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화. 새로운 국면
“종주님, 그렇다면 사람들을 불러 운기웅장로와 다른장로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늦은 것 같네. 혼패가 완전히 깨어졌어.”
이어지는 장로들의 대화에 장내가 순간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투황 두 명과 투왕 일곱을 포함한 대군단이 몇 시간 만에 처참하게 부서지다니…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이었다.
“명령이다. 지금부터 운남산은 최고 경계태세에 돌입한다. 산으로 들어오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죽여라.”
“네!”
운산의 살기등등한 한 마디에 장로들은 황급히 답한 뒤 지체 없이 회의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장로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또 다시 회의실 구석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큭큭.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보아하니 이번에는 제 아무리 운남종이라 해도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야?”
“흥…나는 투종이다. 놈이 아무리 대단하다해도 이제 겨우 투황에 발을 거친 수준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죽여버릴 수 있어.”
“끌끌…부디 이번만은 그 호언장담이 허언이 아니길 바라지. 게다가 그 놈 몸 안에 「약존」, 약로의 영혼이 들어 있다더군. 만일 놈이 약존의 힘을 빌리면 영혼체는 우리가 상대하도록 하지. 자네는 이준 그놈을 확실히 처리하도록 해…부디 이번에는 실수가 없길 바라지.”
“흥, 걱정하지 말게. 이번 기회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보여주지.”
콰광—!
드넓은 하늘에 천둥 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울려퍼지고, 이내 새하얀 망토를 걸친 노인 둘이 피를 토해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퍽.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 위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커다란 구덩이 안에는 운기웅과 운형 두 장로가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의 옷은 넝마처럼 너덜너덜한 상태였으며, 새빨간 피가 몸에서 쏟아져 나와 새하얀 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두 장로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공중에서 검은 송곳을 짊어진 채 떠있는 이준을 노려봤다. 그들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바닥에 쓰러진 채 계속해서 입을 오물거렸지만,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피 때문에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잠시 후, 마침내 두 사람의 눈에 담긴 생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두 명의 투황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으로 추락해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리는 광경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입조차 벙긋하지 못하고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 * *
황성의 높은 탑 위…
운기웅과 운형 두 사람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가철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런…실로 무시무시한 놈이 되어 돌아왔구나…한 시간만에 투왕 넷에 투황 둘이라니…이제 이 전쟁은 운남종이 멸문하든지, 이씨 가문이 모두 죽을 때까지 결코 끝나지 않겠군.”
사실 그는 이준이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강자를 데려오다니…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 이었다. 그가 이끌고 있는 강자들의 힘은 운남종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본래 가한제국의 정세는 호랑이 하나가 늑대 여럿을 다스리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호랑이 한 마리가 새로 들어왔으니, 실로 한 치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두 호랑이는 서로의 숨통을 끊어놓을 때까지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씨 가문, 문씨 가문, 연금술사 협회에 모두 연락을 돌려야겠군…어느 쪽 호랑이에게 줄을 서야 한단 말인가…운남종에게 줄을 댔다가 이준이 승리하면 이씨 가문에 의해 멸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이준에게 줄을 댔다가 운남종이 승리한다 해도 멸문을 피할 수 없겠구나.”
그 시각, 두 투황의 기운이 소멸되자, 다른 지역에서도 적지 않은 소란이 일어났다. 투황급 강자는 가한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가철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력들 역시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만일 이씨 가문과 유씨 가문이 손잡고 운남종을 쓰러뜨린다면 유씨 가문이 삼대가문 중 명실상부한 우두머리로 우뚝 설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운남종의 편에 서자니 이준이 승리할까 두려웠다. 또, 운남종이 승리한다 해도 지금까지 그들의 행태로 미루어보아 온 가한제국의 권력과 부가 그들에게 넘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임에 틀림이 없었다.
* * *
하지만 정작 이준은 자신이 운남종 장로를 죽인 것이 가한제국의 권력 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따위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가지, 운산을 꺾고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성질이 급해서 그만…선배님의 결투를 방해했군요.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니 이 정도는 양해해 주십시오.”
두 명의 투황이 숨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한 준은 민망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동해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에 동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기웅과 운형을 일격에 격살한 이준의 실력 앞에 동해는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아마 자신이 이준과 맞붙게 된다 해도 얼마가지 못해 패배하리라. 물론 언젠가 눈 앞의 청년이 투기대륙을 호령할 강자가 되리라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 날이 이토록 빨리 찾아오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실로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성장 속도였다.
“선배님…3년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하. 이 녀석. 3년 새에 실력만 는 것은 아닌 것 같구나.”
이준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자, 동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농을 던졌다. 순간 목숨을 건 도박이 성공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감사 인사를 마친 이준은 이내 손가락에 끼워진 자신의 저장반지에서 투명한 옥병 하나를 꺼내어 그것을 동해에게 내밀었다. 옥병 안에는 짙은 약향을 내뿜는 보라색의 연금비약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것은…3년 전에 약속드린 물건입니다.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하하! 고맙네 동생, 내 꼭 이 물건을 위해서 자네와의 의리를 지킨건 아니네만, 자네가 나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역시 자네 편에 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준이 내민 연금비약을 받아 든 동해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메두사에 의해 염력을 봉인 당한 뒤 오랜 시간 전성기 시절의 실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그였지만, 이제 꿈에도 그리던 연금비약을 손에 넣었으니, 가한제국을 호령하던 ‘얼음왕’의 진짜 실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입이 귀에 걸리자, 이준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닙니다 선배님. 이것은 3년 전의 약속을 지킨 것뿐이니, 그간 이씨 가문을 돌봐주시고 저와의 의리를 지켜주신 것에 대해서는 언젠가 따로 보상을 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동해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 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지상에 있던 운남종의 제자들는 절반 가까이 줄어있었고, 그나마 나머지 절반도 모두 황군에게 체포되거나 무기를 버린 채 항복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두 명의 투황과 일곱 명의 투왕이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운남종 내에 아직 얼마나 많은 강자들이 남아있을지는 몰랐지만, 아홉명이나 되는 장로를 잃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적지 않은 손실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제도의 군사들이 쑥대밭이 된 거리를 정리하기 시작하자, 황도내에서 가슴을 졸이며 두 거대 세력의 싸움을 지켜보던 구경꾼들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상황이 일단락되자, 허공 위에서 운남종의 투왕들과 사투를 벌였던 이찬이 날개를 펄럭이며 이준을 향해 날아왔다.
이에 이준은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자신의 곁에 있는 이정을 가리켰다.
“둘째 형! 여기 형이 있어! 여기 정이 형이 있다고!”
이준의 말을 들은 이찬은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등 뒤에 펼쳐진 날개를 펄럭이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큰 형, 별일 없었지?”
2년 전 보다 눈에 띄게 야위고 수척해진 동생의 모습에 이정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고생 많았다. 이렇게 셋째와 다시 가한제국으로 돌아와 주다니…정말 고맙구나.”
다음 순간, 이찬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꿈에도 그리던 형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부상은 없었다. 이는…형이 휠체어에 앉게 된 것이 하루 이틀 전 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형…그런데…다리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별 거 아니야…”
이에 이정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더니 이찬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보다, 어떻게 2년 만에 갑자기 투왕이 된 거야?”
이에 이찬은 흠칫 놀라 황급히 답했다.
“헤헤…전부 셋째 덕이지 뭐. 아니면 내 실력으로는 기껏 해봐야 투령 아니었겠어?”
이찬은 형의 질문에 답하는 동시에 동생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투왕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말아달라는 의미인 듯했다. 이찬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아차린 준은 보일 듯 말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방법을 찾아내면 될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지금 말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 굳이 다리를 잃은 큰형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준은 조용히 이를 악물며 둘째 형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찾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불구가 된 정의 다리에 대해서도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리는 어떻게 된거야?”
준이 첫째 형의 넓적다리를 누르며 물었다.
“응. 도망갈 때 독 화살에 맞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양쪽 다리에 감각이 사라지더군. 그래도 지금은 익숙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오히려 잘됐을지도 몰라. 다리가 이렇게 된 이후에 수련에 집중한 덕에 투령이 되었거든.”
이정은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데에 그다지 상실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 씩 웃음을 지었다.
“그냥 평범한 독이라면 제거할만한 방법이 있긴 한데…이미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천천히 해야 할거야.”
이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하.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나누게. 가자고. 유씨 가문이 엉망이 되긴 했어도 깨끗한 공간 하나쯤은 있을 걸세.”
그 때, 곁에서 세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동해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이에 세 형제는 미소 띤 얼굴로 동해를 따라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이어 사람들이 한꺼번에 대청 안으로 밀려 들어가 하나 둘씩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임동수, 임수혁, 류지안 등 몇 명은 이준의 곁에 아무렇게나 착석했고, 도씨 삼형제 등 이씨 가문의 강자들은 꼿꼿한 자세로 가주의 뒤를 지켰다.
잠시 후, 대청 안으로 유씨 가문의 핵심 인사들이 걸어 들어왔다. 그 중에는 이씨 가문을 운남종에 넘기자고 주장했던 장로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시종일관 이정의 눈치를 살피며 연신 억지웃음을 지어대고 있었다.
“동해 선배님은 이씨 가문과 운남종이 앞으로 가한제국 안에서 공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유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주요 인사가 모두 모이자, 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음…일단 동생에게 상황을 설명해줘야겠군. 3년 전 까지만 해도 운남종의 투황 강자는 진율희 한 명 뿐이었지. 하지만 이젠 운기웅, 운형을 제외하고도 셋이나 되는 투황이 있네. 투왕은 더 많고. 운산에게 무언가 실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야. 한 두 명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단기간 내에 동시에 실력이 상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