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9화. 지옥도
“운남종이 내부까지 침입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습니다!”
“다들 침착해. 정면으로 싸우지 말고 활을 들어 파멸의 화살을 준비해!”
“파멸의 화살이 백 촉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모두 사용해! 놈들에게 유씨 가문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어라!”
그렇게 지상에서 주희가 이를 악물고 호위병들을 지휘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새까만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등 뒤에 검은 송곳을 짊어진 새카만 그림자는 주희의 곁에 내려서자마자 피식 웃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희 누나, 3년 새에 더 예뻐졌네요.”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적의 공세 앞에서도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준을 마주하는 순간, 주희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이 나쁜 자식! 왜 이렇게 늦었어!”
“고마워요 누나…누나와 동해 선배가 저희 가문을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문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예요. 이 은혜는 정말 평생 잊지 않을게요.”
울먹거리는 주희의 표정을 보자, 이준 역시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동안 주희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오늘 주희와 동해는 물론이고 유씨 가문 전체가 몰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실로 목숨을 걸고 이씨 가문을 지켜온 것이다.
“아, 맞다! 저쪽에 정 오라버니가 있어!”
주희가 뒤로 돌아 전장 한 켠을 가리키는 순간, 준의 눈에서는 끝내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장발의 사내 하나가 휠체어에 앉은 채 환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큰 형?”
“준아, 드디어 왔구나…하하. 역시 내 동생이다.”
3년 전보다 눈에 띄게 성숙해진 이준을 보며 이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이게 뭐야! 왜, 왜 다리가…”
“아하하. 별일 아니야. 죽은 사람이 몇 인데 고작 다리 두 개 가지고…머리나 손은 멀쩡하니 걱정하지 마.”
“형…”
준은 꿈에도 그리던 형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소리 없이 눈물을 떨궜다.
“고생 많았다.”
이정은 조용히 웃으며 동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준은 한참동안이나 숨죽여 울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주희 누나, 정말 고마워. 이제 이 곳은 나에게 맡겨!”
말을 마친 준은 주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름다운 청록색의 날개를 펄럭이며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조심해!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
하지만 이준은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곧바로 손을 휘둘러 청록색의 불꽃을 피워냈다. 신비한 불꽃을 들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주희 누나. 유씨 가문 사람들을 뒤로 철수 시켜줘.”
이준의 한마디에 주희는 망설임 없이 방어선에 있던 유씨 가문의 호위병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유씨 가문 사람들이 뒤로 빠지자, 그와 동시에 하얀 무리들이 벌떼처럼 밀려 들어왔다.
쾅!
그러나 운남종의 제자들이 유씨 가문의 정원을 점거하는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청록색의 불꽃이 떨어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재앙에 운남종의 제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사이, 또 다시 청록색 불꽃이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쾅! 쾅! 쾅!
유씨 가문의 본부 안으로 밀려들어온 운남종의 제자들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몸부림치다 참혹한 괴성을 내지르며 재가 되어 사라졌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공포스러운 청록색 불꽃의 위력 앞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운남종의 제자들은 홍수처럼 계속해서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뒤에 잇는 사람들은 시야가 가려져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 한채 제 발로 지옥불로 뛰어들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운남종의 대병력이 유씨 가문의 앞마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린 순간, 새하얀 망토를 걸친 수 백 명의 투사들은 순식간에 오합지졸이 되어 이곳저곳으로 달아나기 바빴다.
운남종의 제자들이 썰물처럼 사유지 밖으로 후퇴하자, 끝없이 울려퍼지던 폭발음이 비로소 잦아들기 시작했다.
청록색의 불꽃이 사그라 들자, 정원 가득히 쌓인 회백색의 잿더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새하얀 망토를 걸친 이들의 육신이 만들어 낸 회백색 무덤이 바람에 날리는 광경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저도 모르게 손발을 덜덜 떨고 말았다.
사람의 몸으로 만들어 진 회백색 가루가 날리는 살풍경한 모습에 유씨 가문의 정원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적은 한참동안 지속 되었다. 곧이어 사람들의 눈빛이 검은 송곳을 짊어진 청년에게로 향하자, 그의 손위에서 반투명한 유백색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후퇴하는 운남종의 제자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상공에 떠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사지를 덜덜 떨었다.
정원 안에 있던 유씨 가문 사람들 역시 바깥쪽에 쌓인 회백색의 잿가루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주희도 이준이 만들어 낸 공포스러운 장면에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는 이제는 청년이 된 소년이 운남종에게 얼마나 큰 원한을 품고 있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유씨 가문의 대문 밖에서 뿌연 흙먼지가 일어나며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자, 검은 옷을 입은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와 달아나는 운남종의 제자들을 포위하는 것이 보였다.
“황군…?”
주희는 당황한 듯 말을 타고 달려오는 무리를 보며 잠시 머리를 굴더니 이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했다.
“머리를 잘 썼군… 유씨 가문이 운남종을 물리칠 것 같으니까 잽싸게 줄을 대는건가.”
“지금 병사를 보낸 건 준이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겠지. 조금 아니꼽기는 하지만, 우리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손해 볼 게 없어. 무엇보다 우리한테는 운남종이라는 공적이 있으니까.”
이정의 담담한 말에 주희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호위병들에게 길을 터줄 것을 명했다.
곧이어 검보랏빛 망토를 걸친 여인 하나가 한 무리의 기병을 이끌고 달려왔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보라색의 왕관이 반짝 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황실의 법도를 어지럽힌 범죄자들이다! 모두 잡아들여라!”
말 위에 올라탄 황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전의를 상실한 운남종의 제자들은 저항조차 하지 않고 분분히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는 자들도 있었다.
운남종 제자들이 저항하지 않는 모습에 초아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남종의 제자들은 모두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기 때문에 저항했더라면 황군 역시 적잖은 손실을 입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초아는 바닥에 쌓인 잿더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 역시 이준이 만들어 낸 지옥도를 목도하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었다. 앞으로 황실의 운명은 이 사내의 손에 달려 있으리라.
“임현이라 불러야 할지, 이준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요.”
낯선 여인의 친숙한 인사말에 이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했지만, 누구인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초아 공주님이야. 너도 본 적 있잖아.”
주희가 다가와 핀잔을 주자, 준은 그제서야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잠시 후, 초아가 말에서 내려 친절한 태도로 주희의 손을 맞잡았다.
“주희 언니, 미안해요. 일찍 오려 했는데…”
속이 빤한 거짓말이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황실과 손을 잡고 운남종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주희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공주의 손을 맞잡았다.
“지금은 자세한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으니 일을 다 해결한 다음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죠.”
하지만 준은 주희와 달리 초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공중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공중에서는 자신이 이끌고 온 동료들이 운남종의 장로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적들은 방어하기에 급급해 변변한 반격 한번 하지 못 하고 있었다.
“큽!”
그 때, 네 명의 투왕 강자가 중상을 입은 채 피를 뿜으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유씨 가문과 운남종의 전투가 끝을 보이는 듯하자, 거대한 황도 전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황도에 있던 수 십 만 명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결과였다.
* * *
운남산 정상…
“이 기운은…어떻게…어떻게 저 자식이 살아있단 말이냐!”
폭발적 기운이 감지 된 곳은 분명 황도였다. 그리고…그 곳에는 오늘 자신이 직접 파견한 운남종의 장로 아홉과 수 천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운산은 참지 못 하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밀실 밖으로 나아갔다.
* * *
운산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장로들이 모여 고성을 지르고 삿대질을 해대며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모두 조용히 하지 못 하겠느냐! 대운남종의 장로들이 어찌 이리 담이 작단 말이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운산에 모습에 회의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마침내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자, 운산이 서늘한 표정으로 장로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운산의 물음에 노인 하나가 하얗게 질린 채 황급히 달려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종주님, 운기웅 장로의 혼패가 깨졌습니다. 운형을 비롯한 다른 장로들의 혼패도 거의 불빛이 꺼진 상태입니다.”
노인의 보고에 장로들 사이에서 일제히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번에 유씨 가문을 치기 위해 운남종에서는 무려 절반에 달하는 장로와 제자들을 투입했었다.
헌데 하룻밤 사이에 유씨 가문을 끝장내리라 믿었던 전력이 승리는커녕 참패를 면치 못하자 제 아무리 운남종이라 해도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운참 장로, 자네가 잘 못 본 건 아닌가?”
잠시 후 , 장로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그게 말이 되는가! 투황 둘에 투왕이 일곱이야! 거기에 수 천 명의 제자들이 투입되었단 말이야! 가한제국 전체를 뒤져보아도 이런 전력에 대항할 세력은 없단 말일세!”
“혹시 삼대 가문과 황실이 손을 잡은 건 아닐까?”
누군가의 추측에 장로들이 하나 둘 고개를 끄덕였다. 단독으로 그 전력을 상대할 수 있는 세력 따위가 있을리 만무했으니, 삼대가문과 황실이 손을 잡은 것이 틀림 없어보였다.
“종주님, 이렇게 된 이상 삼대 가문과 황실을 가한제국에서 완전히 밀어내게 해주십시오!”
“맞습니다, 종주님. 피로 대가를 치르게 해줍시다!”
그러나 운산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삼대 가문의 연합이 아니야…이씨 가문의 그 잡놈이 돌아왔느니라.”
“이씨 가문이라니 그게 무슨…”
“설마 이준 말입니까?”
“이준?”
기억 속 저편에 묻어 뒀던 이름이 다시금 운남종 장로들의 머릿속에 스쳤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3년 전, 20살도 되지 않은 소년이 운남종에 들어와 운령을 살해하던 광경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그…그럴리가…그 놈은…죽지 않았습니까?”
“누가 죽었다고 했나?”
운산이 싸늘한 얼굴로 장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놈의 기운을 느꼈네. 운기웅 장로 역시 그 놈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어.”
“장로들이 이준을 만난 게 사실이라 해도, 투황 두 명에 투황 일곱입니다… 투황 서너 명을 만나도 이 정도로 빨리 당하진 않을 겁니다. 이준이 3년 만에 투종이라도 됐단 소리입니까?”
장로 한명이 질문을 던지자, 운산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투황 계급은 되는 것 같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투황이라니. 3년 전만 해도 이준은 기껏해야 대투사나 투령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3년 만에 투황의 경지에 이르다니…이는 단순히 천재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의 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