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9화. 운산과의 결전
광장 위에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던 고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고개를 들어 공중에 떠 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토해냈다.
“큭큭…좋아 자네가 이겼어.”
고하가 자기 입으로 패배를 인정하가, 광장에 또 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 앉았다.
“오늘 자네와 운남종 일에는 끼어들지 않도록 하지.”
고하는 마치 모든 것을 놓아버린 사람마냥 허탈하게 웃으며 단상 아래쪽에 있는 진율희를 바라봤다.
한참동안 진율희를 바라보던 고하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운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운산 종주님, 오늘 제 능력 부족으로 인해 종주님에게 큰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야하니, 이제 더는 두 분의 일에 끼어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혼사는 물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고하는 그 말을 끝으로 힘없이 몸을 돌려 터덜터덜 광장을 떠났고, 이에 광장 안의 분위기가 한겨울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멍청한 놈! 할 줄 아는 건 연금술뿐이지. 머리는 돌대가리였어.’
이 모습을 바라보던 운산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와서 고하를 욕한다면 고하마저 적으로 돌릴지도 모를 일이니, 차마 어떠한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이준. 대단하군. 3년 만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되고 말았어.”
“드디어 움직이려는 건가?”
마침내 운산이 몸을 일으키자, 이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지만 겨우 그 정도가 다라면, 오늘 살아서 운남산을 나가지 못 할 것이다.”
말을 마친 운산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염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주위에 있던 모든 강자들은 이제부터 진정한 사투가 벌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운남종의 제자들에게 명한다.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침입자들 중 그 누구도 살아서 운남산을 빠져나가지 못 하도록 해라!”
운산의 섬뜩한 외침에 운남산 정상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자, 낙엽 굴러다니는 소리가 칼날처럼 솟은 산봉우리에 스산한 느낌을 보탰다.
운남종 곳곳에서 운산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로들은 종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등 뒤의 염력 날개를 펼쳤고, 손을 휘둘러 날카로운 무기를 소환해낸 뒤 곧바로 이준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공중에 있던 이준은 운산과 눈이 마주치자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고함을 쳐댔다.
“운산, 너 때문에 아버지가 실종 됐고, 이씨 가문이 무너졌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 놈만은 용서하지 못 한다!”
“하아…몇 번을 말해야겠나. 네 아비는 내 쪽에 없다. 내 손에 있었다면 운남종에 대적한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주었을텐데…나로써도 아쉽군.”
“네 쪽에 없다고?”
운산의 의미심장한 말투에 무언가를 눈치 챈 이준의 얼굴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이 개자식. 아버지의 실종에 대해 뭔가 알고 있군! 그 때 분명 운남종과는 무관하다고 하지 않았나!”
스승의 말투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은 진율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스승님이…벌이신 일인가요?”
이를 악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진율희의 모습에 운산의 목소리에도 분노가 묻어났다.
“진율희! 지금 운남종을 없애버리겠다고 쳐들어 온 적의 편을 들겠다는 것이냐!?”
이어지는 스승의 말에 진율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3년 전, 정말로 운남종은 이한의 일과 무관하다며 큰 소리를 쳐댔던 자신의 모습이 머리를 스치자,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 대운남종이 손바닥만한 가문의 가주를 납치하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댈 수 있단 말인가.
“내 아버지가 운남종이 아니면 대체 어디 계시단 말이야?”
이준이 눈썹을 꿈틀대며 아까보다 훨씬 싸늘해진 말투로 말했다.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장소에 말이지.”
운산의 대답에 이준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말하는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영혼의 궁전이군.”
이어지는 이준의 한마디에 운산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갔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네 몸 속에 있는 영혼체가 가르쳐 줬나?”
운산의 답변에 이준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변해갔다. 운산이 약로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약로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가 영혼의 궁전과 모종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대답은 들은 걸로 하지.”
말을 마친 이준의 몸에서 청록색의 염력이 순간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이에 맞서 운산의 몸에서도 대하와도 같은 염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듣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네 아비보다 네 목숨이나 걱정하는게 좋을텐데?”
운산이 손을 휘두르자, 운남종의 장로들이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 가철을 비롯한 이준의 동맹들을 둘러쌌다.
“저 녀석들끼리 연합하게 해선 안돼! 가자!”
그 순간 동해가 새하얀 얼음조각을 휘날리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준이 만들어준 연금비약 덕에 전성기 시절의 실력을 되찾은 그의 몸에서는 실로 ‘얼음왕’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곧이어 운남종의 장로 하나가 동해의 앞을 막아섰다.
얼음왕의 선공을 신호로 가철, 해길, 은평강, 보람 등이 뒤따라 붙으며 본격적인 혈전의 시작을 알렸다.
“죽여!”
동해를 비롯한 이들의 공세에 운남종의 장로들 역시 독기 품은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세차게 돌진했다.
쾅! 쾅!
두 무리의 에너지가 공중에서 뒤엉키자, 뇌성이 울려퍼지며 온 하늘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한편, 수 십명의 강자들이 뒤엉켜 맞붙고 있는 곳의 반대편에서는 투종 강자 하나가 계단을 오르듯 허공을 걸어 오르고 있었다. 투종 강자는 염력 날개를 사용하지 않아도 하늘을 평지처럼 다닐 수 있었고, 날개가 없는만큼 허공에서도 더욱 부드럽고 유연하게, 그리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3년 전에는 여길 빠져나가게 두었지만, 오늘은 다를 것이다.”
“당신과 마음이 맞다니. 기분이 묘하군. 나도 오늘 당신을 살려 보낼 마음이 없거든.”
가시 돋친 이준의 답변에 운산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3년 사이에 입심이 많이 늘었구나. 어디 실력도 그만큼 늘었는지 한번 볼까?”
곧이어 운산의 손에서 짙은 청색의 염력이 피어올랐다. 그의 몸속에서 쏟아져 나온 청색 염력은 준의 「청연의 불꽃」이 압축된 듯 단단하고 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투종 강자의 몸에서 새어 나온 염력이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리자, 이준은 곧바로 이를 악물고 빠른 속도로 염력을 끌어올렸다.
“천계의 불꽃…”
그 순간, 이준의 염력이 무시무시하게 치솟기 시작했고, 운산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내려 앉았다.
“비술인가…? 고작 그딴 것을 믿고 이 운산에게 대적했단 말이냐. 비술을 써봐야 고작 투황급이 아니더냐…”
구름 불꽃과 대지의 불꽃, 두 불꽃을 결합하는데 성공한 이래, 이준은 단 한 번도 천계의 불꽃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이준이 투령 계급이던 당시, 그는 이 비술을 이용해 류지안과 임수혁 같은 투령 최고단계, 심지어는 투왕 강자와도 싸울 수 있었다. 게다가 천계의 불꽃은 시전자가 가진 불꽃의 위력에 따라 그 효과가 증폭되는 비술이었으니, 지금 그는 비술을 통해 단숨에 4,5성급 투황과 맞먹는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여기에 더욱 강력해진 「불개」와 강력한 무투기, 청연의 불꽃까지 더하면 그의 실력은 실로 최상급 투황 강자에 맞서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구부리자, 거대한 검은 송곳이 그의 손바닥에 나타났다. 이미 수년의 수련을 거친 지금, 검은 송곳의 무게나 염력을 제약하는 효과 따위는 그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준비를 마친 준은 예상과 달리 곧바로 운산에게 달려들지 않고 천천히 염력을 회전시키며 가만히 상대를 노려볼 뿐 이었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운산 역시 자신만만한 말투와는 달리 신중한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천천히 염력을 운용했다.
그의 옷자락은 마치 철판처럼 단단하게 변해 있었다. 진정한 투종 강자라면, 자신의 염력을 불어넣어 머리카락 한 올 조차 날카로운 검처럼 사용할 수 있었으니, 지금 그의 옷은 세상 그 어떤 보물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갑옷이 되어 있었다.
귀청을 때리는 폭음을 배경삼아, 두 강자는 한마디 말조차 없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바위처럼 서 있었다.
먼저 손을 쓴 것은 운산이었다.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폭풍이 검은 송곳을 강타했다.
청색의 염력과 칠흑 같은 송곳이 부딪히는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주위의 공간이 뒤틀리며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운산이 재차 공격을 퍼부으려는 찰나, 이준의 몸이 귀신처럼 사라졌다가 수 십 걸음이나 뒤에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곧이어 이준의 등 뒤에서 까만 보랏빛이 뿜어져 나오며 청록색 날개 안에 검보랏빛 날개가 생겨났다.
이준이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았던 보라색 날개였다. 그가 투왕 계급에 들어선 뒤로 사용한 염력 날개는 보라색 날개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를 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전에 없이 강력한 상대를 만난 이준은 두 개의 날개를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이는 운산에 맞서 그가 준비한 새로운 카드 중 하나였다.
물론 정상적인 염력날개와 비행 무투기인 「매의 날개」를 조합하는 것은 엄청난 염력을 필요로 했으니, 이는 매우 위험한 도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개의 날개에 「번개의 춤」이 더해지자, 이준의 속도는 투종 강자라 해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운산 역시 지금 이준의 속도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꿰뚫어 본 듯, 검보랏빛 날개 위에 덧씌워진 청록색의 날개를 보는 순간 여유만만하던 표정이 돌처럼 변해버렸다.
그리고 운산이 무언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이준의 몸이 사라졌다가 운산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죽어!”
곧이어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송곳이 수직으로 떨어지며 무시무시한 힘으로 상대의 머리 위를 짓눌렀다.
“속도는 괜찮군. 하지만 이 정도 힘으론 턱없이 부족해!”
운산이 주먹을 휘두르자, 허공 위에 거대한 파문이 일며 검은 송곳에 맞부딪혔다.
콰앙!
그리고 다음 순간, 또 다시 공간이 일그러지며 묵직한 염력이 칠흑 같은 송곳을 강타했다.
잇달아 날아오는 투종의 강렬한 공격 앞에 끝내 이준의 오른손이 검은 송곳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운산의 입가에 막 싸늘한 미소가 번지려는 순간, 이준의 주먹에서 활화산 같은 기운이 폭발하며 운산을 덮쳤다.
“태초의 힘!”
상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운산은 곧바로 염력을 모아 자신의 가슴 앞에 짙은 청색의 염력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치익!
그러자, 이준의 힘이 늪에 빠진 듯 청색의 염력 안으로 조용히 흡수되었다.
“3년 전과 똑같은 기술이구나…”
당황한 이준을 보며 운산의 입가에는 또 다시 싸늘한 미소가 내려 앉았다.
“똑같은 수에 또 당하게 될 거다.”
하지만 이준이 손목을 비트는 찰나, 청색의 염력 덩어리가 크게 요동치며 폭발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