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화. 비석
준은 학생들의 수근대는 소리를 뒤로 한 채 곧바로 메두사와 함께 대장로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서재에 들어서자, 서천우가 기다렸다는 듯 걸어 나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준의 곁에 있는 메두사 여왕을 발견하는 순간, 노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아아, 대장로님 걱정하실 거 없어요. 지금은 아군이에요.”
이준이 서천우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고는 황급히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자, 노인은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메두사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한 번 떠났다 하면 수 개 월이 지나서야 돌아오니, 본원에서 제 멋대로 지내는 학생은 한 명도 없을게다. 껄껄!”
서천우의 한마디에 이준은 머쓱하게 웃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노인과 함께 의자에 앉았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래도 흑각성에서 제법 성과가 있었으니 그걸로 넘어가 주시지요.”
이준의 한마디에 대장로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그래. 샘화를 차지하고 연금비약 경매까지 열었다지?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으로 돌아온 것이냐? 설마 네가 아직 우리 본원의 학생이라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아직 졸업을 안 했으니 말이다.”
서천우가 장난스레 농을 던지자, 이준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두 달 내에 가한제국으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이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챈 서천우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지금 그가 가한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운남종과 자웅을 겨루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한제국에 돌아간다는 말이냐? 이렇게 빨리?”
서천우의 질문에 이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풀어야 할 매듭이 남아있으니까요. 게다가 벌써 3년이나 흘렀습니다.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요.”
이준의 단호한 표정에 서천우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내가 막는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니 막지 않으마. 하지만 조심하거라. 네 실력이 아무리 늘었다 해도, 운남종은 가한제국에 깊게 뿌리 내린 세력이다. 게다가 운산은 투종의 경지에 이른 강자이니, 지금의 너라 해도 쉽지 않을게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한 때의 굴욕을 참고 물러서 후일을 기약할 줄 아는 것도 용기다. 만일 일이 여의치 않으면 목숨을 걸지 말고 훗날을 기약하거라. 네 재능이라면 언젠가는 운남종을 뛰어넘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대장로님의 가르침, 가슴 깊게 새기겠습니다. 그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서천우의 진심 어린 조언에 감동한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하하. 고맙다는 인사는 됐다. 너처럼 훌륭한 학생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았으니…약존 어르신이 부러울 따름이구나. 나이를 먹으면 훌륭한 제자를 기른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되거든.”
“대장로님께서도 제 마음 속에서 항상 훌륭한 스승이십니다.”
준의 진심어린 감사인사에 서천우 역시 감동한 듯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혹시라도 내가 도울 일은 없느냐?”
“괜찮습니다. 게다가 이 일에 가람아카데미가 너무 깊게 개입하게 되면 모두에게 폐가 될 터이니, 제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다만, 제가 떠난 이후에 샘화에 있는 이씨 가문을 돌봐주실 수 있는지요? 흑각성이 워낙 험한 곳이니, 제가 떠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여러 세력이 그곳을 침탈할까 두렵습니다. 만일 이 일이 잘 마무리 된다면 아카데미에 돌아와 반드시 정식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허허…그래, 안심하고 다녀오너라. 가람아카데미 입장에서도 본원과 가까이 있는 샘화를 흑각성의 무뢰배들이 관리하게 두는 것 보다는 이씨 가문에서 관리하는 것이 좋으니, 네가 돌아오는 날까지 샘화를 지켜주도록 약조하마.”
“정말 감사합니다, 대장로님!”
샘화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뒤,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서천우가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뗐다.
“사실 내 마음 같아서는 운남종과의 대전에 힘을 보태주고 싶다만, 이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대장로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가람아카데미의 입장을 난처하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사실상 가람아카데미가 오랜 세월 다른 세력의 침탈을 받지 않은 것은 그 힘이 강대해서이기도 하지만, 철저하게 외부의 일에 대해 중립을 지켰기 때문이니까. 따라서 내가 너를 도울수는 없다. 다만, 일부 장로들은 학생으로 있다가 장로가 된 것이니, 이름은 장로지만 자유의 몸이나 다름이 없느니라. 결국 그들이 밖에 나가 무엇을 하든 본원의 규칙에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
서천우의 말은 임수혁이나 임동수처럼 학생 신분으로 있다가 졸업한 자들을 만나 그들을 아군으로 삼으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이준은 크게 감사하며 깊이 고개를 숙여 대장로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장로님!”
서천우의 서재에서 나온 준은 돌계단 위에 선 채 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서재 앞을 오가던 본원의 장로 몇 명이 이준을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학생들과는 대화조차 잘 나누지 않는 장로들도 많았지만, 이준에 대해서만큼은 어떤 장로라 해도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지?”
그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또 벙어리라도 된 줄 알았지.”
이준은 메두사 여왕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은 것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자신을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가자. 먼저 비석에 한 번 들러볼 생각이야. 이번에 가한제국으로 가게 되면 또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정리를 해둬야지.”
* * *
이준이 비석으로 돌아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며 이준을 맞이했다.
대청 위에는 오하늘, 이윤영, 임동수, 이옥 등 비석의 간부들이 옹기종기 모여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 이 녀석, 돌아 올 때마다 떠들썩하게 말이야. 네가 올 때 마다 난리도 아니라고.”
이옥이 자신을 흘겨보며 피식 웃음을 짓자, 이준 역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한 번 나가면 몇 달이 기본이구만. 이번에는 무슨 일로 돌아온거야?”
이옥에 이어 의자에 앉아있던 동수가 이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 돌아온 것은 내가 한 두 달 내에 가람 아카데미를 떠나 가한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야.”
이준의 말에 한껏 들떠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비석의 구성원 모두가 이준의 사정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가한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이윤영이었다.
“이렇게 빨리?”
이에 이준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미 준비를 끝냈어. 이씨 가문에서도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어.”
장내에 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 앉았다. 그러나 이번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비석의 구성원들이 앞 다투어 손을 들며 함께 가겠다고 아우성을 쳐댔기 때문이다.
“나도 같이 가!”
“대장, 나도!”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요!”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드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준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들과 함께 한다면 정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든든할 것 같았다. 하지만 준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가한 제국은 너무 위험해. 어쩌면 2년전 한샘과 흑각성의 강자들이 쳐들어 왔을 때 보다도 더 위험할지도 몰라. 그리고 너희가 다 떠나버리면 비석은 어떡해? 우리의 피와 땀으로 세운 거잖아.”
“그럼 나는 상관없지?”
그 때, 동수가 손을 흔들며 이준을 향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지금 본원에 남아 있어봤자 그다지 쓸모도 없고, 전에 약속한 것도 있고 말이야. 이번 기회에 견문도 넓히고, 여러모로 좋을 것 같은데?”
동수의 제안에 이준은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투왕이 되었으니, 무리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이미 학생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데리고 간다고 해서 가람아카데미의 입장이 난처해질 일도 없었다.
“하하…거절할 명분이 없네요. 선배는 이미 학생이 아니니 비석의 구성원도 아니고, 선배 정도의 실력이라면 크게 위험하지는 않겠죠.”
“그럼 나는? 저 자식도 가는데 나는 안 돼?”
그 때, 낭랑한 목소리 하나가 이준의 귓전을 때렸다.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뾰로통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여자 아이 하나가 보였다.
“마수의 구슬을 주기 싫어서 그러는거지? 이 거짓말쟁이야!”
이준이 망설이며 답을 하지 않자, 보람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주먹을 치켜 올렸다.
보람의 귀여운 협박에 이준은 울지도 웃지도 못 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죠. 그렇지만 제 말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아니면 다시 되돌려 보낼 거니까요.”
“흥.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뒤이어 이준은 시선을 윤영과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소식을 들었겠지만, 지금 우리 형이 흑각성의 샘화에 자리를 잡았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 갈 곳이 마땅치 않다면 샘화에 가서 「비석」의 이름을 대면 한동안 몸을 의탁할 수 있을거야. 원한다면 그곳에서 더 지내도 좋고, 그렇지 않다면 여비라도 받아서 떠나. 본원 밖으로 나가는 순간 「불의 힘」같은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으니, 당장 생활이 불가능하잖아. 이건 비석을 세워놓고 대장다운 역할 한번 해보지 않은 내가 너희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꼭 받아줬으면 좋겠어.”
“이씨 가문에 들어가라고?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흑각성은 너무 위험하다고.”
하지만 하늘과 윤영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강요하지 않는거야. 너희들이 선택해. 하지만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돌아갈 곳이 없는 학생이라면, 그곳에 몸을 의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거야. 게다가 나중에 이씨 가문의 규모가 커지면 오히려 가람 아카데미와 흑각성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몰라.”
준이 부드러운 말투로 다시 한번 권유하자, 윤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이럴 때 보면 머리 쓰는 게 제법이란 말이야. 본원에 들어올 정도의 아이들이라면 재능은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너희 가문의 힘을 키워보겠다는건 아니고?”
자신의 속내를 간파한듯한 그녀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이준은 멋쩍은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통수를 긁적였다.
“됐어 됐어, 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어. 다만 좀 얄미워서 말이지. 일단 나는 네 의견대로 졸업한 뒤에 샘화에 가서 이씨 가문을 찾아가볼게. 2년만에 돌아온 대장이 명을 내렸는데 안 따르기도 뭐하고 말이야.”
윤영이 장난스레 웃으며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더욱 민망함이 느껴졌다.
“아냐. 너희가 아니었으면 비석은 진작 해체됐을 거야. 내가 한 게 뭐가 있겠어.”
“됐네요. 우리 둘로 뭐가 되겠어, 다 이준 대장의 명성덕이지.”
그 때, 곁에 있던 하늘이 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흠…좋아. 일단 나랑 하늘이는 아직 투왕이 되지 못했으니, 가한제국으로 같이 돌아간다 해도 큰 도움은 안 될 거야. 그러니 여기서 비석과 샘화에 있는 이씨 가문을 관리해볼게. 만일 우리가 투왕이 된다면 합류하도록 하고. 어때?”
윤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이준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윤영과 오하늘 두 사람이 있는 이상, 앞으로도 비석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샘화에 있는 형이 사람 모으기를 기다려 가한제국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