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1화. 준비 완료
“시간이 늦었다. 어서 산으로 들어가 봐야겠어.”
이준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든 뒤 곧바로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라버니!”
그 때, 사라지는 이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
“응?”
준이 고개를 돌리자, 이안은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몇 년 동안이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슬그머니 꺼내들었다.
“미안해…”
하지만 이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어릴 때 일이야. 그리고, 가족이잖아. 네가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잊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안은 이준이 계단을 돌아 모습을 감춘 뒤로도 한참이나 물끄러미 그곳을 바라보다가 또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잊은 걸까…”
* * *
펑!
첩첩이 우뚝 솟은 산속에서 갑작스레 굉음이 울러 퍼졌다. 깜짝 놀란 새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푸른색이 가득한 수풀 위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곧이어 산봉우리 하나가 무너지고 돌덩이가 쉴 새 없이 굴러 떨어지며 산 아래쪽에 박혀 있던 거대한 나무를 무참히 꺾어버렸다.
산봉우리 바로 위쪽의 허공에는 검은 망토를 입은 청년 하나가 청록색 날개를 퍼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음…과연, 산의 힘이 괜히 2격 고급 무투기가 아니구나.”
청년의 곁에 있던 노인은 거대한 산을 와르르 무너뜨린 무투기의 위력 앞에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혹시 스승님도 이 무투기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하하. 제왕의 권은 모든 강자들이 탐내는 무투기이니, 들어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 이런 보물을 선물하다니… 아무리 대단한 집안이라 해도 쉽지 않을 텐데 네 여자친구도 참…”
약로는 옅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나도 제왕의 권에 관심이 있었지만, 결국 손에 넣지 못했지. 이 무투기를 제대로 익힌다면 산을 태우고 바다를 말려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질게다.”
“그런데 은이가 준 두루마리에도 두 가지 무투기 밖에 없더라고요…”
이준이 조금 아쉽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자, 약로가 가볍게 그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녀석, 욕심도 많지. 제왕의 권은 2격 고급 무투기지만 모든 인의 수련을 마치고, 능숙하게 다루게 된다면 1격 무투기와도 견줄 수 있는 위력을 갖추게 된다. 네 여자 친구의 가문이 대단한 건 사실이나, 이런 무투기를 선물하기에는 적잖은 위험이 따랐을 게야.”
스승의 핀잔에 민망해진 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도 진심으로 아쉬워한 것은 아니었다. 두 개의 무투기를 건네줄 때 이은이 보였던 표정과 언행만 보아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 그리고 그녀가 어떤 위험을 짊어지고 그것을 자신에게 건네줬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이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진 준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산으로 들어온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는데, 형에게서 연락이 없네요. 설마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니겠죠?”
“별 일 없을 게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면 연락이 왔겠지.”
약로는 그런 준의 마음을 아는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선은 수련에만 집중하거라. 운산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보통 수 가지고는 안 될 테니까.”
‘운산’이라는 두 글자에 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네, 알고 있습니다.”
준의 실력이 대폭 발전한 것은 사실이고, 화련이나 제왕의 권 같은 막강한 무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운산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누가 뭐라해도 운산은 투기 대륙 전체를 호령할만한 계급의 투종 강자가 아니던가. 게다가 운남종의 종주이니만큼 강력한 무투기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일 과거 운남종에서 준과 마주 쳤을 때 그가 가차 없이 모든 실력을 발휘했더라면 준은 진작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한제국으로 돌아가 운산을 꺾겠다는 준의 집념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이번에도 운남종을 꺾을 수 없다면, 자신은 어떨지 몰라도 이씨 가문은 전멸하게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씨 가문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였다. 운산의 숨통을 끊어놓고, 운남종을 가한제국의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것 말이다.
사실 메두사와 약로의 도움을 받는다면, 운산을 죽이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메두사는 워낙에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여자니, 그녀에게 가문의 명운이 걸린 싸움을 맡길 수는 없었다. 약로야 언제나 자신의 편이지만, 운남종에도 숨겨놓은 강자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이찬이 한 말에 따르면, 운남종과 영혼의 궁전 사이에는 분명히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약로의 도움을 받는 것도 어려워질지 몰랐다. 결국, 자신이 실력을 기르는 것만이 유일한 답 이었다.
그렇게 준이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던 약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실력으로 운산을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다.”
“설마, 스승님께 무슨 비책이라도 있는 건가요?”
스승의 한마디에 이준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약로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왕의 권의 두 번째 힘을 익히거라.”
하지만 이어지는 스승의 한마디에 준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제왕의 권의 첫 번째 힘인 ‘산의 힘’을 익히는 것도 버거웠다.
“첫 번째 힘인 「산의 힘」도 제대로 익히지 못 했는데…어떻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어요. 제 실력으로는 무리라고요 스승님…투황은 되어야 할 거예요.”
“허허.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구나.”
준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갑자기 약로의 손끝에서 새하얀 불꽃이 치솟았다. 주름이 가득한 스승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내려 앉아 있었다.
“네 화련에 내 얼음 불꽃의 정수를 더하면 운산을 쓰러뜨릴 수 있을게다.”
“네…?”
뜻밖의 제안에 이준의 얼굴이 시커멓게 어두워졌다. 두 개로도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갈 판에 셋이라니, 자신이 제 아무리 간이 크다해도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왜? 그것도 안 되겠느냐?”
“한 번… 해볼게요.”
잠시 망설이던 준은 이내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에 약로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급해 하지 말거라. 융합할 수 있으면 해내는 거고 도저히 안 된다면 포기하거라. 내가 직접 나서서 싸우는 걸 도와주마.”
* * *
그 후 이준은 세 가지 천지의 불꽃을 융합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세 개의 불꽃을 융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심지어 불꽃들이 서로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켜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기 일쑤였다.
하지만 거듭되는 실패에도 준은 조급해 하거나 흐트러짐 없이 불꽃을 융합하는데 모든 신경을 쏟았다.
그렇게 매번 불꽃이 폭발을 일으키고, 모든 힘을 다 쏟고 지쳐 쓰러지는 것을 반복하기를 한 달…세 개의 불꽃을 융합하는 것에 조금 발전이 생길 무렵, 새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왔다.
「모든 준비 완료. 언제든지 출발 가능.」
* * *
본원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깊은 산, 십여 명의 사람들이 삼삼오오모여 아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떠나는 게냐?”
서천우가 맞은편에 선 이준을 바라보며 아쉬운 듯 물었다.
“네, 형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떠나야죠. 지금까지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조심하거라. 흑각성에 있는 네 형의 세력은 내가 사람을 보내 관리할 테니 너무 걱정 말고.”
대장로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자, 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일단은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그간의 정을 생각해 섭섭지 않게 대우해줄테니까.”
이준의 장난스런 인사에 사람들의 굳은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우리도 곧 투왕이 되어 가한제국으로 갈 테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오하늘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자, 준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언제 출발할 셈이지?”
그 때, 나무 위에서 메두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메두사 여왕이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메두사의 독촉에 이준은 빙긋 웃으며 곧바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들 몸 조심해. 인연이 닿으면 또 보자고.”
대장로와 비석의 간부들에게 인사를 마치자, 임동수, 임수혁, 유지안 그리고 보람이 이준을 향해 다가왔다. 숫자는 적었지만, 넷 모두 만만찮은 강자들이었으니 어줍잖은 투사 수 십 명보다도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가자.”
이준의 짤막한 한 마디에 네 사람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야! 이준! 조심해! 죽으면 죽여 버릴 거야!”
이옥이 화려한 청록색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이준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하하, 걱정 마. 곧 내가 운남종을 쓰러뜨렸다는 소식이 본원에 전해질 테니까, 안심하고 기다리라고.”
이준은 그 말을 끝으로 청록색 날개를 퍼덕이며 산속으로 날아갔고, 메두사와 네 명의 투왕이 형형색색의 날개를 펄럭이며 그 뒤를 따랐다.
지상에 있던 서천우와 비석의 간부들은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메두사 여왕이나 다른 강자들이 힘을 보태준다고 하더라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혈전이 펼쳐질 것이 분명했으니, 이준을 아끼는 그들로써는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이준이 운남종을 이길 수 있을까요?”
윤영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장로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자,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검은 옷을 입은 노인에게로 향했다.
대장로는 긴 한숨을 내쉬며 침묵을 지키다가 납덩이를 삼킨 듯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확답하긴 어렵지…이러니 저러니 해도 명실상부한 가한 제국 최강의 종파니까. 게다가 서남대륙 전체를 놓고 보아도 제법 강한 세력으로 손꼽히는 곳이니…”
노인의 말에 오하늘과 다른 학생들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웠다. 하지만 아무리 이준을 걱정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 그들의 실력으로는 이준을 따라 가한제국으로 간다 해도 걸림돌이 될 것이 뻔했다.
“하하. 됐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준과 함께 하는 흑각성의 강자들이나 임수혁 일행 역시 만만치 않은 강자가 아니더냐. 게다가 저 녀석의 재능 역시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수준이니, 승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게다.”
* * *
한편 흑각성 샘화 인근의 야트막한 산 위에서는 이찬을 비롯한 수십 명의 강자들이 줄지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력 소집이 완료 됐습니다. 현재 저희 삼형제까지 총 여덟 명의 투왕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엄격하게 선발된 투령 최고 수준의 강자들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사내의 보고를 듣고 있던 이찬은 천천히 눈을 뜨고 산등성이에 집결한 흑각성의 강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산등성이 위에는 백 여 명의 투사들이 줄줄이 늘어서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앞에는 일곱 명의 투왕 강자들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