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2화. 최후의 일격
인원을 확인하던 은평강, 소미 그리고 광철의 안색은 동해보다도 훨씬 어두웠다. 이준 측에서 잃은 투왕은 모두 세 사람의 부하들이었기 때문이다.
“망할 운남종 새끼들!”
세 사람은 이를 갈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투왕은 그리 쉽게 길러지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세 명이나 되는 투왕을 잃은 것은 그들에게 있어 참으로 뼈 아픈 손실이었다.
“이준 쪽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반면, 다른 강자들과 달리 임동수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토록 참혹하고 위험천만한 전투는 생전 처음이었지만, 그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삶이란 이렇게 자극적이고 위험천만한 것이어야 했다. 이준을 따라 온 것이 자신의 짧은 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한편, 임동수의 곁에 있던 임수혁과 류지안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늘 천재로 추앙받던 둘이었지만, 오늘은 온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을 좌절시킨 것은 가철이나 동해, 운산과 같은 강자들이 아니라, 자신들보다 어린데도 투종 강자와 당당히 맞서고 있는 이준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내가 뭘 보고 있는거지?”
임수혁의 말투에는 허탈함과 좌절감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동해를 비롯한 이들이 한 곳에 뭉쳐 있을 때, 운남종의 장로들 역시 광장의 단상 쪽에 모여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약속이나 한 듯 진율희의 표정을 살폈다. 진율희는 현재 종주 자리에서 잠시 물러났지만 오랜 시간 운남종의 수장 역할을 해왔기에 만에 하나 운산이 잘못 된다면 그녀가 다시 종주 역할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쩌면 오늘 운산이라는 거목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퍼엉!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마침내 운산을 둘러싼 청색 소용돌이에 화련이 부딪혔고, 순간 거대한 불꽃이 온 천지를 뒤덮었다.
* * *
잠시 후, 천지를 뒤덮은 불꽃을 뚫고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거대한 화염 장벽을 넘어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운산과 이준이 아닌 도영호와 약로였다.
도영호의 몸을 휘감고 있던 검은 안개는 거의 다 흩어져버린 상태였고, 그의 온 몸은 까맣게 그을려 숯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만은 여전히 형형하게 기묘한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맞은 편의 약로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또렷했던 환영은 눈에 띄게 흐릿해져 있었고, 낯빛 역시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킬킬. 빌어먹을 노인네…몸 없이도 이렇게 오래 버틸 줄이야. 과연 약존이라는 이름이 허명이 아니구나.”
“내 영혼을 갖는 게 그리 쉬운 일일 줄 알았더냐.”
“끌끌끌…하지만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녀석의 영혼을 사로잡아 주군에게 바치고 말겠다.”
도영호의 말에 약로의 마음에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 역시 영혼의 궁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상대가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때, 먼 발치에서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을 뚫고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두 그림자의 주인은 역시나 이 전쟁의 주인공인 이준과 운산이었다.
하지만 앞선 두 사람과 달리 이준과 운산 두 사람은 불꽃을 뚫고 나오자마자 곧바로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두 사람 모두 무지막지한 힘의 충돌로 인해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중 한 사람의 몸이 꿈틀대더니 서서히 균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곧이어 추락하던 그림자의 등 뒤에서 청록색의 날개가 펼쳐지자, 동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준이다! 이준이야!”
아준은 날개를 펴자마자 아래로 추락하는 운산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몸에는 이미 염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상대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죽어!”
하지만 이준의 주먹이 청록색의 화염에 휩싸이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귓등을 때렸다.
“이준! 그만 둬!”
진율희의 간절한 목소리에 이준의 주먹은 그만 갈피를 잃고 말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아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진율희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무수한 시선이 일제히 공중에 있는 청년에게로 고정됐다.
동해를 비롯한 이들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발을 굴렀다. 운산을 끝장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결국 참다 못한 동해가 이준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동생! 지금 끝장을 내야 하네!”
“어서 놈의 숨통을 끊어!”
동해 곁에 서있던 가철 역시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전쟁은 황실을 비롯해 삼대가문에게 있어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으니, 그들 역시 이준 못지 않게 절박했다.
약로 역시도 눈을 반짝이며 제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약로는 흥분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은 채 그저 조용히 준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리고 진율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이준의 눈에 다시 살기가 돌았다.
“안돼!”
다시 한번 진율희의 목소리가 준의 귓등을 때렸다. 하지만 이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과거에 그녀 덕에 목숨을 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한 때 그녀를 누이처럼 생각했던 것도…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 어떠한 마음도 아버지와 가문 사람들의 목숨과 바꿀만큼 귀하지는 않았다.
콰직!
다음 순간, 이준의 주먹이 운산의 가슴팍에 세차게 내리 꽂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우둑!
사력을 다한 공격에 이준의 주먹에서도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직!
하지만 이준은 멈추지 않았다.
“개새끼. 이건 내 아버지 몫이다!”
“이건 우리 이씨 가문 몫!”
“이건 내 둘째 형의 수명을 빼앗은 몫!”
“이건 내 첫째 형을 불구로 만든 몫!”
주먹을 휘두를 때 마다 등줄기가 저릿해질 정도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청록색의 화염에 둘러싸인 주먹을 휘둘러댔다. 그의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크고 둔탁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쿨럭!”
미친 듯이 쏟아지는 공세에 운산의 가슴이 움푹 패이고, 입에서는 연신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이준은 미친 사람마냥 더욱 세차게 주먹을 휘둘러댈 뿐 이었다.
운산이 처참한 모습으로 피를 토해내는 모습에 동해와 가철 등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이제 운남종도 끝장이군…”
가철은 허탈한 듯하면서도 환희에 찬 기묘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퍽!
또 한 차례의 강력한 공격이 운산의 움푹 들어간 가슴을 향해 내리 꽂혔다. 이준은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운산의 가슴을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그의 손목 부분은 이미 뼈가 부러지고 인대가 끊어진지 오래였다.
운산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미약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미친 사람마냥 그의 가슴을 내리치던 이준은 어느 순간 갑자기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기력을 쏟아낸 이준의 몸은 결국 운산을 따라 지상으로 힘 없이 추락했다.
* * *
파앗—
이준의 몸이 땅 위에 쳐박히려는 찰나, 인영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와 그를 받아들었다.
희미해져가는 이준의 시야에 비춘 것은 아버지만큼이나 익숙한 얼굴을 한 노인이었다.
“스승님, 제가 해냈어요!”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애써 미소 짓는 제자의 모습에 약로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완전히 뭉개진 제자의 주먹을 움켜잡았다.
“에잉…이놈아. 이래서야 몇 달은 요양 해야겠구나.”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만큼 지친 상태였지만, 이준은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애써 붙잡으며 몸을 일으키려 발악했다.
“어서, 저 녀석의 시체를 가져가야 해요. 투종 강자의 뼈를……”
제자의 말에 약로는 잠시 멈칫 하더니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킥킥. 약로, 당신이 한 발 늦은 것 같은데 어쩌나……”
그 때, 시커먼 안개가 운산의 시신 옆으로 날아들었다. 도영호는 잽싸게 운산의 시신을 집어든 뒤 음산한 웃음을 흘려댔다.
“혼귀 지옥!”
그 순간 운산의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 나와 검은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가더니, 이내 그 안에서 뼈를 씹어먹는듯한 섬뜩한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속에서 들려오는 기묘하고도 끔찍한 소리에 광장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 앉았다.
운남종의 장로들은 혼이 빠져 나간 사람마냥 종주의 시신을 바라보며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광장 안에는 오로지 뼈를 씹어먹는듯한 오싹한 소리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준은 아득해져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연금비약 한 알을 꺼내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저 녀석이 운산의 영혼을 삼켰구나…”
약로의 표정은 도영호와 대결을 펼칠 때 보다도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검은 안개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 역시 검은 안개 속에서 풍겨져 나오는 도영호의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영혼의 궁전의 놈들이 그토록 강한 것은 모두 강자의 영혼을 삼켜 자기 힘을 증식시키기 때문이었단 말인가…”
“이제 어쩌면 좋죠?”
이준은 손목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지금은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운산의 영혼을 완전히 삼키지 못하게 해야지!”
그 순간 약로의 손에서 다시 한번 백색 화염이 치솟았다.
새하얀 불꽃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검은 안개에 부딪히자, 불꽃과 안개가 서로를 집어 삼키며 동시에 모습을 감췄다.
“킬킬. 약로. 겨우 이 정도 힘으로 우리를 상대하려 했단 말인가.”
잠시 후, 다시 한번 검은 안개에서부터 섬뜩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운산이 죽었으니 운남종도 이제 쓸모가 없겠군. 하지만 받을 건 받아야지!”
이어지는 도영호의 말에 운남종 장로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들은 도영호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날개를 펼쳤지만, 갑자기 사지가 마비된 듯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심장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네 이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
고통에 발버둥치는 장로들의 모습에 진율희의 목구멍에서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로들은 운남종의 크고 작은 기둥이었다. 운산을 잃은 마당에 장로들마저 잃게 된다면 운남종은 멸문을 피할 수 없었다.
순간 진율희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염력이 폭발했다. 운산이 죽자 그녀를 속박하던 봉인이 자연스레 사라진 것이다.
“킥킥킥. 우리의 힘을 빌려 쓴 덕에 3년 만에 이렇게 큰 성장을 이뤘지 않은가. 이제 대가를 치러야지.”
말을 마친 도영호가 검은 안개 속에서 손을 들어 올리자, 십 여명에 이르는 장로들의 몸이 일그러지며 그 안에서 영혼체가 빠져나와 검은 안개로 빨려 들어갔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처참한 광경에 진율희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르르 떨렸다.
“장로들의 영혼을 내놔라!”
“흥. 가소롭군.”
살기로 눈을 번뜩이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진율희를 바라보던 검은 안개 속의 도영호는 곧바로 상대를 향해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쇠사슬을 휘둘렀다.
하지만 진율희는 자신의 푸른 장검으로 도영호의 쇠사슬을 쳐낸 뒤, 번개처럼 몸을 날려 검은 안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쿵!
그 순간, 검은 안개가 꿈틀거리며 강렬한 파동이 일어나더니 진율희를 수 십 미터 뒤로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