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화. 바람의 손
여유만만한 태도로 이준의 공격을 막아내던 운산의 표정은 어느새 얼음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었고, 그의 입가에 내려 앉아있던 차가운 미소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의 가슴 팍에는 시뻘건 주먹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이놈이…제법이구나…”
곧이어 운산에게서 청색의 염력이 흘러나와 마치 액체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대하처럼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염력은 보석 같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공간에 파문을 일으켰다.
투종 강자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농밀한 에너지에 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넋이 나간 듯 손을 멈추고 운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광장에 있던 강자들은 한 눈에 상황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운산의 가슴팍에 남아있는 붉은 자국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비록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라 운산에게 공격을 성공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눈 앞의 청년이 수 십 년간 가한제국의 최강자 중 하나로 군림해오던 동해나 가철, 해길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있음을 의미했다.
“내가 갈 때까지 붙잡고만 있을 것이지 굳이 자극해서는…”
하지만 이 광경을 바라보는 동해의 얼굴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에게 일격을 허용한 운산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 때, 그의 앞으로 강렬한 돌풍과 함께 새하얀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휴.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길 바라는 수밖에…’
동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눈 앞의 상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 *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위압감에 이준의 얼굴 역시 무겁게 내려 앉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운산의 힘은 본원의 대장로 서천우보다 한 수 위였고, 메두사 정도나 되어야 그의 적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는 자신이 만나온 적들 중 명실상부한 최고의 투사였다. 이에 어떤 적을 만나도 자신감이 넘쳤던 이준마저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준이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자, 청록색의 불꽃이 혈관을 가로질로 체외로 쏟아져 나왔다.
상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신비한 불꽃을 본 운산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천지의 불꽃인가? 예전과는 조금 다르구나. 하지만 나를 꺾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것 같은데?”
이준은 운산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더욱 가열차게 온 몸에서 염력을 끌어냈다.
쉭-
그 때, 운산의 몸이 잔상을 남긴 채 사라졌다가 이준의 앞에 나타났다.
귀신과도 같은 상대의 움직임에 이준은 곧바로 검은 송곳을 휘두르며 상대를 떼어내려 했다.
챙!
그러나 운산은 피하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휘둘러 거대한 송곳을 막아낼 뿐 이었다.
그리고, 준이 자세를 바로 잡기도 전에, 운산의 손이 번개처럼 그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번개 같은 공세에 화들짝 놀란 이준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려 운산의 손을 뿌리쳤다.
쾅!
두 사람의 손이 맞부딪히는 순간, 운산의 손이 마치 독사처럼 이준의 주먹을 붙잡았고, 이내 날카로운 염력에 휩싸인 손톱이 이준의 살을 찢고 파고 들었다. 준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염력이 아니었으면 단숨에 손목이 잘려나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준은 갑작스레 밀려오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반대쪽 손으로 검은 송곳을 휘둘렀다.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드는 검은 송곳에 운산은 곧바로 준의 주먹을 잡은 손을 놓는 동시에 반대편 손으로 검을 막아내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시 상대의 가슴을 향해 손을 날렸다.
노도와도 같은 투종 강자의 공세 앞에 이준은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며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불과 몇 분 사이, 이준의 몸 곳곳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났고, 그의 입에서는 새빨간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국 노도처럼 몰아치는 공세를 버티다 못한 이준이 뒤로 몸을 날리자, 운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도 자신만만하게 쳐들어 왔길래 뭐 대단한게 있나 했더니, 그저 주제 파악도 안 되는 머저리의 객기일 뿐 이었구나.”
운산은 싸늘하게 웃으며 상대를 조롱했다. 하지만 이준은 계속되는 상대의 도발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검은 송곳에 염력을 불어넣을 뿐 이었다.
혈관을 타고 흐른 염력이 검은 송곳에 흘러 들어가자, 시커먼 검날이 청록색으로 물들며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번에는 무엇을 보여줄 생각이지?”
운산은 상대가 염력을 모으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그에 발맞춰 천천히 염력을 끌어올렸다.
마침내 검은 송곳이 완전히 청록색 불꽃에 휩싸이자, 고함 소리와 함께 이준이 몸을 날렸다.
“태양검!”
곧이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검 끝에서 거대한 청녹색 섬광이 폭발하며 운산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람의 손!”
이에 맞서 운산이 손을 휘두르자, 그의 손바닥에 있던 짙은 청색의 빛이 거대한 손바닥 모양을 만들어내며 청록색의 빛을 막아냈다.
쿠쿵—!
두 개의 빛이 맞부딪히는 찰나,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파문이 운남산 전체를 뒤덮었다.
“감히 나와 정면 승부를 벌일 생각을 해?”
상대가 한 치도 물러설 기색이 없다는 듯 염력을 쏟아내며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에 운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설령 이준이 모든 염력을 다 쏟아 붓는다 해도, 자신과 정면 승부를 벌이기에는 백 년은 일렀다.
“애송이, 투종 강자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냐, 네 실력을 과신하는 것이냐!”
그러나 운산이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열기가 폭발했다.
“이런…!”
깜짝 놀란 운산이 고개를 돌리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환영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쾅!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져 나오고,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은 운남산의 산봉우리처럼 굳건하던 운산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운산의 몸은 볼썽 사납게 수 십 미터나 아래로 떨어지다 어렵게 균형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운남종의 장로들이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이, 가철과 동해를 비롯한 강자들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마침내 그 신비한 스승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불의의 일격에 타격을 받은 운산은 갑자기 나타난 노인의 환영을 바라보며 광인처럼 눈을 빛냈다.
“저 자식의 몸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그게 당신이었나 보군.”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 운산의 입가에는 다시 예의 그 싸늘한 미소가 돌아왔다.
“영혼체 상태로도 그 정도 힘을 유지하다니, 실로 놀랍기 짝이 없군. 대비를 해두기를 잘했어.”
말을 마친 운산이 손을 들자, 운남종의 광장 위에 돌연 시커먼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안개에 약로의 몸을 휘감고 있던 백색 화염이 더욱 환한 빛을 내뿜었다.
“저게 뭐지?”
한편, 하늘을 뒤덮은 검은 안개에 운남종의 제자들 역시 놀란 듯 허공을 응시했다. 그들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반면, 동해를 비롯한 이준 측의 사람들의 얼굴에는 빠른 속도로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약로의 등장으로 우세를 점했다 생각했건만, 검은 안개에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 역시 약로의 그것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녀석은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나도 모르겠군.”
가철의 질문에 동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게 무엇이 됐든, 어서 이놈들을 정리하고 동생을 도우러 가야 하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군!”
동해의 한마디에 가철과 해길 등이 일제히 자신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운남종의 장로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큭큭. 약로, 네가 직접 나타날 줄이야.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와주니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군.”
“네 놈 따위가 날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검은 안개속의 사내가 음침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오자, 약로가 코웃음을 치며 염력을 끌어 올렸다.
“육체가 있다면 모르지만, 겨우 영혼체가 아니던가?”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동시에 검은 안개가 점점 수축하며 사람의 형상으로 변화하더니, 이내 섬칫한 붉은 색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을 발했다.
“역시 내가 예상한대로 운남종과 영혼의 궁전 놈들이 손을 잡았구나. 일이 어렵게 되었다. 지금 내 힘으로는 저 자를 상대하는게 고작일게다.”
“걱정마세요. 운산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스승의 표정에 준의 얼굴 역시 덩달아 굳어졌다. 하지만 이는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스승과 제자 둘 중 그 누구도 물러서려는 마음을 먹지는 않았다.
“도영호. 약로는 자네에게 부탁하네.”
“그러지.”
운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영호가 이준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저 녀석을 죽여서는 안돼. 우리에게는 반드시 그 물건이 필요하네.”
이에 운산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게. 숨을 붙여 놓을 테니까.”
‘우리 가문의 물건이 필요하다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준의 머릿속에 순간 ‘태령황제의 옥’이 스쳤다. 설마 이 모든 것이 그 물건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말인가?
말을 마친 도영호가 천천히 손을 들어 검은 사슬을 끌어 당기자, 음침한 빛을 띤 사슬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몸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도영호의 동작을 지켜보던 약로는 곧바로 백색 화염을 내뿜으며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흑백의 두 그림자가 맞부딪히는 순간, 운산의 시선이 다시 이준을 향했다.
“자, 다시 시작해볼까?”
촤르륵!
검정 쇠사슬이 독사처럼 허공을 뚫고 검은 선이 되어 약로를 향해 날아갔다.
쇠사슬은 뾰족하고 날카로웠으며, 가장 날카로운 끝 부분에는 기이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동그란 사슬에 도영호가 염력을 불어넣자, 사악한 기운이 독기처럼 스며 나왔다.
영혼의 궁전은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어 영혼체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으니, 제 아무리 약로라 해도 도영호를 상대로 여유가 있을리 만무했다. 하지만 약로에게는 얼음 불꽃의 정수가 있었으니, 영혼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저항할 수단이 있었다.
도영호가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 사슬을 휘두르는 순간, 약로의 손바닥에서 폭발한 하얀 화염이 날카로운 불꽃 화살이 되어 검정 쇠사슬을 막아냈다.
쾅!
백색 화염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쇠사슬을 막아내자, 도영호의 붉은 색 눈동자가 더욱 형형하게 빛을 발했다.
“영혼의 궁전에서 달아날 수 있었던 것이 이 불꽃 덕분이었군.”
튕겨 나온 쇠사슬은 다시 주인의 곁으로 돌아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도영호의 곁을 맴돌았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약로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다시 한번 백색 화염을 더욱 크게 피워올렸다. 곧이어 약로가 말없이 주먹을 쥐자, 거대한 화염이 단단하게 응집되며 이준의 검은 송곳과 비슷한 크기의 대검으로 변화했다.
약로가 만들어낸 백색의 대검에서는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검에 닿는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불타 흔적도 없어 사라지고 있었다.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이에 도영호는 잠시 그 백색의 대검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말없이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서 세 갈래의 그림자가 나타나 마치 세 마리의 독사처럼 그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