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3화. 돌아온 나설아
“이걸로 운남종도 정말 끝났군요.”
갑작스레 펼쳐진 참극에 이준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떼자, 스승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운남종이 아니라 저 놈인 것 같구나.”
이에 이준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이미 개미새끼 한 마리 죽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저 괴물이 영혼을 삼키면서 점점 강해지고 있어.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다.”
체념한듯한 스승의 한마디에 이준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뭐가 어떻게 되든 절대 스승님을 넘겨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약로는 웃으며 이준의 어깨를 토닥일 뿐 이었다.
“난 네게 많은 걸 가르쳤으니 나머지는 네 스스로 이뤄내야 한단다. 영혼의 궁전 놈들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네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단다. 언젠가 그들을 뛰어 넘는 순간이 올 것이야.”
그 때 검은 안개의 크기가 다시 줄어들며 검은 갑옷을 입은 사람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의 갑옷에는 운산을 비롯한 운남종 장로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꿈에서 볼까 두려운 광경 앞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이, 악마새끼!”
새카만 갑옷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 장로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발견한 순간, 진율희의 눈이 피눈물이라도 흘린 듯 시뻘겋게 물들었다.
“내 목표는 약로다. 너랑은 상관 없어. 더 이상 날 귀찮게 군다면 이준을 처리하기 전에 운남종부터 쓸어주마.”
하지만 도영호는 진율희를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귀찮다는 듯 손을 저을 뿐 이었다.
“운남종의 제자들은 종주의 명을 받들라!”
진율희의 서릿발 같은 명령에 광장에 있던 운남종의 제자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고 하얀색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네!”
“흥, 좋아. 네 결정으로 인해 오늘 운남종은 멸문의 길을 걸을 것이다.”
운남종 제자들이 뿜어낸 염력이 거대한 구름이 되기 시작하자, 도영호의 몸이 진율희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나 도영호가 막 사슬을 붙잡은 손을 움직이려는 순간, 돌연 광장의 뒤편에서부터 날카로운 검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기운은…”
갑작스레 등장한 강력한 기운에 이준의 시선이 잽싸게 뒤편으로 향했다.
“나설아?”
상공에서부터 맑은 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뒤이어 운남산 뒷편에서부터 찬란한 빛 덩어리 하나가 날아왔다.
잠시 후, 광장으로 날아든 빛 덩어리 안에서 허리춤까지 머리를 기른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자, 혼란스럽던 광장 안이 일순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그 때, 청색의 빛 덩어리 하나가 갑자기 상공에 나타난 새하얀 피부의 여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스승님…”
“설아야. 정말…정말 생사의 관문을 넘어선 거니?”
몇 년 사이 몰라볼 정도로 자라난 제자를 마주한 진율희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스승님, 운남종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이어지는 제자의 질문에 진율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얼굴에 피어 올랐던 미소는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설아야, 운남종은 이제 끝난 것 같구나…”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광장의 모습에 나설아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곧이어 굳은 표정으로 광장 곳곳을 살펴보던 나설아의 눈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광장 한 가운데에…피투성이가 되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운산의 시신이 있었다.
“누…누구 짓이죠?”
다음 순간, 나설아의 시야에 무언가 익숙한 형상 하나가 보였다. 날개의 색도 변해있고, 외모 역시 몰라 볼 정도로 성숙해져 있었지만, 분명히 자신을 생사의 문으로 들어가게 했던 장본인, 이준이었다.
“이준?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못 본 사이에 이렇게 성장한 거야?”
이준 역시 놀란 눈으로 나설아를 응시했다. 상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으로 나설아의 실력이 이미 투왕 최고 단계까지 올랐다는 것을 알아차린 준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심지어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투황의 벽을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염력이 제법 대단하긴 하지만, 아직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 것 같구나. 아마 운남종에 전해져 내려오는 힘을 계승받은 것이겠지…유서 깊은 종파들은 모두 특수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스승의 설명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구름 불꽃의 신비한 힘을 이용해 3년 만에 지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설아가 특수한 힘이나 비술의 도움 없이 자신과 동등한 수준까지 성장한 것이라면 이는 그녀의 재능이 자신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거 네 짓이야? 나한테 볼 일이 있으면 나와 해결해야지, 이런 식으로 운남종을 망가뜨린 거야? 그 때 날 이기고서도 아직도 원한이 남은 거냐고!”
나설아가 아래쪽을 가리키며 노기등등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이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건 너와는 무관한 일이니 그렇게 노발대발 할 거 없어. 넌 끼어들 자격도, 이유도 없으니까.”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운남종에서 우리 아버지를 납치했어. 큰 형은 불구가 됐고, 그리고 이씨 기문 사람들은 개돼지 마냥 학살당했지. 이런 일을 당하고서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이준의 메마른 목소리에 나설아의 눈에 순간 살기가 돌았다.
“거짓말 하지마. 운남종이 그런 일을 벌였을 리가 없어.”
“네 스승이 곁에 있으니 직접 물어보지 그래? 네가 그렇게 도 자랑스럽게 여기던 운남종이 지난 동안 무슨 짓을 해왔는지 알 수 있을 걸.”
이에 나설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곁 있던 진율희를 바라봤다. 스승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도 뒤늦게 알았단다…스승님이 벌인 일이야…….”
스승의 한마디에 나설아는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어째서 대운남종이, 이씨 가문처럼 미미한 가문 하나를 처참하게 짓밟았단 말인가?
“그리고 스승님이 이준의 손에 쓰러진 뒤…악마가 스승님의 영혼을 빼앗아갔어. 다른 장로들도…그 괴물에게 영혼을 빼앗겼어.”
이어지는 진율희의 말에 나설아는 또 다시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승님…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왜…운남종이 이씨 가문을…그리고 영혼을 빼앗기다니요?”
“나중에 다 얘기해주마. 지금은 운남종 장로들 영혼을 집어삼킨 저 놈에게 복수해야 해! 지금은 너와 내가 힘을 합쳐 저 괴물을 쓰러뜨리는게 우선이야.”
“네…! 알겠습니다.”
갑자기 마주한 상황에 아직 어리둥절한 상태였지만, 나설아는 스승의 말에 따라 곧바로 염력을 끌어올렸고, 이에 진율희는 곧바로 손을 들어 광장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흰색의 에너지를 한곳으로 집결시켰다.
곧이어 진율희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이자, 남은 세 명의 운남종 장로들이 황급히 구름바다에서 날아오르며 두 손을 휘둘렀고, 이에 따라 하얀 안개가 거세게 뒤흔들리며 그 중심에서부터 거대한 힘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요동치던 구름은 종주의 명에 따라 순식간에 거대한 검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거대한 검 위로는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검신 전체에서 세찬 에너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악마 같은 놈. 죽어라!”
살기등등한 고함 소리와 함께 구름 같은 모양의 검이 허공를 가르자, 공간이 뒤틀리며 허공에 떠있는 검은 형상을 향해 거대한 에너지가 날아갔다.
“킥킥. 이런 허술한 무기로 날 상대하려 하다니…”
하지만 도영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냉소를 지을 뿐 이었다. 곧이어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니 기이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백색 검의 칼날을 휘감았다.
검은 연기가 새하얀 검과 맞닿는 순간, 거대한 백색의 에너지 검은 마치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운남종의 모든 제자들의 힘이 한데 모인 일격이 허무하게 가로막히는 광경에 진율희와 나설아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젠장!”
그러나 진율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염력을 끌어 모을 것을 명했다.
“흥…”
새하얀 에너지가 다시 휘몰아치는 모습에 도영호는 귀찮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다시 온 몸에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었다.
다음 순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십 미터도 넘는 거대한 손바닥으로 변화해 응집되고 있는 백색의 안개를 향해 맹수처럼 날아들자, 새하얀 에너지 구름이 폭발하듯 찢어져 사방으로 흩날렸다.
“쿨럭…!”
그리고 구름이 깨지는 순간, 이를 지탱하고 있던 운남종 장로들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진율희와 나설아 역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빠르게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킥킥…너희들의 영혼부터 이씨 가문 영혼까지 모조리 먹어주마!”
순식간에 운남종의 종주와 장로들을 박살낸 도영호는 곧바로 이준과 약로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이에 약로와 이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영호의 실력은 약로와 크게 차이가 없었지만, 운산과 운남종 장로들의 영혼을 흡수한 그의 힘은 같은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제가 해볼게요!”
염력이 바닥난 이준이 이를 악물고 죽을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 하는 모습에 약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는 체념한 듯 달관한 듯 묘한 표정으로 제자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게 맡기고 넌 동해에게 가거라.
“스승님…”
“걱정 말거라. 저 괴물놈의 실력이 갑자기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약존을 쓰러뜨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노인이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제자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자, 부드러운 힘이 기진맥진한 상태의 이준의 몸을 동해에게로 날려 보냈고, 도영호의 눈동자에서는 또 다시 흉흉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흥, 너희는 전부 내 사냥감이라고 했을텐데!”
“내 영혼을 가져가려면 네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제자를 날려 보낸 뒤, 약로의 손바닥 위에서는 곧바로 백색의 화염이 솟구쳤다. 이글거리는 새하얀 불꽃 주위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글쎄. 목숨까지 걸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검은 투구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살기 어린 눈빛에 약로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갔고, 그의 몸에서는 전에 없이 강한 기운이 해일처럼 뿜어져 나왔다.
“킥킥.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이건가?”
약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도영호의 몸에서도 더욱 거대한 검은 안개가 피어 올랐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검은색 안개는 순식간에 거대한 먹구름이 되어 햇볕을 가렸고,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먹구름에 운남산 정상은 순식간에 밤처럼 어두워졌다.
다음 순간, 도영호의 몸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형상이 어디서 나타날지 쫓기에 바빴다. 자리에 있던 이들 중 도영호의 위치를 포착한 것은 단 한사람, 바로 약로였다.
새하얀 불꽃에 휩싸인 약로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퍽’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새카만 형상이 나타났다.
흑백의 두 주먹이 맞부딪히는 순간, 폭풍이 사방을 휩쓸고, 둔탁한 소리가 온 광장을 가득 메웠다. 두 개의 그림자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먼 곳에서 나타나기를 반복할 때 마다 광장 곳곳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폭발했다.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격돌하자, 온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조금씩 흩어지며 햇볕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