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3화. 이보령
“1만 골드에 사겠습니다.”
1만 골드라는 말에 사람들은 혼이 나간듯한 표정으로 일제히 한 곳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검은 망토를 입은 청년 하나가 보라색 머리의 여자아이와 함께 서있었다.
“너…너는…분명 그때….”
이준의 갑작스런 등장에 너무 놀란 설매가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 멈춰서자, 청년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번졌다.
“만석 대사님은 잘 지내시지?”
“응. 잘 지내셔……”
설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가한제국을 떠난 거 아니었어?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야…?”
반응을 보아하니, 며칠 전 가한제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아직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넌 또 뭐야 임마!”
그 때, 박병호라는 사내가 씩씩거리며 준에게 다가와 소리를 질러댔다.
거들먹거리는 사내의 모습에 준의 입가에는 뜻모를 미소가 번졌다. 곧이어 그가 무심하게 손을 내뻗자, 기이한 힘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손에서 ‘뱀의 열매’를 낚아챘다.
“야! 너 뭐하는거야! 너 누구야!”
이준의 돌발행동에 박병호가 또 다시 버럭 고함을 치자, 그의 곁에 있던 십 여명의 건장한 사내가 살기 등등한 태도로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펑!
하지만 이준이 먼지라도 털 듯 가볍게 손을 흔들자, 무형의 에너지가 번개처럼 그들의 가슴 팍에 내리꽂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 여명의 투사들이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에 박병호는 순간 온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하아…가한제국이 그립기는 했지만, 이런 모습까지 그리워 했던건 아닌데 말이야.”
그리고 검은 망토의 청년이 한숨을 내쉬며 사내의 가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는 순간, ‘쾅’하는 폭발음이 사람들의 귓등을 때렸다.
“쿨럭!”
사내의 손바닥에서 가볍게 폭음이 이는 순간, 박병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그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튀어나왔다.
검은 망토를 두른 정체불명의 사내가 박병호를 날려버리는 모습에 구경꾼들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대책없는 난동꾼에 오만하기로 유명한 사내였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불과 20살 조금 넘은 나이에 대투사의 경지에 오른 강자였으니, 이렇게 쉽게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하지만 놀란 눈빛은 금세 동정의 눈길로 변했다. 박병호는 연금술사 협회의 장로인 ‘이보령’이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제자였기 때문이다.
“너…어휴. 너 지금 사고 친 거야! 빨리, 따라와. 여길 벗어나야 해!”
설매는 바닥을 구르는 박병호를 바라보며 새파랗게 질려 이준을 끌고 달리기 시작했고, 준 역시 딱히 저항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달렸다.
설매가 그렇게 한참을 달려 준을 연금술사 협회 바깥까지 데리고 나간 뒤에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준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설매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번 들어 올렸다 내릴 뿐이었다.
“겨우 쓰레기 하나 처리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 자식이 쓰레기는 맞는데 그래도 장로님의 제자란 말이야! 어휴, 대체 어쩌자고…!”
“만석 대사님도 장로님이잖아? 무서워할 게 뭐 있어?”
“스승님은 지금 4레벨 연금술사잖아! 이보령 장로는 5레벨 연금술사야. 연금술 실력만 해도 부회장님이랑 비슷할 정도니 지위도 스승님이랑 다르다고…! 어휴! 이러다가 스승님에게까지 불똥이 튀면 어쩌려고…”
4레벨과 5레벨 연금술사의 차이는 투령과 투왕만큼이나 격차가 컸으니, 설매 입장에서야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것이 당연했다.
“걱정 마.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잘 챙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허허. 걱정하지 말라고? 어디서 굴러먹다온 놈인지는 몰라도 배짱이 제법 두둑하구나. 감히 황도 안에서 내 제자를 다치게 해놓고 무사할 줄 알았느냐!”
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커다란 웃음 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두 사람 앞으로 날아들었다. 사내의 가슴 팍에는 다섯 개의 물결 모양이 그려진 휘장이 달려있었다.
“저 사람이 이보령이야?”
5레벨 연금술사의 등장에 삽시간에 주위가 어수선해졌지만, 준은 여전히 관심조차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미친놈아!”
급기야 준의 입에서 장로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설매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는 몰라도, 3년 사이에 머리라도 다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드는 언행이었다.
“네게 손찌검 한 게 저 자식이냐?”
그 때, 박병호가 나타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준을 가리켰다.
“네, 스승님 제가 스승님께 선물을 드릴 약재를 고르고 있었는데…저놈이 갑자기 끼어들어 약재를 빼앗고 저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보령 장로님, 이 일은……”
박병호의 이야기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상황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설매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변명을 하려했다.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5레벨 연금술사에게 그런 이야기가 들릴 리가 없었다.
“설매, 닥치거라!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이보령이라는 노인은 설매에게 버럭 고함을 지른 뒤 곧바로 이준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린 놈이 벌써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아무 곳에서나 힘을 써? 그것도 감히 나 이보령의 제자에게? 네 스승이 누구냐?”
대노한 이보령의 호통 소리에 자리에 있던 모두는 준이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은 사과는커녕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귀를 후벼댔다.
“그 스승에 그 제자로군.”
청년의 한마디에 주위의 공기가 분위기가 급격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당장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연금술사 협회 장로를 비웃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네 이놈!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이 연금술사 협회에서 나를…”
“야 이 늙은이가! 시끄러 이 쭈그렁탱이야!”
바로 그 때, 보람이 버럭 짜증을 내며 귀를 틀어막았다.
조그마한 소녀가 주름이 가득한 노인에게 욕설을 퍼붓는 모습에 구경꾼들은 저도 모르게 키득거리며 웃음을 짓다가 이보령의 표정을 보고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자, 이준은 상대하기조차 귀찮다는 듯 보람의 손을 잡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이렇듯 한결같이 자신을 무시하는 준의 태도에 이보령의 낯빛이 점점 창백하게 변해갔다.
“네 이노옴! 내가 너의 스승을 대신해 예의를 가르쳐주마!”
다음 순간, 노인의 몸에서 염력이 폭발했다.
대청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가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에게 이준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자리를 피하려 했다. 이보령은 5레벨 연금술사일 뿐 아니라 투왕급 강자였으니, 황도 안에서 그와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쾅!
그러나 두 사람의 주먹이 맞부딪히는 순간,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폭풍이 일며 노인의 몸이 십 여 미터나 뒤로 날아갔다.
이 어처구니 없는 광경에 주위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 앉았다. 이보령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이…이놈이!”
그리고 이보령이 막 다시 공격을 펼치려는 순간, 미세한 번개 소리와 함께 은빛 섬광이 일더니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의 모습이 눈 앞에서 사라졌다.
“내 스승님을 대신해 날 가르칠 실력은 아닌 것 같군.”
차가운 웃음 소리와 함께 이보령의 팔목을 붙잡은 이준은 이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해길 회장님, 계속 그렇게 숨어서 구경하시다가는 5레벨 연금술사 하나를 잃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이준이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정말로 연금술사 협회의 회장인 해길이 서있었고, 그 곁에는 협회의 부회장인 최평이 보였다. 그리고 최평의 뒤에는 청색의 연금술사 망토를 걸친 여자 아이 하나가 두 눈을 깜빡이며 이준과 이보령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껄껄껄! 3년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컸구만. 자네는 언제나 나를 깜짝 놀래키는구만 그래!”
회장의 호의적인 언사에 사람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상대가 누구이기에 협회의 장로를 죽이려 드는데 회장이 웃으며 인사를 건넨단 말인가!
“하하. 회장님, 오랜만에 만나는데 썩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해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닐세, 이보령에 관해서는 우리가 조치를 취할 테니 이만 넘어가주지 않겠나? 게다가 자네도 우리 협회의 명예 장로이니 같은 장로끼리 이번 한번만 너그럽게 지나가주게.”
최평의 한마디에 구경꾼들의 얼굴이 더욱 크게 일그러졌다. 20살 남짓한 사내가 연금술사 협회의 ‘명예 장로’라니,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심지어 최평의 태도는 마치 윗사람을 대하듯 공손하기까지 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더 민망하군요. 어린 사람들끼리 벌어진 일에 장로님께서 사정도 듣지 않고 주먹부터 날리시니 저도 흥분해서 실수를 하였습니다.”
분위기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돌아가자, 박병호와 이보령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려갔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회장과 부회장이 이렇게 공공연하게 그의 편을 든다는 것은, 그가 자신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모였습니까?”
상황이 대충 정리된 듯 하자, 이준은 또 다시 이보령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허허. 다 왔네. 모두 자넬 기다리고 있어.”
“그럼 같이 가죠.”
그렇게 이준은 넋이 나간 사제를 내버려둔 채 해길, 최평 연금술사 협회의 두 수장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 * *
넓고 밝은 대청에위에는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기껏해야 친분이 있는 몇 명이서 간간히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 받는 것외에는 아무런 말도 오고 가지 않았고, 그나마 농담을 주고 받는 이들의 얼굴에도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철커덕—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이 서서히 열리며 검은 망토를 입은 소년이 문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이준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예의바른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자들은 하나 같이 가한제국에서 내로라 하는 실력자들 이었으니,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껄껄껄! 대체 무슨 비법을 쓰면 그렇게 빨리 실력이 느는건가?”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황실의 수호자, ‘가철’이었다. 그의 곁에는 화려한 치마를 입은 여성 하나가 우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가 장로님께서는 여전히 힘이 넘치시는군요.“
준은 입으로는 가철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리에 나온 이들의 면면을 하나 하나 뜯어보았다. 무이신, 나원승, 나원철, 가철, 해길에 최평, 가한제국에서 손에 꼽는 강자들이 자신과의 거래를 위해 모두 모였다는 사실에 가슴 한켠이 두근두근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쪽에 앉게. 오래 기다렸어.”
무씨 가문의 무이신은 이준을 한번 힐끗 바라보고는 저도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무씨 가문의 무천 역시 제법 재능이 있는 사내였고, 3년 전만 해도 이준과 무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무천이 아니라 자신조차 이준과 맞붙어 이길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