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화. 열 합
비석의 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이찬이 사람을 모으는 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준은 곧바로 본원을 떠나지 않고 며칠 정도 그곳에 머물렀다.
이준은 편안한 마음으로 비석에 머무르며 하급 연금비약을 만들어 보이기도 하고, 그것을 비석의 구성원들에게 선물해주기도 했다. 비석은 이미 작지 않은 세력이 되어 연금술사도 꽤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준 같은 상급 연금술사가 연금비약을 제조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공부가 되었으니, 비석의 연금술사들도 모두 옹기종기 모여 준이 연금비약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동수가 나타나 이준의 손목을 잡아 끌고는 비석의 구성원들과 함께 경기장에 가보아야 한다며 난리를 피워댔고, 덕분에 이준은 영문도 알지 못한채 그와 함께 경기장으로 향해야 했다.
* * *
평소 본원의 경기장은 자신의 기량을 시험하고 실전 경험을 쌓고 싶어하는 학생들로 가득했지만, 오늘은 왠일인지 경기장 위에서 대련을 치루고 있는 학생들을 볼 수 없었다.
다만 관람석만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의 인파로 가득 차 있었는데, 하나 같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눈을 빛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수가 무언가 일을 꾸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준이 등장하는 순간, 관람석에서는 뜨거운 환호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수가 무언가 일을 꾸몄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선배, 이게 뭐하는거예요? 예전부터 저와 한판 하고 싶다더니, 설마 오늘이 그 날인 거예요?”
이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노려보자, 동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 지금 내 실력으로 너와 붙으면 1분도 안되서 개망신을 당하고 말텐데 그런 짓을 하려고 관객까지 불러 모았겠어?”
말을 마친 동수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웃으며 두어번 손뼉을 쳤다. 그의 박수 소리에 경기장의 소란이 가라앉고, 곧이어 관객석에서 임수혁과 류지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한제국에 돌아가려면 도와줄 사람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두 사람한테 말을 꺼냈더니, 네가 두 사람을 쓰러뜨리면 힘을 보태주겠다고 하더군.”
뜻 밖의 상황에 당황한 이준은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술을 매만졌다. 동수야 이전부터 가한제국에 가보고 싶다고 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 두 사람이 자신과 함께 운남종과 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애들도 죄다 졸업한데다가, 더 이상 천계의 탑에서 실력을 높이지도 못 하니 딱히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거든. 마침 자기들이 예전부터 인정하던 네가 가한제국으로 떠난다니 이번 기회에 실력을 겨뤄보고 싶다더군.”
설명을 마친 임동수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준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해댔다. 그의 말투와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뭐, 내가 보기에는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두 청년의 줄서기가 아닐까 싶지만 말이야. 아무리 봐도 넌 나중에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거든. 하하하. 기왕 이렇게 된거 비석의 대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여줘. 임수혁과 류지안 두 녀석 모두 학생 때부터 패배를 몰랐잖아. 이번 기회에 세상 넓은 것도 알려주고, 든든한 아군도 손에 넣고.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어?”
“에휴…좋아요. 저 두 사람이라면 운남종과의 전쟁에서도 큰 힘이 되어주겠죠.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실력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으니, 제 실력을 가늠해보기에도 좋을 것 같고요.”
이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빠르게 경기장 중앙으로 몸을 날렸다. 동수에게 등을 떠밀려 싸우게 되기는 했지만, 그 역시 두 사람과의 대전에 가슴이 뛰었다.
이준의 등장에 관중들이 미친 듯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본원의 전설적인 강자와 투왕 계급 장로 둘의 이대일 대결이라니, 그야말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구경거리였다.
“우리 둘을 이기면 네 전우가 되어주지!”
이준이 경기장에 올라서는 순간, 류지안이 광기 어린 표정으로 염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이준이 장난스레 웃으며 갑자기 양손을 펼쳤다.
“열 합. 딱 열 합만에 두 분을 경기장 밖으로 밀어낼 수 없다면 제가 진걸로 하죠.”
“하하. 후배님, 후배님의 실력이 대단한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오늘은 대장로님도 계신데 너무 거만하신 것 아닙니까?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무슨 망신을 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이준의 도발에 조금 화가 난 듯한 수혁이 경기장 한 켠을 가리키며 말했다.
임수혁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정말로 서천우를 비롯한 본원의 장로들이 줄줄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하, 아니요. 그래도 열 합이면 충분합니다.”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 이준의 말에 임수혁과 류지안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염력이 뿜어져 나왔고, 순식간에 어느 각도에서든 공격할 수 있는 위치로 몸을 옮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잡는 둘의 모습에 이준의 몸에서도 연한 청록색의 염력이 피어올랐다.
“준비는 됐겠죠?”
쉭!
두 사람은 이준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맹수처럼 몸을 날렸고, 눈 깜짝할 사이에 위 아래로 나뉘어진 두 갈래의 에너지가 검은 망토를 입은 청년을 향해 날아들었다.
수혁과 류지안의 위치 선정은 참으로 감탄이 나오는 것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들의 협공은 문자 그대로 물 샐 틈 없이 완벽해 상하좌우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곳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둘의 공격이 막 적중하려는 순간, 바위처럼 가만히 서있던 이준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갑자기 좌측에서 청록색 염력에 휩싸인 주먹이 번개처럼 그들을 가격했다.
쾅!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강렬한 에너지에 임수혁과 류지안은 열 걸음도 넘게 뒷걸음을 치고 말았고, 그들이 땅에 발을 디딜 때 마다 바닥에 깊은 발자욱이 남았다.
그리고, 깜짝 놀란 류지안이 다시 자세를 잡기도 전에 그의 눈 앞에 새까만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에 류지안은 빠르게 뒤로 몸을 날렸지만, 이준이 손을 내밀자 무형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그를 붙잡았다.
“자, 이번이 두 번째 입니다!”
이준의 도발적인 한마디에 류지안은 이를 악물고 염력을 폭발시켜 뒤로 몸을 물렸다.
“발톱의 분열!”
숨 돌릴 틈도 없이 상대가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류지안은 다급하게 손을 휘둘러 자신의 장기를 펼쳤다. 그러자 염력으로 둘러싸인 손바닥에서 빠르게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나 공간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하지만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주위의 공기가 뜨겁게 불타며 마수의 발톱과도 같은 상대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세 번째!”
준의 반격에 당한 류지안은 손을 붙잡고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맹렬한 기세로 달려 들어 이준의 두 팔을 붙잡았다.
“지금이야!”
류지안이 상대의 양팔을 붙잡는데 성공한 찰나, 이준의 등 뒤에서 서늘한 바람과 함께 임수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원기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갑자기 뒤바뀐 전세에 관중석에서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준의 두 팔이 잡혀 있는 이상 임수혁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긴 어려워 보였다.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수혁의 손이 빠른 속도로 이준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바람에 휩싸인 손끝이 이준의 몸에 닿는 순간, 임수혁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헉…”
“저 녀석, 번개의 움직임을 이 정도 수준까지 수련했단 말인가……”
관객석에서 세 사람의 대결을 바라보던 서천우가 탄식을 내뱉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이준이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쾅!
그 순간 무시무시한 폭발음과 함께 두 개의 그림자가 경기장 밖으로 튕겨져 나갔고, 경기장 밖으로 밀려난 두 사람은 몇 바퀴나 바닥을 뒹굴고 난 뒤에야 간신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자, 이번이 다섯 번째입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속도 앞에 관중석에서는 한참동안이나 정적이 이어졌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손뼉을 치자, 이내 우레와도 같은 박수소리가 관객석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편 경기장 밖으로 날아간 류지안과 임수혁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짓더니,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경기는 이준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임수혁, 류지안은 본원의 신입생들마저 알 정도의 유명인으로, 졸업 후 장로가 되면서 더욱 더 많은 학생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헌데 2년 동안 모습을 감췄던 이준이 혜성처럼 나타나 그 둘을 동시에 제압했으니, 학생들은 물론이고 장로들마저 장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준과 수혁은 탑에서 나와 잠깐 겨룬 적이 있었으나 일반 항생들은 두 사람 중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알지 못했고, 덕분에 이준이 본원을 나가 흑맹이란 거대 조직을 해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많은 학생들은 이를 믿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일로 인해 본원의 학생들 중 누구도 이준의 실력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준의 영웅담이 널리 퍼질수록 비석의 구성원들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많은 학생들이 이준의 조직인 비석의 사람들에게도 경의를 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전설 속의 인물이 연금비약을 제조해 직접 비석의 구성원들에게 건네주기까지 했으니, 모두들 비석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이준은 비석의 누각 안에서 조용한 생활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종종 동수나 수혁, 류지안이 찾아오면 잠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조용히 외출을 할 뿐, 이준의 생활은 밀실에서 연금비약을 제조하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진지 어느 덧 보름, 마침내 이찬이 보낸 전서구가 비석의 누각에 도착했다.
* * *
이준이 비석의 누각에 올라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작고 느린 발걸음 소리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이옥과 여자 아이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
“오라버니…”
연보라색의 치마를 입은 청초한 소녀는 수줍은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준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안이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준은 곧바로 이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제 본원에서 할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된 것 같아. 남은 시간 동안은 산 속에 들어가서 수행을 좀 하려고. 그쪽 일만 다 해결하고 나면 다시 본원에 돌아올 생각이야.”
“꼭 그렇게 바쁘게 움직여야 해?”
“사실은 둘째 형이 가람아카데미로 찾아왔던 날, 당장이라도 가한제국으로 달려가고 싶었어. 그렇게 매일 같이 운남종에 쳐들어 가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으며 실력을 갈고 닦은게 벌써 3년이야. 이제 놈들에 맞설 힘이 생겼으니, 하루라도 빨리 가한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준의 결연한 말투에 이옥의 마음 한 켠이 바늘로 찌르듯이 아파왔다. 가문의 운명을 짊어진 지난 3년 동안 이준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면 알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삼촌은 항상 네가 이씨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 하셨지.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재능도 재능이지만, 널 보고 있으면 그것 이상의 뭔가가 느껴져.”
“하하…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운남종과의 일이 해결되면 곧바로 본원에 연락할게. 어쩌면 그 때 쯤에는 이씨 가문이 가한제국 최고의 가문이 돼있을지도 모르니까, 너무 우울해 하지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불안해하는 자신들을 달래려는 듯 애써 웃음을 짓는 이준의 표정에 이옥과 이안 모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