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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322화 (322/818)

제322화. 가한제국으로

“반달과 은빛칼날, 그리고 사자단에서는 왜 연락이 없지?”

중요한 전력이 될 세 투황이 모두 모습을 보이지 않자, 이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이에 한 투왕이 막 답을 하려던 순간, 허공에서 요염한 웃음소리와 함께 여인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호호. 급하기도 하셔라. 수개월이나 흑각성을 떠나야 하는데, 이 정도는 기다려 주셔야지요. 그래야 저희도 완벽하게 채비를 마치지 않겠어요?”

웃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에서는 십 여 마리의 비행 마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비행마수가 산봉우리에 내려앉자, 백 명에 가까운 투사들이 하나 둘 그 위에서 내려왔다.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미루어보아, 각 세력의 최정예들을 뽑아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대단하군요. 한 달 안에 이렇게 많은 강자들을 모으다니…”

마수에서 내린 여인이 이찬 뒤에 줄지어 서 있는 인파들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 제 능력이라기보다는 동생의 후광이지요. 저도 놀랐습니다. 6레벨 연금술사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강자들이 모여들 줄은 몰랐거든요.”

“맞습니다. 이씨 가문의 가주께서 6레벨 연금술사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니 투왕은 물론 투황도 벌떼처럼 몰려들었겠죠.”

이찬의 말에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광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보다, 세 분께서 데려온 사람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찬의 물음에 세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씩 웃음을 지었다. 자신들이 데려온 사람들의 실력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듯해 보였다.

“한 사람당 투왕 둘씩, 총 여섯 명의 투왕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운남종의 제자들에게 뒤지지는 않을만한 자들로 엄선해왔습니다.”

“투왕 여섯이요? 세 분의 명성과 맞지 않는 것 같은데요.”

이찬은 다소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투왕 여섯이면 상당한 전력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사자단을 비롯한 세 개의 세력은 모두 흑각성의 일류 세력이니, 더 많은 투왕급 강자를 데려올 수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허허허, 흑각성이 어떤 곳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강자들을 죄다 데리고 몇 달이나 이곳을 떠나게 되면 저희 세력의 본거지가 위험하니, 이 정도는 양해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노인의 논리정연한 설명에 이찬 역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든 이해관계로 얽힌 일시적인 동맹에 불과하니, 자신들의 둥지를 버리고 운남종과의 전쟁에 참여하라는 것은 확실히 무리한 요구였다.

“가주께서는 아직 이십니까?”

잠시 후, 주위를 둘러보던 노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다른 사람들 역시 출발 직전 까지도 이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의문을 느꼈는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이찬을 바라봤다.

“하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 때, 검은 망토를 입은 청년 하나가 새파란 하늘을 가로지르고 날아와 산등성이에 내려앉았다.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이 나타나자 그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에 마수마저 입을 다물며 주위가 온통 정적에 휩싸였다. 세 명의 투황을 비롯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갓 스물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청년에게서 풍기는 묵직하고 농후한 기운 앞에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집어 삼켰다.

“드디어 왔구나.”

자리에서 준을 격의 없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그의 피붙이인 이찬뿐이었다.

형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이준 역시 미소로 화답하고는 뒤에 있는 네 사람을 이찬에게 소개했다.

“내 친구들이야. 도와주러 왔어. 다들 본원에서도 손에 꼽는 인재이니, 큰 힘이 돼줄거야.”

네 사람에게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이찬의 얼굴에 또 다시 미소가 번졌다. 특히 보라색 말총머리를 한 작달막한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투왕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다.

“여기 다섯 친구는 내가 흑각성에서 찾아온 사람들이야.”

네 사람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넨 이찬은 곧바로 자신의 뒤에 서 있던 강자들을 동생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오. 훌륭하네.”

다섯 사람의 면면을 쭉 훑어본 준의 얼굴에도 흡족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이찬이 모아왔다는 다섯 명은 모두 6성 이상의 투왕으로, 가한제국이었다면 10대 강자안에 들어갈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이준과 눈이 마주치자, 다섯 명의 투왕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몸을 잽싸게 숙이며 일제히 소리쳤다.

“하하, 감사합니다. 이번 일은 저희 가문의 사활이 걸린 일인 만큼, 일이 마무리 되면 반드시 섭섭지 않게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6레벨 연금술사의 한마디에 다섯 투왕의 얼굴에는 곧바로 화색이 만연했다.

곧이어 이준의 시선이 세 조직의 수장에게로 향하자, 세 사람 모두 안절부절 못하며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제 아무리 투황이라 해도, 앞길이 창창한 6레벨 연금술사의 눈 밖에 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한제국까지 원정을 가려면 수개월이나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다가 저희 세력을 노리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보니, 모든 강자들을 데려오지는 못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온 힘을 다해 가주님을 보필할 터이니 부디 언짢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반달」의 수장인 노인 ‘은평’은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며 이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이준은 친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세 사람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 분께서 직접 와주신 것만으로도 저와의 약속은 지켜주신 셈입니다. 게다가 무법자들이 판을 치는 흑각성에서 손수 자신의 휘하에 있는 병력을 이끌고 와주셨으니, 이씨 가문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약속한 물건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이준의 호의적인 반응에 신이 난 은평은 옅은 미소를 띠운 채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이 실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도량도 이처럼 넓으니, 이씨 가문의 앞날은 순풍에 돛을 단 듯 걱정할 것이 없겠군요. 이 은평, 이번 대전에서 목숨을 걸고 가주님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저도 세 분의 호의에 반드시 보답할 것을 다시 한번 약속드리지요.”

“그나저나 가한제국까지 거리가 있잖아. 투왕이라 해도 그곳까지 날아가기에는 힘들 텐데, 투령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세 투황과의 대화가 대충 마무리된 듯하자 이찬이 다가와 이준에게 말을 걸었다.

이찬의 말대로였다. 이준 역시 전에 약로의 도움을 받아 날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가한제국에서 흑각성까지 꼬박 며칠이 걸렸으니, 이 인원들을 모두 이끌고 가한제국으로 향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동생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찌푸리자, 이찬이 장난스레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십 여 마리의 거대한 비행 마수가 날개를 펄럭이며 산등성이에 내려앉았다.

“하하, 이 마수들은 전부 4레벨 비행 마수야. 장거리 비행에 특화된 놈들이지. 흑각성의 마수 사냥꾼들을 어르고 달래서 겨우 얻어냈다고. 게다가 훈련시키기는 또 어찌나 힘이 들던지…”

“4레벨 마수 10마리라니…”

자신의 고생을 알아달라는 듯 너스레를 떠는 이찬의 설명에 이준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번져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4레벨의 독수리 마수 열 마리는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필요한 물건들은 전부 실어 뒀으니 언제든지 가한제국으로 떠나기면 하면 돼.”

두 형제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눈에는 가문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일념이 가득했다.

“좋아. 그럼 당장 가한제국으로 가자고. 놈들에게 이씨 가문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는 거야.”

말을 마친 이준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비행 마수 위에 올라타자, 이찬이 끌어 모은 병력들이 앞 다투어 비행 마수의 등 뒤에 탑승했다.

곧이어 이찬이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자, 마수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가한제국의 수도.

유씨 가문의 거대한 정원 안에 위치한 대청 가운데에는 세 사람이 마주 앉아 무거운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희야, 우리를 이리 급히 불러 모은 이유가 무엇이냐?”

하늘색 도복을 걸친 노인이 우아한 자세로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며 입을 떼자, 곁에 있던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하하. 주희 아가씨. 저는 오늘 막 새로운 임무를 받은 참인데, 무슨 일 때문에 부르신거죠?”

“이정 오라버니, 그냥 주희라고 불러 주세요. 아가씨라니요.”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여인은 수줍게 고개를 저은 뒤 곧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이리 급히 동해 선생님과 이정 오라버니를 부른 것은…오늘 좋지 않은 소식을 전달받았기 때문입니다.”

주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긴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정보에 따르면 운남종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그 놈들이 또?”

주희의 심각한 말투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동해도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슨 속셈이지?”

“아직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까지는 파악하지 못 했습니다.”

동해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이정을 바라봤다.

“설마 이씨 가문의 남은 사람들이 유씨 가문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우릴 치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유씨 가문은 가한제국 삼대 가문 중 하나입니다. 우리 이씨 가문 같은 작은 세력도 아닌데…”

“아니야. 요즘의 운남종은 뭔가 이상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자네 가문 사람들에게 모두 외출을 자제하라고 전해주게. 우리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지.”

“알겠습니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채 이씨 가문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해의 표정에 미안함을 느낀 이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동해 어르신,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우리 이씨 가문으로 인해 유씨 가문에 큰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송구스럽습니다.”

“그렇게 말할 거 없네.”

하지만 동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하하,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가 이유 없이 돕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뭐, 조금 위험한 도박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아닌가! 사내라면 시원하게 지를 줄도 알아야지!”

“준이가 돌아와 운남종을 무너뜨리는 쪽에 거셨군요? 그렇다면 아주 큰 한 방이 되시겠어요.”

동해의 시원시원한 한마디에 이정 역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렇지. 내 한동안 그 놈 수발을 들면서 느낀것인데, 물건도 아주 보통 물건이 아니거든!”

두 사람의 밝은 표정에 주희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실로 유씨 가문의 사활이 걸린 도박이었지만, 결코 승산이 없지는 않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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