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재회
“이제 그 동안의 수모를 되갚아줄 때가 왔습니다.”
이준이 계속해서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자, 장로의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흑…도련님…정말 죄송합니다. 가주님의 혜안을 믿지 못 하고 저희 장로들이 어찌나 큰 결례를 범했는지…”
“이제 모두 지나간 일 아닙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은 운남종에 대적해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일에만 집중해도 모자랍니다.”
계속되는 준의 위로에도 셋째 장로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궈댔다. 성격이 불같았던 셋째 장로가 이리도 약해진 것을 보니 그간 이씨 가문이 얼마나 힘겹게 살아남았는지가 절절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마침내 정신을 차린 셋째 장로가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아…죄송합니다. 그리고 두 장로님의 유언대로 이제 이씨 가문의 정식 가주는 셋째 도련님이시니, 앞으로는 가주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가문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저는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 다할때까지 가주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자신이 정식 가주라는 셋째 장로의 말에 부담을 느낀 준은 당황하며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가주 자리는 당연히 큰 형에게 돌아가야…”
하지만 곁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정은 온화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준아, 두 장로님의 유언이다. 게다가 이렇게 가문이 위기에 처했는데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가주 자리를 맡을 수는 없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운남종에 맞설 수 있는 강한 가주다.”
“그래 준아. 나도 같은 생각이다. 걱정 말거라. 우리와 셋째 장로님이 온 힘을 다해 도울 테니까.”
이찬마저 웃으며 자신에게 가주 자리를 맡으라고 권하자, 결국 이준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우선은 내가 임시 가주로 가문을 이끌게. 하지만 이 문제가 마무리 되면 가주 자리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이야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 일제히 웃음이 번졌다.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그들 모두는 이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환호에 민망해진 이준은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킨 뒤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지금 이씨 가문에 몇 명이 남아 있고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지금까지 남은 사람은 208명으로,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140명 정도이고, 그 중 대부분은 투사나 무투사 계급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도 아직 4성 투령 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셋째 장로의 설명을 듣던 이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곳에는 200명은커녕 100명이나 될까 말까한 사람들 밖에 모여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200명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저희가 암암리에 용병단을 하나 조직했습니다. 보통은 그곳에서 훈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요.”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이찬을 향해 말했다.
“형, 가문 사람들의 훈련은 형이 맡아줘. 그리고 거주 장소도 바꾸는 게 좋겠어.”
“응, 그렇게 하자. 그런데 가문 사람들이 내 훈련 방식을 따라올 수 있을까…”
이찬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떼자, 이씨 가문의 한 사내가 흥분하며 소리를 쳐댔다.
“이찬 도련님, 제 아들이 운남종 놈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실력을 키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죽도록 훈련시켜 주십시오. 설령 저희가 죽더라도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사내의 외침에 따라 이곳저곳에서 분노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에 이찬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열의가 있다면 실력을 키우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형, 그럼 이제 이씨 가문 사람들을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가줘.”
이찬은 이씨 가문의 장정들을 바라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한 동생이 돌아왔으니, 기나긴 고통의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날 것이다.
“그래. 가문 일은 나랑 큰형에게 맡기고 너는 운남종과의 전투를 준비하는데 전념해.”
말을 마친 둘째가 가문의 장정들을 불러모으자, 이를 바라보던 이정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확실히 준이 네가 돌아오니 사람들의 표정부터 다르구나.”
모처럼 밝은 표정을 짓는 가문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정의 눈에는 어느새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 * *
유씨 가문과의 전쟁에서 운남종이 처참하게 패배한지 사흘, 운남종은 쥐죽은 듯 조용히 그들의 본거지인 운남산에 틀어박혀 있었다.
기묘할 정도로 침착한 운남종의 대처에 이준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의아하게 여겼지만, 그들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는 평화였다. 그 사이에 다른 세력과 연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해는 불과 사흘만에 황도안에 있는 모든 유력한 세력을 총 집결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의할 장소는, 늘 중립을 유지해온 연금술사공회였다. 단왕 고하마저도 해길 앞에서는 감히 허튼 생각을 할 수 없었으니, 협상의 장소로는 최적의 무대라고 할 수 있었다.
* * *
황도의 동쪽에서 태양이 빼꼼 고개를 내밀 무렵, 이준이 유씨 가문을 찾아왔다. 오늘은 단왕 고하와의 협상이 있는 날이었다.
“오오, 동생, 일찍 왔군!”
이준을 보자마자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동해는 그 곁에 서 있는 새하얀 여인을 보자마자 곧바로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흠흠…마침 사람들을 시켜 자네를 불러오려던 참이었는데. 황실, 무씨 가문, 나씨 가문까지 모두 연금술사 협회로 오라고 연락을 해두었네.”
오늘 준의 곁에는 메두사 뿐 아니라 보람도 함께 있었다. 또 다시 메두사를 따라 약재를 훔치고 다닐까봐 데리고 온 것이었지만, 뜻 밖에도 메두사까지 그를 따라왔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보람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준아, 저 분은 누구셔?”
준의 뒤에 서있는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희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 그냥 아는 사람. 채린이라고…”
“아아, 채린씨구나.”
준이 자신을 ‘채린’이라고 소개하자, 메두사의 눈에 또 다시 살기가 돌았고, 이에 주희는 더욱 긴장한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이에 곁에서 메두사의 눈치를 살피던 동해가 황급히 다가와 주희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혹여 주희가 메두사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가문의 모든 경매장이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니 그 일 좀 잘 부탁하겠네. 나랑 이준은 서둘러 연금술사 협회에 가보아야 해서 말이야.”
동해의 태도가 평소답지 않은 것을 보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주희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준아, 가서 이야기 잘해. 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 편으로 만들어줘!”
“우리도 가자!”
주희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메두사 여왕이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휴우…”
동해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주희가 눈치가 빠르기에 망정이지, 괜히 꾸물거리다 메두사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을 것이다.
“그럼 이제 연금술사 협회로 가볼까요?”
이에 이준은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메두사 여왕은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었으니, 그도 함부로 입을 열기가 두려웠다.
“하하하, 동생이 3년 만에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면 모두들 어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만!”
동해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어리자, 이준의 얼굴에도 웃음이 내려 앉았다. 그는 그대로 보람과 메두사를 달고 유씨 가문의 저택을 나서 연금술사 협회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흠…그야말로 가한 제국의 최고 세력이 모두 모이는 자리군.”
몇 개의 골목을 지나자, 낯익은 대문 하나가 그를 맞이했다. 문득 연금술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던 날의 기억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 * *
연금술사 협회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약향이 퍼지며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안으로 입장한 동해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할 것이 있다며 준에게 회의실의 위치를 일러주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뜰 안으로 들어서자, 4레벨 연금비약을 만드느라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준의 머리를 스쳤다. 3레벨 연금술사에서 6레벨 연금술사까지 3년…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기억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이준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의 보람을 끌고 기억을 더듬어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그 곳에서는 약간의 눈썰미와 운만 있다면 꽤나 훌륭한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로 빽빽한 교역장으로 막 걸어 들어가던 그 때, 무언가가 이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긴 머리의 여인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만석 선배님의 제자잖아?’
순간 준의 머릿속에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하나 스쳐갔다. 사실 그가 연금술 경연대회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오탁과 만석 때문이었고, 당시 ‘임현’으로 변장한 채 대회에서 우승하며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으려나?’
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보람과 함께 득실거리는 인파속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기야 했지만, 사실 먼저 나서서 아는 체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준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약재를 들여다보고 있던 설매가 무언가를 느낀 듯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 * *
한편, 교역장에 들어선 이준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쓸만한 물건이 있는지 찾아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쓰레기들밖에 없네.”
그 때, 준의 곁에 있던 보람이 입을 삐쭉 내밀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항상 최고급 약재로 만든 음식을 먹어대는 그녀의 눈에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죄다 쓰레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결국 준도, 보람도, 눈에 차는 물건을 찾을 수 없었고, 둘은 실망한 표정으로 교역장을 떠나려 했다.
그 때, 교역장 한구석에 사람들이 옹기종기모여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준은 남의 일에는 크게 흥미가 없었기에 그저 흘깃하고 시선을 한 번 던진 뒤 다시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지금 그는 별 것도 아닌 일에 관심을 두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군중들 틈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터지는 순간, 그의 다리가 우뚝하고 멈춰섰다. 설매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후…그냥 가기엔 마음에 걸리는군…”
준은 결국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지켜봤다.
그의 예상대로, 목소리의 주인공은 만석의 제자인 설매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인 채 연금술사 복장을 한 사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박병호! 너무한 거 아니야?”
“큭큭. 이거 왜 이러시나, 더 많은 돈을 내는 사람이 물건을 가져가는 게 당연한거잖아.”
가슴에 2레벨 연금술사 휘장을 단 남자는 설매를 약올리듯 실실 웃으며 곁에 있는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뱀의 열매’ 5천 골드 드릴게요. 파실 거죠?”
사내의 제안에 ‘뱀의 열매’를 내놓은 상인의 입이 귀에 걸렸다. 뱀의 열매는 기껏해야 2천 골드밖에 하지 않는 물건이었으니, 상대쪽에서 5천 골드를 부르자 이게 왠 횡재인가 싶었던 것이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뱀의 열매를 쥐고 흔드는 박병호의 모습에 설매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해서 갑자기 주머니에서 돈이 솟아나는 것은 아니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설매가 씩씩대며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누군가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1만 골드에 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