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화. 투종의 전투
한편, 이준은 광장과 멀리 떨어진 곳의 나뭇가지 위에서 스승의 사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부상이 심각한 상태였지만, 그는 연금술사 특유의 강한 영혼탐지능력을 통해 다른 이들보다 더 분명하게 전투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약로의 힘은 확실히 강력했다. 그는 영혼체임에도 불구하고 얼음불꽃의 정수의 도움으로 도영호와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세는 시간이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투종 강자의 힘이 정확히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없었기에, 도영호가 영혼을 삼키고 난 뒤 얼마나 강한 힘을 갖게 되었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다만, 최소 6성 이상일거라는 추측만 내릴 뿐이었다. 운산은 2성에서 3성급의 투종 강자였고, 약로의 실력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도영호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니, 아마 그의 힘은 6성 이상이리라.
“이준, 이제 어쩔 셈이지?”
동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역시도 약로가 그리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이준의 표정 역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역시도 특별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상만 아니었어도 다시 한 번 이화 세 개를 섞어 화련을 만들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 상태로 다시 한 번 화련을 만들었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 아니, 최악의 경우에는 세 개의 불꽃이 대폭발을 일으켜 애꿎은 사람들만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 화련으로도 도영호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약로에게 약간의 기회만 만들어준다면…
“일단 지켜보죠…”
이준은 간신히 한 마디를 뱉고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준의 모습에 동해도 침묵을 유지하며 검은 구름 아래에서 펼쳐지는 전투를 가만히 지켜봤다.
흑백의 두 기운이 거세게 맞부딪힐 때 마다 검은 구름이 점점 더 옅어지고, 태양이 구름 사이로 빛을 쏟아내며 어두운 광장을 밝혔다.
“킥킥. 역시 대륙의 약존다워. 그런데 네 놈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겨우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계속 싸울 수 있을 것 같군.”
약로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덤덤하게 답하자, 도영호의 입가에 또 다시 음산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멍청했군. 눈 앞에 토끼를 두고 호랑이부터 사냥하려 들다니. 생각해보니 네 제자 녀석부터 잡아가는 게 빠르겠어. 안 그래?”
말을 마친 도영호는 약로가 입을 떼기도 전에 이준 쪽으로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비열한 자식!”
상대의 시선이 제자에게로 돌아가자, 약로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도영호의 몸은 돌풍과 함께 순식간에 이준의 곁에 도착했다.
갑자기 날아온 도영호의 모습에 동해를 비롯한 강자들의 얼굴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의 기세에 나원승, 무이신을 비롯한 투왕 강자들마저 황급히 꽁무를 뺐다. 하지만 이준의 곁에 남아 있던 가철, 동해 등은 이를 악 물고 앞으로 돌진했다.
“애송이들. 비켜!”
검은 형상이 팔을 휘두르자, 검은 안개가 정신 없이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손바닥을 만들어냈고, 순식간에 자리에 있던 투황들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균형을 잃고 광장 한쪽으로 날아갔다.
일격으로 방해꾼들을 밀어낸 도영호는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이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곱게 말할 때 이씨 가문의 물건을 내놓거라!”
다음 순간, 검은 투구 안에 있던 해골처럼 앙상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괴물의 발톱과도 같은 날카로운 손톱이 저항할 힘도 없는 이준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괴물의 손이 이준의 목을 낚아채려는 찰나, 갑자기 허공에 거대한 파동이 일어나며 이준의 모습이 홀연이 사라졌다.
“누구냐? 감히 우리 영혼의 궁전 일에 끼어들다니!”
“이놈의 목숨은 내 것이다.”
공중에 울려 퍼지는 맑은 목소리에 수 많은 눈빛이 한 곳으로 향했다.
“메두사 여왕?”
가철과 해길은 화들짝 놀라며 이준을 들고 뒤로 빠져 나온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메두사’라는 세 글자에 광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가철이나 해길과 달리 동해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직 이준과 메두사가 어떤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적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메두사 여왕이 나서준다면 상황이 조금 나아지겠군…’
동해는 식은 땀을 흘리는 동시에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메두사 여왕은 명실상부한 투종 강자이니, 강자들의 영혼을 흡수한 도영호라 해도 그리 쉽게 이준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놀랄 거 없어. 이준과 저 여자는…꽤 가까운 사이니까.”
동해의 설명에 사람들은 입을 쩍 벌린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가한제국 전체에 악명을 떨친 뱀인간들의 여왕이 어째서 인간인 이준과 가까운 사이일 수 있단 말인가.
그 때, 메두사 여왕의 몸에서 투종 강자 특유의 강렬한 기운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벌써 승급했을 줄이야……”
가철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번져나갔다. 수 년간의 수련에도 발전이 없었던 자신과 달리, 메두사 여왕은 이미 투종의 단계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쪽이 도와줄 줄 알았어.”
이준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피식 웃음을 짓자, 메두사 여왕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흥, 연금비약만 아니었다면 네놈이 죽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았을거다.”
하지만 메두사 여왕의 험악한 말에도 불구하고 이준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금 도영호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메두사였기 때문이다.
“부탁 하나만 하고 싶어. 내 목숨은 마음대로 해도 좋아.”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메두사 여왕의 표정이 더욱 크게 일그러졌다.
“네 스승을 지켜달란 소리군.”
“응.”
이준의 뜨거운 시선에 메두사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도영호를 바라봤다.
“그건 힘들겠군. 상대가 너무 강해. 너 하나는 어떻게 지켜보겠지만, 네 스승의 목숨까지 지키기는 어려워.”
메두사의 답변에 이준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았다. 메두사 여왕처럼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상대의 실력이 자신의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승님과 함께 연합해서 싸우는 건?”
이준의 제안에 메두사 여왕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렇게 이준과 메두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도영호의 흉흉한 붉은 눈동자에서 다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그 유명한 메두사 여왕이시군요. 하지만 당신이 아닌 그 누구라 해도 저희 영혼의 궁전의 일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녀석의 목숨은 내 것이야. 내가 빼앗고 싶을 때 빼앗을 목숨이니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
메두사가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자, 검은 색 연기가 거세게 일렁이며 강렬한 기운을 쏟아냈다.
“네 말대로 해보자. 네 스승과 연합해보지.”
결국 메두사 여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혼자서 상대하자니 도저히 자신이 없었고, 그렇다고 약로를 죽게 놔두자니 이준이 가만히 그 꼴을 보고 있을리가 없었다.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스승을 구해주겠다는 말에 이준의 얼굴에는 곧바로 화색이 돌았다. 그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을 반짝이며 메두사 여왕의 손을 꼭 붙잡기까지 했다.
“은혜 갚을 생각 말고, 약속한 연금비약이나 제 때 내놔. 네 놈에게 속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메두사 여왕은 이준의 감사인사를 독설로 받아쳤다.
말을 마친 메두사는 곧바로 대리석 같은 새하얀 손을 들어 무지개색 염력을 뿜어냈고, 메두사의 움직임에 맞춰 약로 역시 다시 한번 얼음 불꽃의 정수를 피워냈다.
두 투종 강자가 앞 뒤에서 염력을 폭발시키자, 시종일관 여유롭던 도영호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심각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정도 강자들이 힘을 합친다면 영혼을 빼앗기는커녕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군. 그 방법을 써야겠어. 투종 강자의 영혼을 얻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니…’
그 때, 도영호의 눈에서 붉은 빛이 폭발하며 그를 덮고 있던 검은 갑옷이 살아있는 생물마냥 꿈틀대기 시작했다.
곧이어 도영호의 주름진 얼굴이 드러났다가, 그 주위로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도영호가 삼킨 영혼들의 얼굴이었다.
운산을 비롯한 이들의 환영이 나타나자, 하늘 위에 음산한 바람이 불어 닥치며 그의 손가락 끝에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고, 도영호는 괴물처럼 변해버린 손으로 얼굴 모양의 환영을 붙잡은 뒤 그 안에 검은 연기를 불어넣었다.
검은 빛이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머리가 급격히 팽창하더니 크기가 배로 불어나며 더욱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혼의 장례식!”
도영호의 음산한 목소리가 허공에 퍼져나가는 순간,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환영이 점점 더 빠르게 팽창하더니 이내 칠흑같은 검은 빛이 쏟아져 나오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콰—광!
다음 순간, 천둥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천지를 가득 메우며 공포스러운 검은 에너지가 파도처럼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환영이 폭발하며 터져나온 시커먼 에너지는 순식간에 온 천지를 시커멓게 물들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닥쳐온 어둠에 광장 위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주위를 살폈다. 기묘한 검은 안개가 온 광장을 뒤덮은 탓에 달빛조차 없는 밤길처럼,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었다.
“스승님이랑 채린은 어떻게 된 거지…”
이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어둠 속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아마도 상대는 투종 강자의 영혼을 자폭시킨 것 같았다.
“겨우 빛을 없애려고 이렇게 큰 폭발을 일으켰단 말인가?”
이준의 곁에 있던 동해가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새하얀 염력을 내뿜었지만, 자신의 몸 주위를 밝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철을 비롯한 다른 강자들도 의아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폭발이 일어난 뒤로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겨우 그걸 위해 투종의 영혼을 버릴리는 없겠지. 아마도 운산의 영혼이 담고 있는 에너지를 집중시켜 메두사와 이준의 스승을 상대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 같군.”
이에 해길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는 연금술사 특유의 민감한 영혼탐지능력으로 에너지의 파동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쾅!
그 때, 갑작스레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젠장!”
이에 이준은 욕설을 내뱉으며 염력을 운용하자, 곧바로 그의 검은 눈동자안에 청록색의 불꽃이 일어났다.
곧이어 이준의 시야에 약로와 메두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 짧은 시간동안 약로의 영혼체는 더욱 흐릿해져 있었고, 두 사람과 멀지 않은 곳에 도영호가 떠있었다.
그가 만들어 낸 거대한 검은 빛 덩어리 안에는 무시무시한 영혼의 힘이 응축되어 있었다. 운산의 영혼이 폭발하며 흘러나온 에너지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쾅!
다음 순간, 거대한 영혼 에너지가 메두사 여왕과 약로에게로 날아가며 또 다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두 사람 역시 이를 악물고 염력을 폭발시켜 보았지만, 투종의 영혼이 자폭하며 만들어진 힘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검은 에너지는 마치 해일처럼 무지개색의 염력과 약로의 백색 화염 염력을 집어삼켰다.
“쿨럭…!”
결국 무지개색의 염력이 흩어지며 메두사 여왕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