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협상
동해의 말을 듣던 이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음…선배님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분명 연금비약의 도움을 받았거나 비술을 손에 넣었겠죠.”
“그리고 주희가 조직한 정보조직의 보고에 따르면, 운남종 안에 다른 정체불명의 세력이 함께 움직인 흔적이 있네, 어쩌면 그 세력 덕에 운남종이 지금 같은 힘을 갖게 됐을지도 모르지.”
얼음왕의 추측에 이준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체불명의 세력’이란 아마도 ‘영혼의 궁전’이리라.
“뭐…어찌됐든, 지난 3년간 운남종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해졌네. 지금 가한제국 전체가 운남종의 발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동생의 실력이 는 것도 알겠고, 든든한 원군들이 온 것도 알겠지만, 나머지 세력들과 힘을 합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황실도 좋고, 연금술사 협회도 나쁘지 않겠지. 그들 역시 운남종에 쌓인 것이 많을 테니까. 자네가 데려온 강자들도 훌륭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들만으로는 조금 어려울 게야. 무엇보다 운남종에는 투종인 운산까지 있지 않은가.”
동해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준은 크게 동요하지도, 걱정하지도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이 정도로 운남종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이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치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반달」의 수장인 은평강, 「은빛칼날」의 소미, 「사자단」의 광철이 나타났다.
“하하, 가주님. 분부대로 사람들 몰래 은밀히 성에 들어왔습니다.”
세 사람은 대청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이준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아주 잘해주셨습니다.”
세 투황이 등장하자, 이준은 고개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동해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때요 선배님, 이 정도면 될까요?”
이준의 장난스런 표정에 동해는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세 사람을 응시했다. 셋 중 둘의 실력은 적어도 자신과 비슷해 보였고, 음침해 보이는 노인은 지금의 자신보다 확실히 한 수 위였기 때문이다.
이준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동해를 바라보며 조용히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운산을 상대할 사람은…”
이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인 하나가 정교한 옥 상자를 안고 나타났다. 또 어디에선가 약재를 훔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인이 대청안으로 들어 선 순간, 동해의 몸이 시체처럼 뻣뻣하게 굳어갔다.
“메, 메, 메두사…?”
돌처럼 굳어버린 동해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한 이준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보람을 끌어 당긴 뒤 곧바로 메두사의 손에 들린 옥 상자를 빼앗았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이런 짓하면 다시는 요리 안해줄거야!”
이준의 협박에 보람은 울상이 되어 말없이 준의 소매를 붙잡았다. 불 같은 그녀의 성미를 생각하면, 이는 사실상 항복선언이나 다름이 없었다.
곁에 있던 메두사는 빠르게 태세를 바꾸는 보람을 보며 기가 찬 듯 콧방귀를 뀌고는 이준을 바라보며 샐쭉 입을 내밀었다.
“흥…훔친 것이 아니다! 네놈 말대로 몰래 이곳까지 오는 길에 주워온 것뿐이야! 이 무식하게 넓은 집에서 그 난리가 났으니 이런 보물 하나둘쯤 널려있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느냐!”
뻔한 거짓말이었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듯한 메두사의 태도에 더욱 화가 들끓었지만, 준은 애써 화를 누르며 동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저 둘이서 어떻게 유씨 가문 재산에 손 댈 생각을 했는지…”
준은 민망한 표정으로 연신 뒤통수를 긁적이며 메두사에게 빼앗은 약상자를 동해에게 건넸다.
이를 바라보던 메두사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동해를 노려봤고, 이에 얼음왕은 더욱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아닐세. 저 여자에게 필요한 것 같은데 가져가게 두, 두는 게 낫겠어. 어, 어차피 그, 그, 유씨 가문에서도 경매로 판매하는 물건이니, 서, 선물로 주는 셈 치자고.”
동해가 허둥대며 다시 옥 상자를 건네자, 메두사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공포에 질린 얼음왕의 표정에 이준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메두사가 훔쳐온 옥 상자를 저장반지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봐! 어, 어서 여기 자리 좀 만들게!”
냉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메두사를 보며 동해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명을 내렸다.
상대가 허둥대는 꼴이 우스웠는지, 얼음장 같던 메두사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번지자, 그제서야 조금 분위기가 풀렸다.
마침내 메두사 여왕과 은평강을 비롯한 세 투황이 자리에 앉자, 동해 역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믿는 구석이 있었군. 동생, 그런데…저, 저 여자는 대체 어떻게 끌어들인거야?”
여전히 메두사의 눈치를 살피는 동해를 보며 이준 역시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한 때 가한제국을 공포에 떨게했던 ‘얼음왕’치고는 너무 위엄이 없지 않은가.
“글쎄요…모셨다기보다…워낙 제 멋대로라, 크게 기대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운산은 제가 맡게 될 거예요. 저 사람은…기분이 내키면 도와준달까, 뭐 그런 사이예요.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잖아요.”
메두사 여왕은 이준의 말을 뻔히 듣고도 못 들은 척 가느다란 손을 들어 찻잔을 기울였다.
이에 동해는 이준과 그녀가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질문을 하지 못 하고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운산을 상대한다고? 음…”
그가 말을 잇지 못 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이준의 실력이 크게 상승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산과 상대하기에는 아직 부족해보였기 때문이다. 몇 년 후라면 모를까, 아직 그 공포스러운 운산의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동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준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며칠 동안 최대한 다른 가문이나 연금술사협회, 황실 쪽으로 연락을 해보자고. 해길이나 황실의 늙은 요괴 녀석만 해도 전부 투황 강자고, 가철 그 늙은이는 이미 투종에 가까운 상태야. 나도 자네가 준 연금비약을 먹고 다시 기력을 회복한다면 승산이 더 높아지지 않겠나?”
하지만 준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고, 이에 동해는 초조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운남종을 완전히 뿌리 뽑고 싶다면 운남종과 결탁한 다른 세력들도 정리해야 할거야. 뭐…삼대 가문이나 연금술사 협회, 황실쯤이나 되면 모를까 어지간한 세력들은 다 운남종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볼 수 있으니 자네 혼자서 그들 모두를 정리할 수는 없어.”
“셋째야, 동해 선배님 말이 맞아. 정말 운남종을 뿌리 뽑으려면 다른 세력들과도 손을 잡아야 할거다.”
결국 이정까지 나서서 동해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자, 마침내 이준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동해 선배님, 귀찮겠지만 다른 세력들과의 연합은 선배님에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저는 운남종과의 전쟁에 앞서 준비할 것들이 있습니다.”
“잠깐, 기다리게.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남았네.”
그 때, 동해가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고려할 것이 남아있습니까?”
이준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동해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정말로 운남종을 없애버릴 생각이라면 반드시 없애야 할 인물이 있지.”
“운산이나 장로들 말고 다른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까?”
다음 순간, 동해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자네도 6레벨 연금술사인 단왕고하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잘 알겠지. 만일 그 자가 운남종을 돕겠다고 나선다면 가한제국 10대 강자들 중 다섯은 부를 수 있을거야.”
순간 준의 이마에 식음 땀이 맺혔다. 자신 역시 연금술사가 아니었다면 운남종과 맞설 생각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어째서 고하에 대해 생각하지 못 했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였다. 확실히 수 십년간 가한제국을 호령한 강자인 동해답게, 얼음왕의 계산은 냉정하고도 정확했다.
“물론 최근 고하와 운남종 사이에 왕래가 뜸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운남종의 장로니까 말이야. 이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6레벨 연금술사를 죽이려들면 이는 어지간한 중견 세력 하나를 뿌리뽑는 것만큼이나 손이 많이 갔다. 이는 ‘약황’ 한샘을 죽이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실감한 바였다.
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이나 고민을 거듭하다가 조심스럽게 동해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혹시 단왕고하와 연락할 방도가 있습니까?”
“으음…해길을 통하면 연락을 할 수 있겠지. 고하는 연금술사 협회의 장로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해길 선배님에게 연락해서 단왕고하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요?”
“좋아. 그럼 내가 해길에게 연락을 해보겠네.”
이준이 고하와 정면으로 맞부딪히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동해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운남종만으로도 벅찬데 단왕 고하까지 적으로 돌린다면 일이 골치 아파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럼 고하의 문제도 선배님이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그리고 제 동료들이 쉴 만한 곳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그건 당연하지.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극진하게 모셔야지.”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대화가 대충 마무리 되자, 이준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자신의 피붙이를 바라봤다.
“이제 이씨 가문 사람들을 좀 보러 가야할 것 같아…”
“그래야지. 가문 사람들 모두 네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니까.”
이준과 이찬은 이정과 함께 유씨 가문의 저택을 벗어나 이씨 가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휠체어를 밀며 몇 개의 골목을 지나자 시끌시끌하던 소리가 비로소 조금씩 잦아들고, 호화롭던 건물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외진 골목길을 한참이나 더 걸어가자, 낡아빠진 저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야. 운남종의 수색을 피하려고 일부러 외진 곳에 숨어 지내는 중이야. 유씨 가문이 우릴 보호해주고 있고.”
이정의 설명에 이준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고, 이찬이 앞으로 걸어가 반쯤 썩은 대문을 열어젖혔다.
오래된 뜨락 안에서는 아이들이 사방에 흩어져 놀이를 즐기고 있었고, 그 뒤로 평범한 복장을 한 남자들이 무기를 들고 오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문이 열리자, 순간적으로 마당 안 남자들이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은 번개처럼 달려와 아이들을 등 뒤로 숨기고는 곧바로 무기를 빼들었다. 이 모습만으로도 그간 이씨 가문이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하하, 긴장할 거 없어. 지금 누가 왔는지 다들 보세요.”
이찬에 이어 휠체어에 앉은 이정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정의 뒤에는 몇 년 사이 한결 성숙해진 이씨 가문의 가주가 서 있었다.
“이준 도련님!”
“어서, 어서 셋째 장로님을 불러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가문 사람들을 보며 이찬과 이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노인 한 명이 황급히 마당으로 달려 나왔다. 그는 검은 망토를 걸친 소년을 마주하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셋째 장로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준은 눈물을 떨구는 노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아, 아닙니다. 도련님…송구스럽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준과 앙숙이던 셋째 장로가 눈물을 떨구는 모습에 이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