면 투황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잠시 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이준의 손바닥에서 청록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곧이어 그가 다른 한쪽 손을 불끈 쥐자, 스승이 남겨준 이마의 불꽃 문양이 천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스승님. 걱정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서 스승님과 아버지를 구해 낼 게요!’
이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있던 천지의 불꽃이 순식간에 스승의 영혼이 살고 있던 검은 저장 반지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까지만 해도 약로가 저장 반지 안에 들어가 있고, 반지가 약로의 영혼과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준이 반지 안으로 접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승의 영혼이 없었고, 얼음 불꽃의 정수를 가진 것은 이준이었기 때문에 그 저장 반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이다.
반지 안에는 수많은 고급 연금비약의 조합표를 비롯해 수련법, 무투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물품들이 가득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저장 반지에 있던 초록색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든 뒤 그것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두루마리 안에는 ‘초월의 비약’의 기운을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하루가 급했다. 둘째 형이 초월의 비약을 복용한지도 벌써 꽤 시간이 지났다. 영혼의 힘을 통해 스승이 남긴 두루마리를 읽어 내려가던 준은 약로가 특별히 표시해둔 부분에서 잠시 시선을 멈췄다 .
‘초월의 비약은 성분이 너무 강력해 제거하기 어렵단다. 그렇지만 초월의 비약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생명력을 끌어다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니, 우선 생명을 연장하는 연금비약을 먹으면 일시적으로나마 연명할 수 있지.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연금비약을 복용한 자가 숨이 끊기기 전에 투황 계급으로 승급하는 것이다. 그럼 초월의 비약의 약효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수명을 연장하는 연금비약을 대체 어디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스승의 편지 바로 아랫줄에 적혀있는 내용이 이준의 시야를 잡아끌었다.
“장생의 비약. 6레벨 연금비약. 대략 10년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 한 사람당 한 알만 복용할 수 있다. 재료, 불로의 열매, 생명수, 만년줄기……”
두루마리 속에 기록 된 내용을 쭉 훑어본 이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약재를 어떻게 구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왔다.
우선 동해에게 부탁해 유씨 가문의 경매장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모은다 쳐도, 그 중 몇 가지나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돌침대 아래로 내려가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방안에서 걸어 나오자,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 하나가 빠르게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셋째 도련님, 큰 도련님께서 찾으십니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저어 시녀를 돌려보내고는 곧바로 거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