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스승의 도움
이준이 자리에 앉자, 문을 잡고 있던 그와 함께 들어온 해길과 최평도 각각 자리를 잡았다.
“오늘 여러분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이준은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고, 이에 가한제국의 강자들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뭐, 운남종과 저 사이의 일은 자리에 계신분들 아니라 가한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떠나있던 3년 사이, 운남종과 여러분의 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더군요. 여러분과 제 이해 관계가 일치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호호. 이준 선생님, 운남종이 강대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저희들과 직접적인 마찰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가철의 곁에 앉아 있던 초아였다. 아름다운 예비 여황제는 가철을 한 번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 하지만 저희도 한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모습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세력이든 말이죠.”
여인의 대답에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영악한 제국의 황족은 교묘한 말장난으로 자신에게 뭐라도 얻어낼 요량인 것이 틀림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준비해놓은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가한제국에 돌아올 때 국경에서 운남종의 장로를 만났습니다. 그 장로는 국경의 여단장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그곳을 손에 넣으려 했었지요. 그런데 황실과 마찰이 없다니, 대체 어느 정도가 돼야 마찰이 있는 거죠?”
이준이 예상한 대로, 가철과 초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준은 깜짝 놀란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문철이 아직 소식을 전달하지 않은 듯했다.
“며칠 내로 보고가 들어올 테니 제 말이 거짓이라면 운남종의 편에 서시죠.”
이준의 자신감 넘치는 한마디에 순간 회의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 때, 조용히 앉아 분위기를 살피던 동해가 입을 열었다.
“국경을 치고, 며칠 뒤 유씨 가문까지 쳤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하지만 동해의 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뜻 이준의 편에 서지 못 했다. 유씨 가문이야 본래 이씨 가문과 가깝게 지내며 운남종의 눈 밖에 났으니, 자신들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판단한 모양인 듯했다.
물론 그들 역시 최근 운남종의 행보에 불안을 느끼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쉽게 가한제국 최대의 세력에게 반기를 든다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흠…흠… 이준 선생, 이씨 가문이 운남종과 싸워 이길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이신이 헛기침을 하며 이준에게 물었다.
“절반 정도입니다.”
이준의 애매한 답변에 또 다시 회의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이번에 정적을 깬 것은 가철이었다.
“자네가 이번에 돌아오며 많은 투왕 강자들을 데려온 것으로 알고 있네만, 운남종이 데리고 있는 투왕의 숫자도 만만치 않네. 게다가 내가 알기로는 운남산에 운형이나 운기웅과 비슷한 실력의 투황 강자가 두세 명 더 있다지. 무엇보다 운남종에는 투종인 운산이 있으니…운산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가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준이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이자, 돌연 세 개의 그림자가 이준의 곁으로 날아왔다.
“투황 강자는 저에게도 있습니다. 지난 번 전투에서는 아껴두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준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반투명한 노인의 영혼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투종 강자도 있고요.”
햇빛이 쏟아지며 반투명한 노인의 형상을 비추자,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멀뚱멀뚱 이준과 약로의 환영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스승의 등장에 이준 역시 놀란 듯 두 눈을 깜빡이며 약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스승님, 갑자기 왜 나오셨어요?”
‘스승님.’ 이준이 노인을 부르는 호칭에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이준이 이토록 빠르게 성장한 것은 이 노인의 도움 덕분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3년 전에 대투사에 불과했던 이준을 가철급으로 끌어올려 놓았으니, 노인의 실력은 운산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허허. 괜찮다. 어차피 언젠간 모습을 드러내야 했을테니까.”
약로가 이준, 메두사 이외의 사람 앞에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있는 일 이었으니 준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준과 운남종이 전쟁을 펼치는 이상, 그 역시 가만히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거대한 세력간의 전쟁에서 동맹을 형성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 운남종을 꺾기 위해 자신이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난데없는 약로의 등장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가철 같은 사람보다 더욱 놀란 것은 동해와 은평강을 비롯한 세 명의 투황이었다. 그들은 이준 옆에 또 한 명의 투종 강자인 메두사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이준 옆에는 투종 강자가 두 명이나 있는 셈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은평강, 소미 그리고 광철 등은 애초에 이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은 것에 대해 무릎이라도 꿇고 감사를 표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나씨 가문은 약로의 등장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가에는 아쉬움과 후회가 가득했다. 이미 이준의 실력은 나씨 가문을 한참이나 앞서 있었고, 그의 스승은 운산 혹은 그 이상의 강자임에 틀림이 없어보였다. 상황이 이쯤 되니 나설아와의 혼담이 깨진 것이 뼈에 사무치게 후회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놀란 토끼 눈을 하자, 약로가 손을 저으며 이준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다들 편하게 이야기 나누게나. 이 노인네는 신경 쓰지 말고…”
약로가 말을 꺼내자 그 안에 있던 모두가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단 한 명의 투종이 가한제국 전체를 휘두르고 있는 판이다. 그들이 투종이라는 존재가 갖는 무게감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선생님, 호칭은 어찌 해야 좋을까요? 가한제국에서 뵌 적이 없는 분인 것 같습니다만…”
잠시 후, 가철이 전에 본 적 없는 겸손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약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본디 가한제국 사람이 아닐세. 흠. 내가 대륙에서 돌아다닐 때라면… 그대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겠군.”
약로가 살며시 웃으며 해길을 바라보자,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흐릿하게 스쳐갔다.
“네가 그 때의 그 작은 연금술사구나. 네 기운을 아직 기억하고 있단다. 자네도 아주 실력이 좋아졌군……”
해길을 아는 듯한 약로의 가벼운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해길을 바라봤다.
그 순간, 해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이에 가한제국 연금술사 협회의 회장은 체통조차 잊은 채 몸을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 혹시…그때 그 선생님이십니까?”
약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제자인 이준조차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 대륙을 횡단할 때 너와 비슷한 나이였던 이 녀석을 만났었다. 재능이 있길래 조금 도움을 주었지.”
이 놀라운 이야기에 입조차 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약로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됐네. 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니면 내 제자가 스승이 와서 일을 방해했다고 원망을 늘어놓을 수도 있으니 말일세, 그리고 아까 이 녀석이 이야기한 것들은 모두 진실이야. 내가 보증하지. 그러니 잘 한 번 생각해보게.”
말을 마친 약로는 의미심장한 한마디와 함께 자리에서 사라졌고, 자리에 있던 강자들은 모두 꿈이라도 꾼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어떻습니까? 생각이 조금 정리 됐나요?”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해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가 있으니 우리 연금술사 협회에서도 힘을 보태겠네.”
해길의 대답에 모두들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연금술사 협회는 그 구성원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연금술사의 인맥까지 생각하면 사실상 가한제국 최고의 세력 중 하나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연금술사 협회가 먼저 이준의 손을 잡겠다고 하니, 운남종이라 해도 이 싸움에서 이기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해길 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시니 저희 가문도 함께 하겠습니다.”
무이신 역시 이준과 손을 잡을 것을 밝히자, 황실과 나씨 가문도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초아가 가철과 시선을 교환한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준 선생님, 우리 황실에서는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다만…”
“네, 공주님 편히 말씀하시죠.”
“운남종을 몰아내고 이씨 가문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황실 입장에서는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이는데요.”
이는 사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하고 있던 생각이었다. 운남종도 두렵지만, 운남종을 몰아내고 그 권력을 이씨 가문이 그대로 가져간다면, 다른 가문 입장에서는 얻는 것이 없었다.
“음…아마도 그리 되겠지요. 하지만, 저희는 운남종처럼 황실이나 다른 가문의 권리를 건드릴 마음이 없습니다.”
이준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러나 황실측은 여전히 이준의 대답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초아 공주님도 아시겠지만 이번에 손을 쓰지 않는다면 운남종의 화살은 황실을 향할 것이고, 길어야 일 년 안에 승부가 날 것입니다. 유씨와 무씨, 이씨가 손을 잡은 세력보다는 황실을 무너뜨리는 게 쉬울 테니까요. 그리고 저희는 굳이 황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이준의 대답에 초아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운남종이 황실을 무너뜨리는 동안 유씨와 무씨, 이씨 세 가문이 힘을 기르며 기다릴 수도 있다는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상황이 이 정도까지 왔다면, 황실의 참전여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더욱 할 말이 없었다. 공주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제가 아직 어려 생각이 깊지 못 했습니다. 혹시나 기분이 상하셨다면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지요. 저희도 모든 힘을 다해 이씨 가문을 돕겠습니다.”
황실까지 입장을 표명하자 나씨 가문도 이구동성으로 참전 의사를 밝혔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로써 우리는 모두 한배를 탄 것입니다. 그리고…부탁을 하나 드리자면, 제 스승님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지는 이준의 부탁에 사람들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투종 이상의 존재로 보이는 스승의 심기까지 거스를 바보가 있을 리 없었다.
그 때, 갑자기 회의실 창가로 전서구 하나가 날아들었다.
“주희에게서 온 전보야.”
동해가 전서구의 다리에 묶인 편지를 준에게 내밀며 말했다.
“운산 그 빌어먹을 늙은이가…운남종에서 결혼식을 열 예정이라는군.”
“결혼식? 이런 시기에요?”
이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동해는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왕고하와…진율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