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6화. 재회
다시 온 신경을 불꽃 조종에 쏟는 이준을 바라보던 메두사 여왕은 살며시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로 중얼댔다.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내가 대체 저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녀는 스스로도 자신이 했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반지를 둘러싸고 있던 물약이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약 솥 안에 든 초록색 불꽃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준의 기력이 바닥을 보이는 듯했다.
준은 이를 악 물고 온 몸을 엄습하는 피로감을 견뎌내며 청록색 화염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검은 반지를 바라봤다. 이제 곧 스승이 깨어날 것만 같은데, 자꾸만 눈이 감겨오고 정신이 흐려졌다. 결국 모든 기력을 다 쏟아부은 준의 몸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이를 바라보던 메두사가 황급히 벼랑으로 몸을 날렸다.
“젠장!”
메두사 여왕은 자신이 왜 하찮은 인간 따위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려야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거대한 돌 위에 놓인 붉은 약솥 안에 있던 약물이 완벽하게 반지 안으로 스며들며 반지가 돌연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무형의 파동이 파도처럼 퍼져 나가 약솥 내벽에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형태 없는 물결은 점점 더 빠르게 퍼져나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약솥에서부터 거대한 음파가 터져 나왔다. 뇌성과도 같은 음파가 산맥을 가로지르자, 거대한 삼림에 녹색 물결이 파도쳤다.
그리고 메두사 여왕의 팔이 이준을 붙잡는 순간…무언가가 번개처럼 날아들어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메두사의 팔을 붙잡은 장본인은 바로 반지에서 2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약로였다.
약로의 영혼체는 이제 거의 실체에 가까웠고, 온 몸 곳곳에서 영혼 에너지가 은근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너로군?”
한 눈에 약로를 알아 본 메두사는 잠시 멈칫하며 눈꼬리를 씰룩였다.
약로는 기절해 있는 이준을 보고는 얼굴 가득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칠색 이무기의 영혼과 융합하는데 성공했나 보군. 내가 잠에 든 시간이 꽤 길었던 모양이야.”
백발의 노인이 공중에 떠 있는 메두사를 보며 말했다.
“당신도 제법인걸. 2년이나 잠들어 있었는데 더 강해지다니.”
사실 방금 전까지만해도 그녀는 이무기의 영혼만 흡수한다면 눈 앞의 노인네보다 더 강해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잠에 빠진 시간 동안 쇠약해지는커녕 더욱 더 강해져 있었고, 이제는 칠색 이무기의 영혼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한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칠색이무기의 영혼을 흡수했으면서 아직도 준의 곁에 남아 있는 이유가 뭐지?”
뱀 여왕을 바라보는 약로의 눈빛에는 약간의 의아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성정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이 없었던 틈에 뭔가 일을 치러도 단단히 치렀을 터인데, 여전히 타르사막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이준을 해하지도 않은 채 곁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 내가 이 녀석이 예뻐서 붙어 있었겠나? 다 그 빌어먹을 연금비약 때문이지.”
“껄껄. 좋아. 이유야 어찌됐든, 내 제자가 살아있으니 됐지. 어쨌든 지금은 내 제자의 일이 더 급하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말을 마친 약로가 약솥을 향해 손을 내뻗자, 붉은 색의 쇳덩이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와 노인의 앞에 안착했다.
“이 약솥은……”
약솥 표면에 새겨진 생생한 마수 그림 무늬를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던 약로의 얼굴이 순간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이 약 솥은…「천사록」에 기록 된 「만수의 솥」이 아닌가?”
붉은 약솥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 본 노인은 메두사 몰래 그녀의 안색을 살피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저 계집은 이게 어떤 물건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곧이어 제자의 손가락에 끼워진 진 파란색 반지를 발견한 약로의 입가에 또 다시 옅은 미소가 어렸다.
“허…주인의 영혼 에너지를 각인시킬 수 있는 반지라니…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제법 소득이 있었나보구나.”
반지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약로는 준의 붉은 색 약솥을 허공에 띄운 채 몸을 돌려 왼쪽에 있던 산봉우리를 향해 날아갔고, 메두사 여왕은 약솥과 제자를 끌고 산봉우리로 날아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 *
은쟁반 같은 달이 하늘에 걸리자, 청량한 달빛이 산맥 전체를 신비한 은색으로 물들였다.
빼곡한 수풀 사이로는 모닥불이 은근하게 솟아올랐고, 은은한 붉은 빛이 산중을 따스히 밝혔다.
모닥불 곁에서는 폭삭 늙은 노인 하나가 검은 망토를 입은 청년의 이마를 짚자, 방대한 영혼 에너지가 흘러나와 메마른 영혼을 적셨다. 모닥불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나무 둥치 아래에서는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노인과 소년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뒤, 약로가 한숨을 내쉬며 제자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곧이어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니 연금비약 한 알이 나타나 이준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2년 못 본 사이에 영혼 에너지가 이렇게나 강해졌을 줄이야…실력은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을지 궁금하구나. 허허…”
제자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연금비약을 보며 약로는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의 제자는 반쯤 탈진해 있는터라 염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약로도 그의 정확한 실력을 측정하기 어려웠다.
그 때, 정신을 잃었던 준이 갑자기 기침을 하며 몸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또렷해지자, 그의 눈에 익숙한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노인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휴우…”
그리운 스승의 얼굴을 마주 하는 순간, 제자의 입가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실로 그간의 걱정과 고생이 모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스승님…”
약로는 2년 전에 비해 한결 성숙해진 제자의 모습에 그가 드디어 자신의 그늘을 벗어나 한 사람의 투사로, 또 연금술사로 자라났음을 실감했다.
노인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주름진 손으로 이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녀석, 잘 했다!”
약로의 칭찬에 이준은 베시시 고개를 저으며 또 다시 웃음을 지었다.
“채린,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바위에서 떨어지는 순간 정신을 잃었지만, 그는 희미하게나마 메두사가 그를 구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이준의 감사인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있었다.
“널 살린게 아니라 연금비약을 구한거야.”
끝까지 뻗대는 메두사의 태도에 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다시 스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더 강해지신 것 같네요.”
“허허, 그저 예전에 갖고 있던 힘을 조금 회복한 것뿐이다. 완전 회복하려면 몸뚱아리부터 어떻게 해봐야 할 것 같구나. 그보다, 구름불꽃은 어떻게 됐느냐?”
약로의 질문에 준의 입가에는 득의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완전히 제 것이 되었습니다.”
“껄껄껄! 역시, 실망시키지 않을 줄 알았다.”
이에 약로는 신이 나서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제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부활한 즉시 준의 몸에서 느껴지는 구름 불꽃의 힘을 미약하게나마 감지하기는 했었지만, 제자의 입에서 직접 확답을 들으니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음을 터뜨리는 약로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또 하나의 희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스승님…스승님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원수를 갚았다는 준의 한마디에 약로의 얼굴에 순간 미소가 번졌다가 이내 어두운 빛이 내려앉았다. 한참을 말없이 한숨을 내쉬던 노인은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맙다, 녀석아!”
웃는 듯 우는 듯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승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준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약로가 잠들어있던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샘을 죽였던 때의 이야기를 하자, 즐겁게 제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승의 얼굴이 일순 돌처럼 굳어버렸다.
“흐음…영혼의 궁전에서 놈의 영혼을 가져갔단 말이냐?”
약로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자, 이준의 마음속에 순간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왜 그러세요?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노인은 잠시 입을 다물고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놈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
약로의 한마디에 이준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설마…영혼의 궁전이 그 놈을 되살릴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나를 보면 알겠지만, 영혼의 힘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신체와 분리된 상태로도 살 수 있다. 물론 힘은 줄어들지만…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게다가 영혼으 궁전 놈들은 영혼체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지. 그들이 왜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영혼체를 잡아 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놈들이 영혼체의 천적인 것은 사실이지.”
노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한샘 그 녀석은 영혼의 궁전과 인연이 깊지. 날 독살하려던 때에도 영혼의 궁전 놈들과 손을 잡았었다. 그러니 한샘의 영혼이 놈들의 손에 넘어갔다면 그들은 분명 놈을 다시 부활시키려 들 게다.”
“그렇다면 한샘은 아직 완전히 죽은 게 아닌거군요…젠장…”
준이 아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스승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쉬워할 것 없다. 그래도 네 손에 한 번 죽었으니 영혼의 궁전 놈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살아난다 해도 예전 같은 힘은 없을거다. 그보다 지금 걱정되는 건 영혼의 궁전 놈들이 조만간 너를 찾아올 것 같다는 점이야. 내 영혼이 너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챘으니…”
“괜찮아요 스승님. 마침 저희 아버지의 실종도 그 녀석들이랑 관련이 있으니…오히려 찾아와 주길 기다리고 있는걸요.”
약로는 담담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는 준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그래, 지금 네 실력이라면 평범한 영혼 사냥꾼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게다. 하지만…놈들은 나조차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니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제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약로 역시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메두사 여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제지간에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자리를 피해줄 수 있겠나?”
약로의 말에 메두사는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이준을 한 번 노려보고는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떠났다.
“메두사가 칠색이무기의 영혼을 삼키고 저렇게나 강해질 줄이야. 예전 실력이었으면 지금의 나로도 충분했을 테지만…지금은 승부를 장담할 수 없곘구나.”
메두사가 자리를 떠나자, 약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하하, 스승님 너무 걱정 마세요. 적어도 일 년 동안은 저를 해치지 않을 거예요. 스승님이 안 계시는 동안 몇 번이나 메두사 여왕에게 도움을 받았는걸요.”
“허허, 이 약아빠진 녀석! 천하의 메두사 여왕을 구워 삶다니…그래도 조심하거라. 저 여자는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모르는 여자다.”
약로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의 표정만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