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6화. 유씨 가문의 난
황도는 가한 제국에서 번화한 곳으로, 그 규모와 명성에 걸맞게 언제나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가득했으며, 하루에도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오갔다.
이로 인해 제국의 수도는 매일 같이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온 종일 활기가 넘쳤으나, 오늘 황도의 분위기는 평소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언제나 소란스럽고 생기가 넘치던 거리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가득했고, 성 전체에 먹구름이 내린 듯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다.
이처럼 밝고 번화한 도시가 하루아침에 을씨년스럽게 변한 것은, 유씨 가문에서 갑작스레 경매장과 점포의 운영을 중지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3대 가문 중 하나인 유씨 가문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그들에게 무언가 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황도에는 적잖은 파장이 일었다. 최근 운남종이 계속해서 세력을 확대하며 기고만장하게 구는 모습은 가한제국 사람들 모두가 지켜본 바였다.
게다가 3대 가문 중 하나인 유씨 가문을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세력은 운남종이 거의 유일했으니, 운남종과 유씨 가문이 충돌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성내에 파다했다.
그리고 그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성 남쪽에 위치한 유씨 가문 총본부에서는 유씨 가문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곳저곳을 바삐 오가고, 다른 지역에서부터 호출된 최정예 호위 병력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건물 곳곳을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었다.
한편, 유씨 가문의 회의실에는 가문의 핵심인사들이 모두 모여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희야, 운남종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냐?”
전운이 감도는 회의실 한가운데, 노인 하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인의 질문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아름다운 여인에게로 향했다. 여인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무거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잦아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대장로님. 곧 있으면 운남종의 병력이 들이닥칠 듯 합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이들이었지만 주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 이들의 표정은 더욱 잿빛이 되었다.
대장로라 불린 노인은 이제는 유씨 가문의 가주 자리에서 물러난 유천이었다.
유천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오는 순간, 가문의 장로 중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게 전부 이씨 가문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들만 아니었다면 운남종을 자극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맞습니다! 왜 우리 가문이 이씨 가문 같은 작은 가문을 위해 운남종과 맞서야 합니까!”
“이제라도 이씨 가문의 일원들을 모두 잡아들여…”
“입 다물게!”
이에 장로들이 하나 둘 고함을 지르며 삿대질을 해대자, 유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노려봤고, 전임 가주의 벽력 같은 호통소리에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이 조금 진정되자 유천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한 사내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이정님, 저희 가문 사람들이 이성을 잃어 한 말입니다. 못 보일 꼴을 보였군요.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정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휠체어에 앉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뒤 사람들을 슥 훑어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들을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가문 사람들은 운남종에 의해 몰살당했고, 가주는 실종되었다. 게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아 달아나던 과정에서 본인은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보통이라면 미치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무도 의연해 보였다.
“대장로님, 이번 일과 저희 이씨 가문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유씨 가문의 장로분들이 이리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제가 유씨 가문의 장로였더라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그러니 운남종이 정말 유씨 가문을 공격한다면 저를 포함해 저희 이씨 가문의 반을 포로로 보내고, 대외적으로 그것이 오늘까지 살아남은 이씨 가문의 모든 인원이라 얘기해 주십시오. 대신, 나머지 사람들은 몰래 유씨 가문 밖으로 내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이정의 말에 회의실 안 사람들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분명히 ‘자신을 포함해 반’ 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정의 얼굴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담담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심지어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기 까지 했다. 이에 유씨 가문의 장로들은 까닭 모를 공포를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저리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걱정말게. 자네가 포로로 끌려갈 일은 없네. 나와 유씨 가문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씨 가문과 자네를 지키겠네.”
그 때, 누군가의 단호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시선을 돌려 보니, 서슬 퍼런 표정을 짓고 있는 동해가 보였다. 얼음왕의 싸늘한 표정에 당장이라도 이정을 운남종에 넘기기라도 할 기세였던 장로들마저 마른 침을 삼키며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동해 선배님, 아직 준이가 돌아오길 기다리시는 것 입니까…?”
이정이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이정이 할 수 있는 것은 준을 기다리는 것뿐이었지만, 그마저도 큰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하. 걱정말게. 그 녀석은 꼭 돌아올 거야.”
동해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곁에 있는 유천을 바라봤다.
“쯧쯧, 멍청한 것들. 운남종이 유씨 가문을 치려는 것이 정말 이씨 가문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동해의 지적에 유천은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 역시 운남종이 가한제국 전체를 수중에 넣으려는 속내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나씨 가문과 문씨 가문, 혹은 연금술사 협회나 황실에 도움이라도 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용없을 듯 합니다. 이미 운남종의 힘이 너무 커져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을 거예요. 누구든 유씨 가문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운남종이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까요.”
유천의 질문에 주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는 초조한 듯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럼…그럼 그냥 이대로 죽기를 기다리란 말입니까?”
그들의 대화를 듣던 누군가가 참다 못 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주희가 고개를 돌려 유천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대장로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유씨 가문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황도 밖으로 피신시켜 두었습니다.”
“휴. 잘했다…”
주희의 보고를 듣고 있던 유천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마도 유씨 가문의 혈통이 끊기는 것만은 막기 위해서였으리라. 주희의 이런 대처만 보아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때, 하늘 위에서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자, 염력이 뭉쳐 만들어진 구름이 떠 있고, 그 바로 곁에 날카로운 장검이 하나 서 있었다.
“끌끌…놈들이 왔구나.”
“당장 이씨 가문의 잔당들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유씨 가문은 멸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과도 같은 목소리가 온 성 안에 울려 퍼졌다.
염력이 실린 목소리가 황도 곳곳에 메아리 치자,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들어 한 방향을 응시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염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 치고 있었다.
이에 유씨 가문의 주희, 동해 등도 모두 회의실 밖으로 나가 심각한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쩔 수 있나. 항복할 게 아니면 맞서 싸워야지!”
유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동해가 즉시 염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명령이다. 다들 당황하지 말고 자기 자리를 지켜라! 이 시간 이후 허락 없이 유씨 가문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자는 모두 죽여도 좋다!”
유천과 달리 침착하게 호위대를 지휘하는 주희에게 동해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운산 늙다리 자식. 감히 유씨 가문을 치려 들다니. 피를 토하게 해주마!”
그 순간, 또 다시 염력이 폭발하며 성 안 곳곳에 새하얀 망토를 두른 그림자가 솟아났다. 망토 위에 새겨진 구름과 칼 문양으로 미루어보아, 모두 운남종의 제자들임이 분명했다. 이에 유씨 가문의 호위대 역시 곧바로 무기를 빼들었으나, 한 눈에 보기에도 백색 망토를 두른 자들의 수가 배 이상은 되어 보였다.
“정 오라버니, 운남종 놈들이 이곳까지 오기 전에 몸을 숨기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희가 멀리서부터 밀려오는 새하얀 구름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정은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피해 있는 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게다가 내가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
곧이어 이정의 몸에서 염력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동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자네, 언제 투령이 된 건가?”
“다리에 감각이 사라지고 나서 할 수 있는 것이 조용히 수련하는 것밖에 없었으니, 그 덕에 많은 발전이 있었나 봅니다. 평소에는 염력을 쓸 일이 없으니 모르셨겠죠.”
“흐음…그래, 하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주희와 함께 도망가게. 어쩌면 오늘 유씨 가문이 멸문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네와 주희가 자네 동생과 함께 유씨 가문과 나의 복수를 해줘야지. 주희는 염력은 없지만 영악한 아이이니, 이준을 도와 유씨 가문의 젊은이들을 끌어 모아 다시 가문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이준을 만날 때까지 자네가 주희를 지켜줘야 하네.”
동해의 말에 놀란 이정과 주희가 무언가 답을 하기도 전에 노인의 눈빛이 얼음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유씨 가문 본부의 건물 곳곳에 장검을 든 채 하얀 망토를 걸친 운남종의 제자들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이 이 곳을 지휘하게. 운남종 놈들은 내가 호위대를 데려가 막아보지.”
말을 마친 동해는 곧바로 하늘로 날아올라 유천을 비롯한 유씨 가문 사람들과 합류해 운남종의 병력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곧이어 동해의 등 뒤에서 얼음 날개가 솟아오르며 무시무시한 한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자, 운남종 제자들 뿐 아니라 두 세력의 격돌을 지켜보던 구경꾼들마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동해가 나타나기 무섭게 하얀 망토를 걸친 두 명의 노인이 광풍과 함께 그 앞을 막아섰다.
“운기웅, 운형? 너희가 어떻게 투황이 된 것이지?”
“큭큭, 왜? 우리는 언제까지고 투황이 될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가?”
동해의 질문에 운형이 씩 웃으며 답했다.
“말도 안돼…저 둘은 3년 전까지만 해도 4성 투왕이었는데 어떻게 3년 사이에 투황이 된 거지?”
동해의 곁에 있던 유천도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흠…하지만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뭔가 이상하군. 아마도 운산이 뭔가 수작을 부린 모양이야.”
“어쩌면 좋나?”
유천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해의 말대로 그들이 진짜 투황이 아니라 할지라도, 동해 한 명 정도는 붙잡아 놓을 수는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긴? 각자 한 명씩 맡자고. 내가 최대한 빨리 한 명을 죽이고 자네를 돕겠네. 저 둘만 잡아 족치면 나머지 떨거지들은 알아서 달아날테니 말이야.”
얼음왕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유천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책략이라고 하기 에도 민망한 수준의 대책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딱히 뾰족한 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