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7화. 피바람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운형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해. 이게 마지막 경고다. 만일 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순순히 내놓으면…”
“끌끌…운산이 투종이 되더니 노망이 났나보구나. 아니면 이 얼음왕이 그런 거래에 응할 만큼 우습게 보였단 말이냐?”
하지만 말을 꺼내기 무섭게 동해가 피식 웃으며 말허리를 자르자, 운형과 운기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흥, 좋다. 후회하지 않길 바라지. 운남종의 모든 제자들은 장로 운형의 명을 받들어 유씨 가문을 쓸어버려라!”
그리고 운형의 목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새하얀 그림자가 구름처럼 허공을 뒤덮었다.
운형의 명령이 떨어지자, 유씨 가문을 에워싸고 있던 운남종의 제자들이 맹렬한 기세로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죽여라!”
그렇게 운남종의 제자들이 홍수처럼 유씨 가문을 향해 밀려 들던 그 때, 갑자기 수 많은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레 쏟아진 화살비에 운남종의 기세가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무수한 섬광이 번쩍이며 화살을 막아냈고, 뒤이어 백색 무리가 다시 유씨 가문의 진영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운남종이 막 유씨 가문의 대문을 넘으려는 순간, 기이한 활소리가 울리며 새빨간 화살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붉은 화살은 운남종 제자들의 염력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몸에 구멍을 뚫었고, 순식간에 수 십 명의 제자들이 힘없이 바닥에 꼬꾸라졌다.
그렇게 지상에서 유씨 가문의 호위대와 운남종의 제자들이 맞부딪히고 있는 사이, 허공에서는 두 장로와 얼음 왕의 싸움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동해의 계획대로라면, 운형과 운기웅 두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찌됐든 이미 예전부터 투황의 경지에 올라 가한제국을 호령하는 강자로 군림해 왔던 동해와 모종의 수단으로 투황이 된 가짜 투황 둘 사이에는 그만큼의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천과 동해가 운남종의 두 장로를 향해 몸을 날리려는 순간, 지상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 유천의 앞을 막아섰다.
“운담? 운석? 설마 네놈들까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을 발견하는 순간, 유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 역시 운남종의 장로로, 운기웅와 운형보다는 실력이 떨어졌지만, 일찍이 투왕 수준에 오른 강자였다.
“우리는 자네들에게 기회를 주었네. 그러니 우릴 원망하지 말게.”
운담과 운석 두 사람이 유천을 막아서는 것을 확인한 운형과 운기웅은 곧바로 동해를 향해 달려들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무시무시한 염력이 폭발하며 허공에 파문이 일었다.
“이 두 사람은 내가 맡을 테니 걱정 말고 자네 일이나 신경써!”
동해의 몸에서 폭발한 염력을 감지한 운담과 운석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날개를 펼쳐 유천에게 돌진했다.
“네 이놈들! 좋다! 오늘 우리 유씨 가문이 끝장이 날지, 운남종이 끝장이 날지 보자꾸나!”
유천 역시 이에 맞서 날개를 펄럭이며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수많은 시선 속에서 날개를 움직이며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모든 시선이 강자들의 전투로 집중 됐다. 오늘, 유천과 동해 두 사람에게 제국 삼대가문의 명운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력의 운명도.
* * *
황성, 성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은 탑 위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선 채 먼 곳에서 벌어지는 두 세력의 전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삼베옷을 입은 노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할아버지, 정말로 지켜보고 있어도 되는 걸까요?”
삼베옷을 입은 노인의 뒤에 서 있던 늘씬한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보랏빛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휴우. 초아야, 너도 운남종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졌는지 알지 않느냐.”
“할아버지! 운남종의 목표는 유씨 가문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잖아요! 지금 당장 연금술사 협회나 삼대 가문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요! 이대로 유씨 가문이 멸망한다면 다음은…!”
이에 노인은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휴. 일단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꾸나. 절대로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 * *
한편, 연금술사 협회의 건물 위에서는 연금술사 망토를 걸친 노인 하나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해길 회장…”
“일단 상황을 두고 봅시다…”
해길이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뒤에 있던 노인 역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내며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나씨 가문의 일원들 역시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백색 구름이 유씨 가문 본부의 상공을 뒤덮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이 일은…”
“기다려라.”
나원승의 얼굴 역시 해길이나 황궁의 노인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찌됐든…설아는 운남종의 차기 종주 후보였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는 다른 가문보다 더욱 신중해야 한다.”
* * *
문씨 가문 역시 다른 가문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들 역시 황실이나 다른 유력한 세력과 손을 잡고 운남종에 맞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투종의 경지에 오른 운산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어 그저 납작 엎드려 눈치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황실과 삼대가문, 연금술사 협회마저 손을 쓰지 못 하고 자신들의 본거지에 웅크려 있을 때, 황도와 수 키로미터 떨어진 지역에서 십 여 마리의 거대한 미행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챙!
붉은 피로 물든 검이 맞부딪히며 불똥이 튀고, 날카로운 검이 육신을 베는 둔탁한 소리가 정원 안에 울려 퍼졌다.
운남종의 제자들과 유씨 가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맞부딪히자, 순식간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갔다.
새로이 운남종의 제자가 된 자들은 운남종의 옷을 입고 운남종의 제자라는 호칭을 받았을 뿐, 사실상 잡병이나 다름이 없었다. 반면 유씨 가문을 지키는 호위병은 십 여년에 걸쳐 거르고 거른 정예 중의 정예였으니, 백색 망토를 걸친 무리가 구름처럼 달려들어도 그리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유씨 가문의 건물 앞에는 역한 피비린내가 가득했고, 쇠붙이가 뒤엉키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싸움이 시작된 지 불과 수 분 만에 유씨 가문의 담장은 마치 붉은 천을 두른 듯 새빨갛게 물들었다.
* * *
한편, 공중에서는 동해와 유천이 각각 운남종의 두 장로와 맞서고 있었다.
유천의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호흡 역시 눈에 띄게 거칠어져 있었다. 그 역시 만만찮은 강자였지만, 운남종의 투왕급 장로 둘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았다.
“너무 고집 피우지 말게. 사실 우리 하나 하나는 자네보다 약하지만, 그렇다 해도 둘이 합쳐 자네 하나를 어찌 못할 정도는 아니야.”
연신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서는 유천을 보며 운담이 말했다.
하지만 유천은 운담의 조롱에도 아랑곳 않고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동해 쪽의 상황을 살폈다.
동해와 운남종의 두 장로는 눈에 비치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공방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쪽 역시 두 사람이 연합해 동해에게 맞서고 있었으니 제 아무리 얼음왕이라 해도 쉽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운기웅과 운형은 하루 이틀 합을 맞춘 것이 아니었으니, 실로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늘 유씨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운남종의 네 장로를 물리쳐야 했다.
‘동해님이 이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으로 시간을 끌어야 해!’
이에 유천은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염력을 끌어올리며 아래쪽을 살폈다. 동해도 자신을 살필 수 없고, 자신도 그를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아래쪽이라도 상황이 좋아야 했다.
지상에서는 운남종의 제자들과 유씨 가문 호위대간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물론 유씨 가문 호위대의 힘이 운남종의 제자들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나, 상대의 머릿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였다.
* * *
시간이 흐르며 황도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폭음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유씨 가문의 저항은 실로 제국의 삼대가문의 위용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파도마냥 끊임없이 몰아치는 운남종의 공세 앞에 결국 대문을 내주고 말았다.
대문이 열리자 순식간에 유씨 가문의 거대한 정원이 새하얀 망토를 걸친 무리들로 가득 찼다. 이에 두 가문의 대결을 바라보는 구경꾼들 중 누구도 오늘 유씨 가문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컥…!”
그리고 유씨 가문의 호위대가 하나 둘 Tm러져가는 사이, 허공에서는 유천이 또 다시 울컥하고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두 장로의 공격을 받은 유천은 결국 창백해진 얼굴로 계속해서 피를 뿜어내다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유씨 가문의 호위대원 중 하나가 번개처럼 몸을 날려 그를 받아냈다.
“대장로님!”
결국 유천의 패배로 인해 지상에 있던 호위대원들의 사기가 급격하기 떨어지기 시작했고, 전황은 더욱 빠르게 운남종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한편, 유천이 전투력을 상실하자, 운범과 운석은 재빨리 방향을 바꿔 동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유천과의 대결로 인해 두 사람 역시 상당한 염력을 소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형과 운기웅에게 손을 보태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운남종의 장로 넷이 나란히 선 모습에 시종일관 얼음장처럼 차갑던 동해의 얼굴에도 동요한 기색이 떠올랐다. 제 아무리 한 때 가한제국을 벌벌 떨게 한 얼음왕이라 해도 오늘 목숨을 건지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동해의 기운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 유씨 가문을 제외한 삼대 가문의 주요 인사들과 가한 제국 황실의 주요 인사, 그리고 해길을 비롯한 연금술사 연합의 강자들은 모두 오늘이 유씨 가문의 마지막 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내일 아침 동이 트면, 이제 가한제국의 그 어떤 세력도 운남종에 거스를 수 없으리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떨구는 순간, 돌연 황도의 성벽 밖에서 비행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성벽 밖에 나타난 거대한 비행 마수의 무리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밤하늘 위에 거대한 파문이 일며 은빛 섬광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와 동해의 앞을 막아섰다.
콰앙-!
다음 순간, 갑작스럽게 청록색의 불꽃이 일렁이며 운남종의 네 장로가 연합해 만들어낸 거대한 빛을 가로막았다.
청록색의 불꽃과 네 장로의 염력이 맞부딪히자,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오고, 허공에 파문이 일었다.
곧이어 두 힘이 맞부딪힌 곳에서 일어난 광풍이 주위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갑자기 나타난 괴한의 무시무시한 힘 앞에 동해는 물론이고 저 멀리 떨어져있던 해길과 가철, 나원철과 나원승마저 등에서 식은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두 명의 투황과 두 명의 투왕이 힘을 합친 공격의 위력은 동해는 물론이고 가철조차도 맞서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청록색 불꽃을 뿜어낸 정체불명의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수준의 강자가 나타났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돌연 벽력같은 소리와 함께 허공에 또 다시 파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