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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335화 (335/818)

제335화. 혼의 구슬

“그게 무슨 소리야 고하와 진율희라니!”

동해의 말을 듣자, 조용하던 회의실에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그런 식으로 고하를 끌어들이다니…운산도 제법 머리를 잘 썼군.”

“고하는 원래 진율희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니까. 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진율희가 종주였으니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선을 지킨 것이지. 사실 고하가 진율희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강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 아니었나. 하지만 진율희는 고하에게 관심조차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운산의 수작이겠지.”

무이신과 동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가철의 얼굴에도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는 단왕 고하와 제법 친분이 있었으니 그가 진율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 종주의 성격에 그게 그리 쉽게 되겠나?”

나원승이 이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듣다 못한 이준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나섰다.

“다들 아시겠지만, 단왕 고하가 운남종을 돕게 되면 일이 아주 번거로워집니다. 그러니 그 결혼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야 해요. 동해 선배님, 결혼식이 언제죠?”

“이틀 후네.”

“그렇다면 이틀 후에 운남종과의 전쟁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나 빨리 말입니까?”

나원승이 불안한 눈빛으로 되묻자, 초아가 이준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단왕 고하가 운남종 편에 서게 된다면 그쪽에 많은 강자들이 모일 겁니다. 그렇다고 진율희의 성격 하나만 믿고 파혼을 기다릴 수도 없고요. 여러분들은 운남종의 투왕급 이상 강자들을 상대해 주는데 집중해 주세요. 나머지 제자들은 황군이 맡겠습니다.”

“그렇다면 초아 공주님만 믿겠습니다.”

“좋아. 이틀 후에 보지.”

초아에 이어 동해가 이준의 의견을 지지하자, 해길 역시 결심을 굳혔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연금술사 협회도 최대한 준비를 마쳐보겠네.”

두 사람의 대답에 이준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뒤 가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실에 수호마수 한 마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가 장로께서 마수를 꺼내 주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실로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가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황실에 6급 수호마수가 있긴 하지. 실력이 칠, 팔성 투황 정도인 것도 사실이고…그런데 지금은 참전이 어렵네.”

“왜죠?”

가철이 고개를 젓자, 이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7,8성 투황이라면 투왕 둘 셋은 너끈히 붙잡아둘 수 있는 전력이었다. 상황에 따라 전황을 뒤집을 정도의 존재인데, 이를 아껴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일부러 숨겨두는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은 부상이 심해 도저히 싸울만한 상태가 아니예요.”

이준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본 초아가 가철을 대신해 대답했다.

“며칠 전에 해길 회장님께 진찰을 부탁 드렸으니, 회장님에게 사실인지 물으셔도 상관없습니다. 혼의 구슬이 필요하시다고 하더군요.”

“혼의 구슬이요?”

이준의 질문에 해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수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쓰이는 연금비약이지만…6레벨 연금비약이라 나도 만들기가 어렵네. 가한제국에서는 고하와 나 정도만 만들 수 있을텐데…”

잠자코 해길의 말을 듣던 이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금비약 제조는 제가 맡겠습니다…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니 이 정도는 도와야죠.”

이준의 한마디에 회의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이토록 자신있게 말을 한다는 것은, 그가 진작에 6레벨 연금술사가 되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6레벨 연금비약이라고는 해도 혼의 구슬 정도라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혼의 구슬 제조에 필요한 약재가 지금 수중에 없으니…혹시 황실에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준의 제안에 초아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이번 전쟁은 황실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명운이 달린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수호마수는 황실의 중대한 전력이었으니, 부상을 치료할 수 있다면 약재 따위가 아까울 리가 없었다.

“제가 사람을 불러 약재를 전달하겠습니다. 성공률이 어떻게 되든 만들어만 주신다면 약재를 얼마든지 쓰셔도 좋습니다.”

연금비약 제조에 들어가는 약재들은 하나 같이 진귀한 것들이었지만, 황실 창고에는 이미 진귀한 약재가 가득했으니 수호 마수의 부상을 치료하는 것이 훨씬 더 중했다.

기뻐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운남종과의 결전에서 강자가 많은 수록 좋으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만일 이번 대전에서 수호 마수가 부상을 입는다면 다시 혼의 구슬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진귀한 6레벨 연금비약을 다시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말에 가철과 초아는 완전히 입이 귀에 걸리고 말았다.

“그럼 이틀 동안 모든 전력의 준비를 마쳐주십시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운남종은 가한제국에서 영원히 사라질 겁니다.”

협상이 끝난 동해와 이준은 인사를 나눈 뒤 협회를 떠났다.

협회를 나선 동해는 유씨 가문으로 돌아갔고, 이준은 길을 따라 성 중심 의 번화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번화가의 한가운데 위치한 커다란 저택에 다다르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그 주위를 서성이며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대문 앞에 운집한 사람들을 발견한 이준은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은 뒤 잠시 눈치를 살피다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누군가가 담을 넘는 것을 발견한 네 사람이 무기를 빼어들고 신속히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놀랄 거 없어. 나야.”

귀에 익은 목소리에 네 명의 무사는 빠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가주님! 죄송합니다!”

“하하, 됐어……”

준은 망토 자락을 툭툭 치며 가볍게 웃은 뒤 네 사람에게 손을 흔들고는 곧바로 작은 길을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씨 가문의 새로운 터전이 될 대저택은 저택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해 육안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거대한 저택에 고작 몇 십 명의 사람이 오갈 뿐 이었으니, 대부분이 건물과 마당이 텅텅 비어있어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때? 나쁘지 않지? 이 지역에서 이 정도 크기의 저택은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응.”

형의 한마디에 이준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씨 가문의 저택만큼은 아니었지만, 황도에서 이만한 대저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삼대 가문 뿐 이었다.

“좋아. 앞으로 이곳이 우리 이씨 가문의 새로운 집이 되는거야.”

이준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협상 결과는 어땠어?”

“순조로웠어. 이틀 후에 병력이 모이면 운남종으로 떠날거야.”

“이틀 뒤에? 너무 빠르지 않아?”

동맹을 결성하자마자 곧바로 운남종과의 전쟁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빨랐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일이 진행되자, 이정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운산이 진율희랑 고하의 혼례를 발표했어.”

이어지는 동생의 설명에 이정은 물론이고 곁에 있던 이찬의 얼굴 역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운산이 두 사람을 결혼 시키려 한다고?”

“응…”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겠군. 고하의 영향력은 연금술사 협회의 회장인 해길보다도 더 대단하잖아.”

“그럼 넌 어떡할 생각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 이정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무언가 생각에 잠겼고, 이찬은 초조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결혼을 막아야지. 일단 고하부터 어떻게 해볼 생각이야. 잘하면 운남종의 일에 끼어들지 않게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형들은 가문 사람들을 지켜줘. 어차피 운남종과의 일은 내가 해결해야 하니까.”

말을 마친 이준은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운남종 일은 네게 맡기마. 대신 하나만 약속해다오. 지금 너는 이씨 가문의 가주야. 네가 죽으면 우리 가문도 끝이니,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알겠어 형, 너무 걱정하지마.”

그렇게 세 형제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황실에서 준비한 혼의 구슬의 약재가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아가 직접 약재를 들고 이씨 가문의 저택을 방문했다.

그녀가 준비한 약재는 하급 저장 반지 안에 들어 있었다. 이준은 준비된 약재의 양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면 열 개는 만들고도 남을 양이었다.

초아는 약재를 전달하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떠났고, 이준은 눈짓으로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조용한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준은 밀실 문을 굳게 닫자마자 주먹을 불끈 쥔 채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준비조차 할 시간 없이 운남종과 맞부딪게 되자, 그 역시 적잖은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설마 운산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그 때,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까만 반지가 미세하게 떨리며 약로의 환영이 천천히 떠올랐다.

“전장이 운남산이니 운남종이 지리적 우세를 점할 게다. 게다가 그 곳에는 운남종의 제자들이 가득할테니 수적으로도 유리할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하까지 엮으려는 걸 보면 너를 꽤나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구나.”

말을 마친 스승은 갑자기 새하얀 반지 하나를 꺼내 제자에게 건넸다.

“이걸 가져가거라…”

“이게 뭐죠?”

“내가 얼음불꽃의 정수를 응집시켜 만들어낸 반지다. 하지만 이 안에 저장된 에너지는 5일이 지나면 사라져버리지. 만일 운남종과의 결전에서 영혼의 궁전 놈들이 나타난다면 내가 그들을 막아야 할게다. 그럼 내가 너를 도울 수 없으니 그 때를 대비해 만들어 둔 것이다. 이 안에는 네가 딱 한번 화련을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정도의 에너지가 들어있으니, 신중하게 사용하거라.”

스승의 진지한 조언에 이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잡생각을 버리고, 앞으로 있을 전투를 위해 필요한 것에 집중하거라.”

표정이 굳어진 이준을 보고 약로가 위로하듯 말하자, 준은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인 뒤 초아가 건넨 저장 반지를 꺼내들었다.

“그렇다면 우선 혼의 구슬부터 만들어야 겠어요. 황실의 수호 마수가 힘을 되찾는다면 분명히 큰 전력이 될 테니까요.”

이에 약로 역시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근래 네가 연금비약 제조하는 모습을 통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 기회에 네 연금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볼 수 있겠구나.”

스승의 기대어린 표정에 이준은 머쓱하게 웃음을 한번 짓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붉은색 약솥을 꺼냈다.

곧이어 그가 손가락을 한번 까딱하자, 청록색 불꽃이 약솥 안으로 떨어지며 밀실 안이 아궁이처럼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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