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8화. 운산
투종 강자가 박장대소하며 웃어대자 운남산 곳곳에서 바람 소리가 울려퍼지며 운남산 곳곳에 숨어있던 장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단상 아래에 있던 고하는 이준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줄곧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줄곧 시체처럼 무표정하던 율희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것을 발견하자, 그의 얼굴이 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준, 남의 혼례를 이딴 식으로 망치다니, 그것도 감히 나 단왕 고하의 혼례를!”
광장에서 들려오는 분노에 찬 목소리에 이준의 시선이 고하와 율희에게로 향했다.
“흥, 네 놈에게나 혼례고 네 놈에게나 경사겠지. 그게 아니라면 새신부의 얼굴이 왜 그 모양이지?”
이준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곧바로 운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운산, 꼬리를 말고 도망친 개 한 마리가 돌아오는게 무서워서 제자를 팔아먹어? 당신 참 대단한 스승이군.”
이준의 조롱에 운산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살기로 눈을 빛냈다.
“널 살려 보내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네놈을 붙잡아 사지를 찢어 죽인 뒤 네 놈의 몸과 이씨 가문 버러지들의 몸을 고깃덩이로 만들어 감히 운남종에 대적하려는 모든 자들에게 보내주지. 그럼 더 이상 누구도 운남종에게 저항하지 못 하겠지.”
“종주, 이 일은 제게 맡기시죠.”
그 때, 운산의 말을 듣고 있던 고하가 갑자기 몸을 날리며 말했다.
“아니, 새 신랑이 경사스러운 날에 몸에 피를 묻혀서야 쓰겠나. 저 녀석은 내가 책임지고 고깃덩어리로 만들어주겠네.”
운산은 이준과 고하를 맞붙이고 싶지 않은 듯 했지만, 이미 머리 끝까지 성이 난 고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진 종주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습니다.”
고하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운산은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이준, 일단 오늘은 경사스러운 일이니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없던 일로 해주겠네. 하지만 계속 방해하려 든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
“고하, 당신이야말로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없던 일로 해주지.”
이준의 답변에 고하는 차갑게 웃으며 곧바로 자신의 보라색 날개를 펼쳤다.
그 순간, 이준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새어나왔다.
“열 수 안에 당신을 이기지 못 하면 내가 여길 떠나지. 하지만 열 수 안에 나에게 패배한다면 당신이 이 곳을 떠나.”
열 수 안에 투황인 고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가한제국 내에 오직 하나, 투종인 운산 뿐 이었으니,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그리고 이준의 이 정신 나간 제안에 고하가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좋아. 약속하지.”
고하의 웃음소리와 함께 광장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가철을 비롯한 이준의 동맹들 역시 이준의 제안에 귀를 의심했다.
제 아무리 실력이 늘었다고 하더라도 열 수 안에 고하를 쓰러뜨리다니, 이는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가한 제국 내에서 운산 다음 가는 강자라는 가철조차 감히 고하를 상대로 열 수 안에 승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황실의 십만 대군이 운남산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이 와중에, 이준이 내기에서 패배해 정말로 물러서기라도 한다면 정말이지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었다.
“이준, 조심하게, 고하는 3년 사이 투황으로 승급했네. 게다가 천지의 불꽃은 아니더라도 제법 강력한 불꽃을 가지고 있어!”
해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충고하자, 이준은 또 다시 피식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모습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운산과 가철, 해길 등은 두 사람을 내버려둔 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두 사람이 하늘 위에서 대치하자, 광장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준이 엄청난 강자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은 자리에 있는 자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실력을 직접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하를 열 수 안에 꺾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니, 자리에 있던 이들 중 대부분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어디 네 놈이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지 보자.”
곧이어 서늘한 한마디와 함께 고하의 몸에서 보라색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지.”
이에 이준은 고하를 향해 검은 송곳을 들어 올리며 또 다시 피식 웃음을 지어댔다.
자신을 향해 연신 비웃음을 날리는 이준의 모습에 고하의 손에 들린 보라색 화염 장검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단왕의 등 뒤에 솟아난 보라색 날개가 펄럭이더니 이내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의 코앞에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챙!
곧이어 검은 송곳과 보라색 장검이 교차하며 허공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쉭—
첫 공격이 막히자 고하는 손목을 비틀었고, 이에 날카로운 장검이 독사처럼 몸을 뒤틀며 이준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챙!
그러나 두 번째에도 그의 장검은 검은 송곳에 막히고 말았다.
두 번째 공격마저 가볍게 막아낸 이준은 곧바로 고하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고하는 몸을 틀어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다시 장검을 들었다.
“화염비!”
그 순간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그의 장검에서 환영이 피어올라 이준의 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방금 사용한 검술 무투기 하나로도 고하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투황 중에서도 그의 상대가 될 자가 몇이나 될지 감히 말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불꽃의 힘까지 더해진 탓에 무투기의 위력은 몇 배나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준은 침착한 표정으로 불타는 검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손을 움직여 검은 송곳을 들어올렸다.
치익! 치익!
보라색 불꽃에 맞서 검은 송곳에서 솟아난 청록색 염력이 춤을 추자,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왔다.
검은 송곳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에너지를 감지한 고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장검을 내리치며 이준을 향해 불꽃을 쏘아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검은 송곳이 몇 번 허공을 가르자 그의 불꽃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자신의 공세가 너무나 손쉽게 막히는 모습에 고하 역시 당황한 듯 하였으나, 그는 침착하게 손을 뻗어 다음 수를 펼쳤다.
쾅!
두 연금술사의 손바닥이 부딪히자, 또 다시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단왕과 손을 마주한 찰나, 준은 상대가 3성 수준의 투황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라색 불꽃의 힘을 합친다고 해봤자 고작 4,5성 투황.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준, 벌써 두 수 밖에 남지 않았다.”
고하는 자신의 보라색 불꽃 날개를 펄럭이며 이준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
짧은 시간에 여덟 번을 겨뤘지만, 상대의 실력이 자신보다 우위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고, 이에 고하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준은 또 다시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피식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그렇군. 그런데 왜 그렇게 기뻐하지? 설마 내가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준의 말을 들은 고하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상대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자신을 무시하는 듯 말끝마다 기분 나쁜 웃음을 덧붙이고 있었다.
언제나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던 그에게 이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하하하하! 좋아 그럼 남은 두 수 만에 그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게!”
고하는 가슴속 가득 차오르는 짜증을 애써 억누르며 여유로운 척 웃음을 터뜨린 뒤 자신의 다섯 손가락을 오므려 기이한 발톱 같은 형상을 취했다. 곧이어 그의 손바닥에서 보라색 화염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상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이준 역시 곧바로 자세를 바로 잡고 염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이준의 발치에서 은색 섬광이 번쩍이며 가느다란 뇌성이 사람들의 고막을 때렸다.
은색 섬광과 함께 자취를 감춘 이준의 모습에 광장에 있던 이들은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이들 대부분은 사방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이준의 모습을 찾지 못 했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장 나와!”
하지만 고하는 빼어난 영혼 탐지능력으로 순식간에 이준의 위치를 파악한 뒤 곧바로 손을 뻗어 날카로운 원기를 날렸다.
날카로운 발톱이 허공을 가르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하의 발톱에 걸려 나온 청년은 두 손을 모은 채 개구리처럼 입이 부푼 상태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황금사자의 포효!”
크릉-
곧이어 고막을 찢을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거대한 파문이 일며 투왕급 이하의 투사들 중 몇 몇이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어지간한 투왕급 강자들조차 잠시 현기증을 느낄 정도의 소리였다.
고하 역시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하는 정신이 들자마자 곧바로 미친 듯이 체내의 염력을 온 몸 곳곳으로 퍼뜨렸다. 이 정도 강자들 사이에서 1,2초 동안 정신을 잃는 것은 승패와 직결되고도 남았다.
다음 순간, 고하의 손바닥 위에 보라색의 독수리가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이준의 팔 위에도 청록색의 불꽃이 치솟았다.
“불꽃 수리!”
이준의 주먹에 응집된 막대한 에너지를 감지한 고하가 잽싸게 공격을 펼치자, 보라색 독수리가 순식간에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며 상대를 덮쳤다.
보랏빛 독수리에서 쏟아지는 에너지에 동해를 비롯한 투황급 강자들마저 안색이 일그러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준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채 팔을 휘감고 있던 불꽃을 자신의 주먹으로 응집시켰다.
“마지막 한 수다!”
콰—앙!
마침내 보라색의 독수리와 청록색의 불꽃이 부딪히는 순간, 몇 백 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퍼져나갔다.
거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새파란 하늘 위에는 보라색 화염이 가득했고, 그 중심부에는 청록색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곧이어 기이한 청록색의 불꽃이 가볍게 흔들리며 격렬한 에너지를 쏟아내기 시작하자, 그 주위를 감싼 보라색 불꽃이 끓는 기름에 던져진 얼음 마냥 순식간에 폭발해 사라졌다.
보라색 불꽃을 날려버린 청록색 불꽃은 순식간에 그 뒤에 있던 그림자를 덮쳤고, 눈 깜짝할 사이에 보라색 날개가 산산이 부서지며 고하의 몸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 * *
바닥으로 떨어진 고하의 안색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시체처럼 쓰러진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 하는 고하의 모습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하늘 위에 있는 이준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청년이 열 수만에 투황 강자인 고하를 때려 눕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심지어 가철과 동해 역시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 공격은 얼음왕과 황실의 수호자라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정말로 고하를 쓰러뜨리다니, 허허…그래도 저 자 성격에 패배를 부인하고 다시 달려들지는 않겠지. 큰 짐을 덜었군.”
동해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 역시 염력 소모가 클 텐데…연금비약 덕분에 비교적 빨리 염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는 해도 운산이 그걸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가철은 걱정스러운 듯 이준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자네들은 운남종 장로들을 막아주게. 절대 그들이 합동 공격을 펼치게 놔둬선 안돼. 운산은 이준의 말대로 그가 직접 상대하게 두자고.”
“한 사람이서 운산을 상대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연금술사 협회의 부회장인 최평은 불안한 표정으로 동해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걱정 말게. 이준에게는 괴물 같은 스승이 있다는 걸 잊었나? 게다가 정 힘들어 보인다면 가 장로와 내가 수호 마수를 데리고 힘을 보태겠네.”
그러자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철이 한마디를 보탰다.
“좋아. 전쟁이 시작되면 내가 신호를 보내지. 산 밑에 있는 황군은 초아가 직접 지휘할 거야.”
가철의 제안에 동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 늙다리 녀석을 처리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