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3화. 머나먼 여정
운남종의 뒷산 외진 곳에 위치한 거대한 궁전 안…고요한 궁전의 중앙에는 화려한 백색 옷을 걸친 여인이 조용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철커덕.
그 때,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힌 궁전 대문이 서서히 열리며 달빛이 쏟아져 내려 아름다운 흰색 옷을 더욱 밝게 물들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노인은 중앙에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자리에 앉은 젊은 여인의 눈치를 살폈다.
“율희야, 아직도 내게 화가 났느냐?”
노인의 목소리에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천천히 눈을 뜨자, 반짝이는 눈동자가 달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이 났다.
“스승님께서 여기 오실 시간도 있으시군요.”
자신의 스승인 운산을 바라보는 율희의 표정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3년이 다 되어간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인게냐.”
한숨 섞인 노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노여움이 묻어 있었다.
“스승님의 은혜를 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손바닥만한 가문 하나에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닙니까. 언제부터 대운남종이…”
“흥, 그 손바닥만 한 가문의 꼬마 하나가 대운남종의 이름에 먹칠을 했으니 본 떼를 보여주겠다는 것 아니냐!”
이준을 떠올리자 분노가 폭발했는지, 운산의 얼굴에 살기가 돌았다.
“흥, 그리고, 유씨 가문이 우리의 눈을 피해 이씨 가문을 돕고 있다고 하더구나. 유씨 가문은 가한제국의 삼대가문 중 하나다. 이런 큰 세력과 이씨 가문이 손을 잡았는데, 이것이 예삿일이란 말이냐! 동해 그 빌어먹을 늙다리와 대운남종의 원수인 이준 그놈이 손을 잡았는데?”
“설마 스승님… 유씨 가문과 전쟁이라도 벌이시려는 것은 아니겠죠?”
스승의 입에서 ‘유씨 가문’의 이름이 나오자, 율희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어갔다.
“유씨 가문은 제국 3대 가문 중 하나입니다. 그들을 적으로 돌리면 그들과 연합하고 있는 다른 세력들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고 말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것 입니까!”
“흥, 유씨 가문이고 뭐고 운남종에 비하면 허접쓰레기 같은 세력이다. 이번 기회에 이 가한제국에서 운남종에게 칼을 들이민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지!”
“스승님! 운남종을 스승님대에서 끝장내실 생각이신 겁니까!”
“진율희! 네 년이 진정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감히 누구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내 차마 사제지간의 정을 끊지 못 하고 너를 어르고 달래니 네가 나보다 대단한 존재라도 된 듯 싶으냐!”
말을 마친 운산은 분을 참지 못 하고 손끝을 파르르 떨다가 몸을 돌려 궁 밖으로 나갔다.
“흥, 어디 운남종이 내 손에서 멸문할지, 더욱 더 강해질지 두고 보자꾸나!”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굳게 닫히고, 율희는 또 다시 거대한 궁 안에 홀로 남아 이마를 감싸 쥔 채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에 드문드문 걸린 구름이 바람을 따라 움직이고, 햇살이 구름을 뚫고 대지를 비추는 한가로운 오후,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든 열 마리의 비행 마수가 정적을 깨뜨렸다.
가장 앞에 있던 비행 마수의 커다란 머리 위에는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쯤이지?”
이준의 물음에 한담을 나누던 임동수나 이찬이 저장반지에서 지도 한 장을꺼내 들었다.
“검은 바위성이라는 곳이야. 이 속도라면 한 달 쯤에 가한제국 변방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한 달이라…”
이준이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자, 임동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말했다.
“어휴…! 넌 지루하지도 않아? 난 아주 죽을 맛인데 말이야.”
“하하, 보람이는? 또 못 참고 혼자 움직이고 있는 거야?”
“응. 도저히 가만히 앉아서는 못 견디겠다고 하더군. 그 성깔에 비행 마수위에서 난동이라도 안 부리면 다행이지. 메두사랑 같이 있을 거야. 얼음 같이 차갑던 사람이 보람이란 친구에게만은 유독 친절하더군.”
아마도 마수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인 것 같았다. 매일 같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벼르는 무시무시한 여왕과 요리를 만들어달라고 보채는 아이가 그렇게 친해질 줄이야. 준은 이 기묘한 상황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뭐 알아서 하겠지. 채린이 있으니까 보람이도 딴 길로 샐 일은 없을 거야. 그 외에 별다른 일은?”
“응. 아주 순항 중이야. 비행 마수가 떼지어 날아다니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기는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투왕이나 투황들이 줄줄이 있다 보니 줄을 대고 싶어서 우리를 모셔서 연회라도 열어주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가만히 형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준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흠…모두에게 만에 하나라도 다른 세력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시켜줘. 그리고 누가 초대하든 모두 거절해줘.”
한시가 바쁜 이 시기에 다른 세력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고, 여정을 지체시킬만한 모든 일을 최대한 피하고 싶다는 것이 준의 생각이었다. 이찬의 생각 역시 동생과 같았다.
“그나저나 큰 형 쪽은 어떤지 모르겠네.”
“걱정 마. 큰 형은 똑똑하니까, 분명 영리하게 잘 해내고 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이찬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지만, 이준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이 모든 상황을 자초한 것이 자신이니, 지금도 운남종의 눈을 피해 살아가고 있는 큰 형을 생각할 때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보다, 투황까지는 아직 멀은 거야?”
동생의 표정이 좀처럼 밝아지지 않자, 이찬은 곧바로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투황이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잖아.”
하지만 화제를 돌린다는 것이 그만 그를 더욱 걱정스럽게 만든 듯, 준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벌써 한 달 내내 수련에 힘을 쏟았건만, 투황으로 승급할 것 같은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금비약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는 거야?”
“나한테는 별 효과가 없을 거야. 그리고 어떤 연금비약도 본래 투왕 최고 단계에서 투황으로 넘어가게 해주는 정도의 효과는 없어. 기껏해야 1~2성 정도 승급하는 정도지. 그랬으면 돈 많은 사람들은 진작 연금 비약 하나씩 먹고 쉽게 투황이 됐겠지.”
“하하, 그럼 천천히 하면 되지! 지금도 넌 충분히 강하다고!”
결국 동생의 기분을 풀어주는데 실패한 이찬은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동생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쉬익!
그 때, 갑자기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메두사와 보람이었다.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자, 파란 하늘 가득히 은은한 약향이 맴돌았다.
“설마, 그 새 둘이 약재라도 캐러 간 거야?”
“헤헤. 후각이 대단하네.”
이준의 질문에 보람은 실실 웃으며 손을 흔든 뒤 자신의 저장 반지 안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옥 상자를 몇 개나 꺼내서는 그것을 이준에게 내밀었다.
“이 약재들은 나중에 채린 언니한테 연금비약 만들어줄 때 써. 나머지로 내 먹을 것도 만들어주고! 나머지는 너 해!”
보람이 건넨 상자를 열어본 준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젓고말았다. 그녀가 건넨 상자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진귀한 약재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건 용의 침인가? 그리고 얼음 영지버섯? 대체 이런 약재들은 어디서 가져온 거야?”
“이 아이가 약재를 찾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더군. 덕분에 아주 쉽게 찾았어.”
메두사 여왕이 보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간 몇 년이나 붙어다니면서도 준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온화한 태도였다.
그 때, 약재를 살피던 준의 머릿속에 한줄기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약초들의 상태가 아무리 보아도 이제 막 캐낸 물건 같지는 않아보였다.
“근데 이 약재들…땅에서 막 따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너무 깨끗하잖아…어디서 찾아온 거야?”
“헤헤…다른 세력들 창고에서 몰래 빼왔어. 채린 언니 말로는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봤자 제대로 쓰지도 못할게 뻔하다고 했어.”
보람의 천진난만한 한마디에 이준은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 설마 보람이랑 같이 약재 도둑질 하러 다녔던 거야!?”
“흥, 닥쳐라.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해결할 테니 넌 이 위에서 수련이나 하고 연금비약을 만들 준비나 해.”
메두사의 뻔뻔한 태도에 이준은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은 분노를 느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 방금 전인데, 이 두 사람은 이미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도둑질한 약재를 돌려주러 갈 수 도 없는 것을. 결국 이 지역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속도를 올려!”
“그래.”
이준의 한마디에 이찬이 쓴 웃음을 지으며 날개를 펼쳐 뒤쪽 마수를 향해 날아갔고, 그렇게 두 사고 뭉치가 사고를 친 범죄의 현장과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비행 속도를 낮출 것을 지시했다.
* * *
메두사와 보람이 사고를 친 뒤로부터 다시 한 달. 마침내 저 멀리 가한제국의 국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국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모두 그 요새를 지나가야 했고, 가한 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 역시 모두 그 요새를 통과하지 않고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었다.
거대한 요새의 윤곽이 가까워질수록 준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긴장과 흥분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멀리 떨어진 요새를 바라보며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굴러댔다.
“여기가 가한제국이야?”
거대한 성벽이 모습을 드러내자, 임동수를 비롯한 이들도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를 살폈다.
“응. 이곳이 가한제국 변방의 요새야. 여기만 지나가면 가한제국이지.”
신이 나서 눈을 빛내는 임동수를 바라보며 이찬이 했다.
“운남종에게 쫓겼던 게 엊그제 같은데… 3년 만에 이곳에 다시 돌아올 줄이야.”
이준은 3년 전 운남종을 피해 쫓기 듯 달아났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저장 반지 안에서 검은 송곳을 빼들었다. 임동수를 비롯한 사람들은 시커먼 송곳을 꺼내드는 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앞으로 어떤 참극이 벌어질지를 직감했다.
“다들 속도를 높여라!”
이준이 명령을 내리자, 비행 마수들이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더욱 힘차게 날개를 퍼덕였다.
마침내 거대한 성벽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순간, 이준이 번쩍하고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 때, 이찬이 다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준아, 뭔가 이상하지 않아? 관문이 너무 조용한 것 같은데. 이 곳은 원래 이렇게 조용한 곳이 아니잖아. 이 근방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데, 이렇게 까지 고요할 리가 없잖아.”
잔뜩 흥분해 그런 것을 살필 겨를도 없었던 이준도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굳은 표정으로 발아래를 살폈다.
“그렇군… 게다가 비행 마수가 열 마리나 나타났는데 왜 수비대가 나타나지 않지?”
“혹시 네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이미 퍼진 건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임동수가 고개를 앞으로 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흑각성이랑 가한제국간의 거리가 얼마나 먼데…”
그렇게 이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민에 빠져있을 때, 돌연 메두사가 손을 들어 성벽을 가리켰다.
“전투의 흔적이 있군. 게다가 꽤 강한 놈들이야.”
메두사의 말에 화들짝 놀란 준은 곧바로 눈을 감고 자신의 영혼 탐지능력으로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온 성 안을 샅샅이 훑어보던 준의 영혼 탐지력이 요새의 중앙에 닿는 순간,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가한제국에 오자마자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군.”
“아는 사람?”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준의 한마디에 놀란 이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야. 어서 가자. 내려가서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