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8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태초의 힘!”
쾅!
뒤이어 시끄러운 폭발음이 귓전을 때리고 천지가 울리며 사방으로 거친 바람이 퍼져 나갔다.
불시에 터져 나온 강렬한 일격에 운남종의 네 장로는 튕겨나가 듯 수십 미터를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투왕 둘과 투황 둘, 네 사람의 공격이 상대를 쓰러뜨리기는커녕,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 것이다.
한 사람의 힘으로 투왕과 투항 넷의 협공을 물리칠 정도라니…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는 온 가한제국을 통틀어 오로지 한 명, 운산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운산이 왜 운남종의 장로들과 맞서겠는가?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 일제히 같은 생각이 스쳤다. 운산급의 강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동해를 도와 운남종의 장로들에 맞선 것으로 보아, 그는 운남종의 적임에 틀림이 없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짜내며 그의 정체를 유추했지만, 누구도 괴한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도움을 받은 동해마저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청록색의 불꽃에 휩싸인 괴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보아 괴한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넷의 협공을 이리도 간단히 박살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은빛 섬광과 함께 나타난 괴한으로 인해 허공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청록색 불꽃을 두른 괴한이 누구인지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잠깐 동안 정적이 흐른 뒤, 참다 못 한 운기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하하하!”
잠시 후 청록색의 화염 덩어리에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웃음소리로 미루어보아 아주 젊은 사람인 듯 했다.
어딘가 낯익은 그 웃음소리에 동해의 머릿속에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스쳤다.
* * *
한편, 황성 안에 있는 연금술사협회와 나씨 가문, 황실의 강자들은 귀신처럼 나타난 정체불명의 강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저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 정도의 강자라면, 운남종 천하가 되어버린 가한제국을 뒤엎을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삼대가문과 연금술사 협회, 황실이 그에게 붙는다면, 운산과 운남종의 몰락은 거의 확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황성안의 모든 강자와 이름 있는 세력들은 모두 목을 빼고 그 사내의 정체가 밝혀지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청록색의 불길이 걷히고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의 몸이 드러나는 순간, 운형을 비롯한 네 장로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사람마냥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이준!?”
“네…네가 어떻게!”
반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난 동해의 얼굴에는 활짝 웃음 꽃이 피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찍이 본 적 없는 기쁨과 놀라움이 가득했다.
“동생! 하하하하! 정말 동생인가!”
* * *
한편, 황성의 높은 탑에 서서 상황을 살피던 가철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고나서는 미친 사람마냥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믿기지가 않는군,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저 녀석일 줄 이야!”
“할아버지…지금 나타난 저 거대한 기운이 누구인지 알고 계신거예요?”
“예전에 연금술사대회의 그 임현이다. 너도 알고 있겠지?”
‘임현’이라는 말에 초아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임현’은 이준이 연금술사 대회에 참가할 때 썼던 가명이었고, 이준이 운남종과 철천지 원수라는 것은 가한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가 운남종의 장로 넷을 너끈히 상대할만한 강자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은 황실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하하하, 3년 만에 이 정도로 성장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3년 전에 고작 대투사였던 놈이…! 내 범상치 않은 놈이라고 생각은 했다만 이건 정말로 상상조차 하지 못 했구나! 이 정도라면 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수준이 아닌가! 푸하하하!”
가철은 운산을 제외하면 명실상부한 가한제국의 최강자였고, 어지간해서는 누군가를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라고 평했다는 것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바로 그의 손녀인 초아였으니, 그녀의 입가에는 곧바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지금 바로 군사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저 자와 할아버지, 그리고 유씨 가문이 힘을 합친다면 운남종에 대적할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유씨 가문과 황실, 그리고 저 이준이라는 자가 힘을 합쳤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문씨 가문에서도 우리와 손을 잡으려 들지 모르잖아요. 그들 역시 운남종의 독주를 견제하고 싶을테니까요. 운산이 진율희 종주를 몰아낸 뒤로 설아의 입지 역시 위태로워졌으니 나씨 가문도 우리와 손을 잡고 싶어 할지도 모르고요.”
이에 가철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은 순간 망설이는 것은 신중한 것이 아니라 멍청한 짓이었다.
* * *
반면, 나씨 가문은 어둡다 못해 거의 초상집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손주 사위가 될 뻔 했던 사내가 20살 남짓한 나이에 가철만큼의 힘을 손에 넣었으니, 어찌 아깝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생사의 문에 들어간 이래 소식이 끊겼다고는 하나, 자신의 손녀인 나설아는 아직 운남종의 일원이었으니, 참으로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운산과 진율희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차기 종주 이야기도 물 건너갔으니, 운남종이 천하를 손에 넣는다면 나씨 가문 역시 다른 가문들처럼 위태롭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느 길로 가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옥인 것이다.
“아버지…”
“끌끌끌…”
나원승의 입에서 씁쓸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자, 나원철의 얼굴은 더욱 흙빛이 되었다.
“아버지, 전부 설아의 성질머리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됐다, 이게 모두 설아 탓은 아니다. 이준이 내 각인 독을 제거해줬음에도 난 그가 운남종에게 쫓기던 때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으니…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나원승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쳤지만, 지나간 일을 돌이킬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 * *
검은 무기를 메고 있던 청년은 천천히 뒤를 돌아 동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지금까지 이씨 가문을 돌봐주셨다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푸하하! 정말로 자네였군! 믿을 수가 없네 믿을 수가 없어! 하하하하!”
동해는 얼음왕이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잔뜩 흥분한 채로 입이 찢어져라 웃어댔다. 반면 상대가 바로 ‘그’ 이준이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운남종의 네 장로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마냥 창백하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네놈이…네놈이 어떻게 살아있는 것이냐!”
운형이 창백한 얼굴로 더듬 더듬 거리며 입을 열자, 이준은 씨익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흥, 운산 그 빌어먹을 늙은이도 살아있는데 새파랗게 젊은 내가 죽으면 세상이 어찌 돌아가겠어. 늙은이가 먼저 가는게 순리지, 안 그래?”
이준의 비아냥에 네 장로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갔다. 갑자기 나타난 이준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혼자였다. 제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 해도 단신으로 운남종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정신 나간 자식. 감히 종주님을 모욕해? 네 녀석을 처리하는 데에는 종주님이 나서실 필요도 없다.”
말을 마친 운기웅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저장반지에서 신호탄을 꺼내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그러자 불꽃이 터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먼발치에서 빠른 속도로 다섯 가닥의 빛이 날아왔다. 그들의 염력 날개로 보아 다섯 사람 모두 투왕 계급 강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씨 가문을 없애기 위해 운남종에서는 실로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일곱 명의 투왕과 두 명의 투황…운남종은 정말로 오늘 밤 유씨 가문을 멸망시킬 요량인 것이 틀림없었다.
“흥, 그 때나 지금이나 자랑할건 쪽수 뿐인가보지? 준비한게 그게 다야?”
하지만 염력 날개를 펄럭이는 총 아홉명의 강자를 앞에 두고도 이준의 태도는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좋아. 그럼 이쪽도 준비한 선물을 풀어볼까? 설마 3년 만에 돌아오는데 선물도 없이 빈손으로 왔겠어?”
이준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허공을 가르고 열 개의 빛줄기가 나타났다.
형형색색의 섬광들은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와 운기웅, 운형을 비롯한 운남종의 아홉 장로를 포위했다.
이에 자신감이 넘쳤던 운형의 얼굴이 다시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최소한 투왕급 강자가 열…이준이 데리고 온 전력은 실로 운남종에 맞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동생, 저게 정말 모두 자네 편이란 말인가?”
동해 역시 운남종의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이준의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실력으로는 이준이 데려온 열 명의 힘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온 천재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불과 3년 만에 삼대가문을 가뿐히 짓밟을 정도의 전력을 이끌고 있었다.
이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또 다시 그의 얼굴에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푸하하하! 역시! 대단해! 내가 사람을 아주 제대로 봤구만! 불과 3년만에 잘도 이런 강자들을 모아왔어!”
이에 동해의 말을 듣고 있던 이준의 얼굴에도 서늘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네, 그나저나 투황 둘에 투왕 일곱이라니. 저것들을 모두 잃으면 운산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요.”
이준의 살기등등한 태도에 운남종 장로들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고 말았다. 정말로 투황 둘에 투왕 일곱이 모두 죽어나간다면 제 아무리 운남종이라도 웃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하. 이준, 저 녀석들이 모두 운남종 놈들이야? 이런 놈들하고 맞설 생각을 했다니, 배짱 두둑한거야 알고 있었지만 정말 대단한데?”
그 때, 상대를 바라보던 임동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스무살 남짓한 청년이 저 정도 전력을 가진 집단과 전쟁을 벌이려 하다니, 이 정도면 단순히 배짱이 좋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동수의 농담 아닌 농담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요. 그래도 이런 싸움에 자청해서 끼어든 선배만 하겠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놈들 중 단 한 놈도 운남종에 돌아가지 못 하게 해주세요.”
“좋아!”
이준의 말에 떨어지기 무섭게 임동수와 다른 이들 모두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운남종의 장로들을 향해 돌진했고, 이에 운남종 강자들도 모든 염력을 끌어내며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운남종의 제자들아! 우리는 오늘 유씨 가문의 씨를 말리기 위해 왔다! 동요하지 말고 목숨을 바쳐 유씨 가문을 쓸어버려라!”
운기웅이 소리치자 지상 위에 있던 운남종의 제자들은 동시에 함성을 내지르며 저마다 무기를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곧이어 미친 듯이 쏟아지는 공세에 유씨 가문의 방어선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해 선배님, 저 투황 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머지 투왕들은 제 동료들이 상대하겠습니다.”
아래쪽 상황을 살펴 본 이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동해에게 말했다. 현재 지원을 온 사람들은 전원이 투왕급 강자로, 메두사 여왕을 비롯한 세 명의 투황은 아직 투입할 생각이 없었다. 운남종을 확실하게 박살내기 위해서는 진짜 실력자들을 감춰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네!”
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해의 등 뒤에 돋아난 얼음 날개가 새하얀 얼음 조각을 뿜어내며 펄럭였다. 얼음왕이 운남종의 두 가짜 투황을 향해 날아가자, 이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지상의 상황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