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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336화 (336/818)

제336화. 황실의 마수

깊은 밤이 찾아오고, 운남산 위에 어둠이 내려앉자, 반딧불이 같은 등불이 곳곳에서 피어오르며 이내 주위를 환히 밝히기 시작했다.

운남종 정상의 거대한 대전 안에서는 백의의 여인 하나가 이를 악물고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숨어 계시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시죠!”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시선을 대문으로 돌리자, 어둠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운산님 때문에 염력이 봉인되어 있어도 탐지 능력만큼은 살아있는 모양이군요.”

“흥, 운남종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이용해 스승님과 몰래 혼담을 성사시키다니, 정말 이런다고 해서 나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칼날처럼 날카로운 율희의 한마디에 고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저와 상관없습니다. 전부 운산님의 제안이지요.”

“그쪽이 거절하면 될 일 아닌가요?”

“운산님이 먼저 그런 제안을 하셨는데 제가 거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십니까? 진 종주님께서도 제 마음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은 좋은 동료예요. 하지만…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스승님의 청을 거절해 주세요.”

율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잠시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고하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준 그 녀석 때문 아닙니까?”

고하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율희의 얼굴이 또 다시 싸늘하게 굳어갔다.

“흥, 허튼 소리 마세요!”

“운산님께서 진 종주님과 이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시더군요. 만일 그 놈에게 마음이 없다면 왜 타르 사막에서 그 놈을 도와주었단 말입니까!”

따지는 듯한 고하의 한마디에 율희는 더욱 불쾌하다는 듯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흥, 마치 제가 그 아이 때문에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는군요. 그것과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요! 나는 당신과 혼례를 올리고 싶지 않아요!”

“흥, 대답을 피하시는군요. 정말로 그딴 애송이에게 마음을 주신 것 입니까?”

고하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추궁하자, 진율희는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두드려대며 한탄하듯 말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내 마음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나요? 좋아요. 한번 해보시죠. 제 시체와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면 말이에요.”

“지금…뭐라고 하셨습니까! 겨우 그 딴 자식 하나 때문에…!”

율희의 단호한 태도에 순간 고하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흥, 아무리 말을 해도 믿질 않으시니, 편할 대로 생각하세요. 어째서 그 아이만 아니면 제가 당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제발 저를 그만 괴롭히세요. 단왕 고하라면 얼마든지 좋은 혼처를 구할 수 있을 텐데, 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흥, 그래! 당신 말대로 나는 단왕 고하야! 그런데 왜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인 거지?”

미친 사람마냥 소리를 질러대는 고하의 태도에 율희의 입에서는 묵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포기한 듯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감았다.

이에 고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리를 감싸 쥔 채 대전 안을 서성이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준이 가한제국으로 돌아온 게 사실이라고 하더군요.”

이준의 이름이 언급되자, 율희의 시선이 곧바로 고하를 향했다.

자신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고하는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군인지 뭔지를 제법 데리고 돌아왔다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운남종과 운산님에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하겠지요. 그건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당신은 운남종의 종주였으니까요.”

고하의 말 대로였다. 지금의 운남종은 가한제국 전체를 능히 쓸어버리고도 남을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준이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3년 사이에 지금의 운남종을 쓰러뜨릴만한 실력을 갖출 수는 없었다.

곧이어 진율희가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자, 고하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후우…종주님 말대로, 종주와 그 놈이 무슨 사이인지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 상황으로 보아 그놈이 살아서 가한제국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 정도는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운산님에게 당신의 봉인을 풀어달라고 부탁해보겠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율희의 모습에 고하는 머리를 숙인 채 터덜터덜 대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쉬시죠…그리고…요즈음 생사의 관문에서 기이한 파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더군요.”

고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처음으로 율희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설아가 드디어 나오는 구나…”

아궁이처럼 달아오른 밀실에 놓인 붉은 약솥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끝도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이준은 그 앞에 선채 청록색 불꽃 안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마름모꼴의 연금 비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연금비약 달구기를 30분, 진한 약향과 함께 약솥 안에서 미세한 파동이 퍼져 나오더니 이내 약솥의 벽면에 연금비약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점점 짙어져가는 약향을 음미하고 있던 준이 잽싸게 약솥의 뚜껑을 열자, 청색 연금비약이 솥 안에서부터 튀어 올라 그의 손바닥 위로 안착했다.

사실「혼의 구슬」은 6레벨 연금비약 중 그리 상급으로 쳐주지 않는 비약이었지만, 그래도 6레벨 연금비약은 6레벨 연금비약이었으니, 준의 얼굴에도 흡족한 미소가 번져갔다.

하룻밤을 꼬박 새 4번 만에 6레벨 연금비약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제자의 모습에 약로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새로운 불꽃의 위력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지만 아직 그 힘을 제대로 끌어내지는 못 하고 있어. 불꽃의 온도가 너무 높아 조금만 실수를 해도 약재가 타버리니, 대지의 불꽃 때보다도 더 세심한 불 조절이 필요하겠어.”

스승의 지적에 이준 역시 동의한다는 듯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연금비약도 다 만들었으니 황실에 가야겠어요.”

* * *

이준이 밀실에서 나오자, 두 시녀가 고개를 숙여 그에게 예를 갖췄다.

시녀들의 말에 따르면, 초아는 동이 트자마자 이씨 가문 저택에 찾아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평소 냉정하기 짝이 없는 초아가 이토록 전전긍긍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수호 마수’가 황실에 있어 중요한 존재라는 의미였으니, 준 역시 그 황실 마수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대청에 도착하자, 초아와 이정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준이 도착하자, 황실의 공주가 서둘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 눈에 보기에도 기대감이 가득했다.

“아침부터 찾아와 죄송합니다. 다만 수호 마수는 저희 황실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

“아, 괜찮습니다. 그런 귀한 마수를 운남종과의 전투에 데려와 주신 다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말을 마친 준이 약병 하나를 건네자, 황실의 공주는 체면조차 잊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연신 웃음을 지어댔다.

“이게 그 혼의 구슬인가요?”

약병을 기울여 청색의 연금비약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초아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제 아무리 황실의 공주라 해도 6레벨 연금비약을 볼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하지만 복용한 다음 약효를 촉진 시켜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이준의 설명에 초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하하, 당연히 제가 도와드려야지요. 이 기회에 저도 황실이 자랑하는 수호 마수를 직접 보고 싶기도 하고요.”

말을 마친 이준이 대문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공주가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그 뒤를 쫓았다.

* * *

두 사람이 이씨 가문의 저택을 막 빠져나오는 순간, 어딘가에서 작달말한 여자 아이 하나가 뛰어나와 이준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보람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팔목을 붙잡는 보람의 귀여운 모습에 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데리고 황실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30분 가량 이동하자, 마침내 거대한 황궁의 입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공주를 따라 마차를 타고 몇 분 정도를 더 안으로 들어가니 황성 안에 위치한 거대한 뒷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뒷산을 올라 산꼭대기의 거대한 호수에 다다르자,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아마도 그 호수가 황궁의 ‘수호 마수’가 사는 곳인 듯 했다.

“6레벨 연금비약에 직접 황궁까지 와주시다니. 어찌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초아가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자, 준이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각자 필요한 바를 위해 일 하는 것뿐이죠.”

말을 하며 시선을 돌려 호수를 바라보니 그 안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네.

“큰 뱀이 한 마리 있네. 힘이 아주 좋아…”

그 때, 이준의 곁에 있던 보람이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 장로님께서 바다괴물을 소환하실 겁니다.”

초아의 말에 따라 가철이 호수 앞으로 걸어가 두 다리를 수면에 담근 채 양 손을 물속으로 넣어 염력을 불어넣자, 갑자기 수면이 끓어오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캬아악—”

순간 웅장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수면을 뚫고 준의 귀청을 때렸다.

이준의 눈앞에 모습을 나타낸 마수는 칠색 이무기의 전투 상태와 비슷한 크기였고, 거대한 몸 전체를 뒤덮은 비늘이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괴물의 머리에는 구부러진 뿔이 달려 있었으며, 번뜩이는 눈동자는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질 지경이었다.

“가 장로. 또 무슨 일로 날 깨웠지? 말했다시피 상태가 안 좋아 도울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을 텐데.”

거대한 마수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가철을 내려다보자, 노인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네를 깨워 괴롭히려던 게 아니네. 이걸 보라고. 뭔지 알겠나?”

혼의 구슬이 나타나자, 농후한 약냄새가 호수 가득 퍼져나갔다. 약향(藥香)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챈 마수는 뛸 듯이 기뻐하며 호수를 나와 노인에게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혼의 구슬? 정말 혼의 구슬이란 말인가?”

이에 가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이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준, 뒤를 부탁하네.”

곧이어 이준의 어깨가 떨리며 청록색 날개 한 쌍이 돋아났다.

이준이 아름다운 청록색 날개를 펄럭이며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들자, 황실의 마수가 고통스러운 듯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크윽…누구냐! 꺼져! 저리가란 말이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고, 이준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날개를 움직여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아마도 이준의 불꽃이 가진 열기가 물속성의 마수인 그에게 고통을 준 모양이었다.

“하하. 걱정 말게. 이 친구는 연금술사야. 그러니 강력한 불꽃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이 연금비약도 저 친구가 만들어준 걸세. 하지만 혼의 구슬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자신이 손을 써야 한다고 하더군. 조금 참을 수 있겠나?”

가철의 차분한 설명에 거대한 괴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나 준이 가까이 붙자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졌다.

“뭐야. 덩치는 산만해서 간은 토끼 새끼만 하네!”

움찔거리는 수호 마수의 모습에 보람이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리자, 화가 난 괴물이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꼬마 녀석, 죽고 싶은 거냐!”

“흥, 지금 덩치만 큰 지렁이 주제에 날 죽이겠다고 한 거야?”

하지만 보람이 허리에 손을 짚고 소리를 치는 순간, 마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항할 수 없는 공포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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