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315화 (315/818)

제315화. 회복의 물약

상황이 확실히 정리되자, 경매에 참석한 흑각성의 강자들은 저마다 감탄이 섞인 말을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앞으로의 일은 이제 형한테 맡길게. 오늘 경매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아.”

“하하, 그래. 내 동생이지만 정말 못 당할 녀석이야.”

동생이 떠나고 난 뒤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던 이찬은 시녀들이 들고 있는 은쟁반을 건네받아 본격적인 경매를 시작했다.

“하하. 그럼 저희가 판매할 첫 번째 연금비약을 소개하겠습니다……”

* * *

수 백 명의 무법자들을 깔끔하게 제압한 이준은 경매장 뒤편에 마련된 방에 들어가 조용히 차를 마시며 눈을 감았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로 미루어보아, 연금비약이 꽤나 순조롭게 팔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고마웠어.”

찻잔을 들고 잇던 이준이 고개를 돌려 한 쪽에 서 있던 메두사 여왕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준의 감사 인사에도 메두사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이었다. 그러나 싸늘한 표정과 달리, 메두사 여왕의 마음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준이 그녀를 향해 도움을 요청 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매번 거절하지 못 하고 그에게 끌려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녀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이준의 그런 넉살 좋은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나려한다는 것이었다.

메두사 여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준은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계속해서 한마디 대답조차 하지 않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댔다.

“사실 우리 사이에 그리 큰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예전에 지하에서는… 휴. 정말 고의가 아니었다니까.”

“네가 칠색이무기를 데리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지금처럼 귀찮은 일은 없었을 거다. 지하까지 내려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런데도 우리 사이에 원한이 없다고 말할 텐가?”

메두사의 날카로운 말투에 이준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나는 이무기가 당신이 진화하면서 나타난 모습인지도 몰랐다고. 내가 녀석을 애완동물 키우듯 대하면서 여왕폐하님의 체면을 구겼을 수는 있지만, 하늘에 맹세코 평소에는 조상신 모시듯 잘 챙겼어. 나도 아까워서 먹지 않고 있던 하늘 사자의 정수까지 먹여가면서.”

뜻밖의 반격에 메두사 여왕도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준이 정말 칠색이무기를 조상신 모시듯 대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소중한 하늘 사자의 정수를 아낌없이 내준 것만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 좋아. 그렇다면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따지지 않지. 하지만 용암호수에서 있었던 일은 어찌 설명할 테지? 우리 뱀인간들의 법도에 따르면 자신의 목숨을 노린 자의 머리를 잘라 성수의 연못에 던져 넣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어지는 메두사의 말에 준의 목덜미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의 성질머리라면, 정말로 목을 베서 호수에 던지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흥…하지만 그것도 제 정신이 아니었다 하니, 약속대로 혼백의 비약을 넘긴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리고 만일 이번에도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주지. 네 놈의 팔다리를 모두 자르고 눈을 파내 죽지도 살지도 못 하는 꼴로 만들어 두고 평생을 괴롭힐 것이다.”

메두사 여왕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남기고 또 다시 허공으로 사라졌고, 이에 이준은 머리를 움켜잡은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약속한 시점까지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 정도였다.

* * *

경매는 하루 종일 진행 되었고, 날이 다 어두워지고 나서야 완벽하게 마무리 됐다.

이번 경매에서의 수확은 두 형제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것이었다. 오늘 거둔 수익으로 이준에게 필요한 약재를 가져올 수 있음은 물론이고, 남은 돈을 이씨 가문의 운영 자금으로 사용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물론 경매를 열 수 있도록 도운 삼대세력에게도 아낌없이 수익을 덜어 주었다. 앞으로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처음부터 후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경매가 끝난 뒤 흑각성 곳곳에 이씨 가문의 이름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역시 이준과 이찬 모두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 약재를 잘 모아 연금비약을 제조하기만 하면 그리운 스승을 부활시킬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이준의 심장이 미칠 듯이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 * *

깊은 산 속. 끝없이 아득하게 펼쳐진 푸른색 물결이 바람을 따라 춤을 추었다. 간혹 가다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 때마다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며 만들어내는 하얀 점만이 녹색을 제외한 유일한 색이었다.

깎아지른 듯 한 절벽 중심부에는 산 벽으로부터 볼록하게 튀어 나온 괴석이 있었다. 비바람을 맞아 매끈한 표면을 가진 괴석은 기름이라도 바른 듯 반짝 반짝 빛을 내고 있었고, 그 위로는 검은 망토를 입은 청년이 바위보다도 더 굳건한 자세로 우뚝 서 있었다.

검은 망토 청년은 물론 샘화를 떠난 이준이었다. 이번에 약로를 깨우면서 큰 기척을 낼 게 분명했으므로, 샘화처럼 사람들의 눈과 귀가 많은 곳은 피하는 편이 좋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찬에게만 은밀히 자신의 행적을 알리고 다시 깊은 산중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준은 조용한 산속에 자리를 잡자마자 웃으며 또 다시 메두사에게 자신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채린, 부탁해. 이번에는 절대로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해.”

하지만 여인은 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대답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메두사 여왕의 그런 태도에 이미 익숙해진 이준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 하나 없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대답을 하지 않을 뿐, 그녀는 자신의 모든 부탁을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준은 손가락을 튕겨 붉은 색의 약솥을 꺼낸 뒤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이어 기이한 생김새의 약재들이 하나 둘 튀어나오며 신비한 향을 내뿜었다.

준은 진귀한 약재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한껏 들이마신 뒤 손가락을 펼쳐 불꽃을 피워냈다. 워낙에 고급 약재들이기 때문인지, 향만 들이켜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청록색의 불꽃이 약솥 안에 떨어지고, 잇달아 이준의 선택을 받은 약재들이 차례차례 솥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약재들은 천지의 불꽃의 무시무시한 온도에도 쉽사리 녹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약재들은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열기에 저항하기까지 했다.

이런 신비한 반응은 그 약재들이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진정한 보물임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방금 약 솥 안에 들어간 ‘백옥 산삼’ 같은 경우 이름은 산삼이지만 모양은 백골 형태와 비슷했다.

이런 뼈 모양 삼은 몹시 단단해 불꽃을 견디는 힘도 아주 강해 평범한 불로 제련한다면 최소 반년에서 일 년이 걸리기도 했다. 심지어 천지의 불꽃으로 제련한다 해도 며칠은 걸리는 것이 기본이었다.

* * *

이준은 침착하게 닷새 내내 약재를 제련했고, 닷새를 지나 엿새가 될 때 즈음에서야 단단하던 백옥 산삼을 백색의 끈적한 액체 형태로 녹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준은 하얗고 걸죽한 액체를 약솥 중 온도가 낮은 곳으로 옮긴 뒤 곧바로 다음 약재의 제련에 들어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이준 주변에 떠 있던 약재들이 하나 둘씩 약 솥 안으로 들어가 형형색색의 액체로 변화했다.

그렇게 산 속에 틀어박힌 지 어언 한 달. 마침내 모든 약재가 액체나 가루로 변하고, 그 액체들을 융합하는데 다시 일주일이 걸렸다.

* * *

액체들을 융합하고 또 다시 꼬박 한달 동안 이준은 죽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불꽃을 피워야 했다. 실로 천계의 탑에서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염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드디어 끝이 보이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낸 준은 긴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지난 한달 내내 불을 피워댄 통에 염력도 크게 늘었고, 무엇보다도 불꽃을 조종하는 능력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발전해 있었다.

그는 한 시간정도 눈을 감고 염력을 회복한 뒤 검은 반지를 조심스럽게 빼내어 그것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스승의 영혼이 담긴 검은 반지를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약 솥 안으로 던져 넣었다.

까만 반지가 약 솥에 들어가자, 청록색의 불꽃이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꽃이 반지와 접촉하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반지에서부터 흘러나오며 불꽃을 밀어냈다.

“주인을 보호하는 건가?”

검은 반지에서 나타나는 신비한 반응에 감탄하던 준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진득한 약물을 반지에 들이 부었다. 그러자 검은 반지는 마치 자신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이 무엇인지 알기라도 하는 양 영혼의 힘을 회복시키는 액체를 남김없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준이 손가락을 움직여 청록색의 불꽃을 다시 한 번 움직이자, 오묘한 빛깔의 액체 위로 청록색의 뒤덮였다.

그리고 온갖 진귀한 약재를 녹여 만든 액체가 거의 완벽하게 반지에 흡수되는 순간, 검은 반지에서 은은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스승님, 2년을 잠들어 계셨으니 이제 일어나셔야죠…”

* * *

구름을 꿰뚫고 우뚝 선 날카로운 산봉우리 위로는 거대한 바위 하나가 놓여있고, 그 위로는 검은 망토를 걸친 청년 하나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은 거대한 붉은 약솥에서는 청록색의 불꽃이 이글대고 있었으며, 그 불꽃 아래로는 신비한 광채를 품은 오색의 액체가 천천히 일렁이고 있었다.

액체가 점차 바닥을 드러내자, 그 속에 싸여 있는 조그마한 검은색 물체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반지의 색은 한층 더 깊고 어두워져 있었지만, 청록색의 불꽃에 의해 녹아내린 약재의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잠든 스승의 영혼을 깨우는 것은 달팽이가 산을 넘듯 느리고, 지루하며, 또 고단한 과정이었다.

산맥은 마치 딴 세상인양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어 적막에 휩싸여 있었고, 간간히 들려오는 산짐승과 마수들의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끝을 알 수 없는 적막속에서 또 다시 두 달이 흘렀다. 준은 두 달 내내 염력을 채우거나 식사를 하는 시간, 아주 약간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약솥 앞에 들러붙어 불을 피웠다.

어느새 주먹만 하던 액체 덩어리는 손톱만한 크기까지 줄어 있었고, 그 안에 담겨있던 온갖 영험한 기운들은 불꽃에 의해 녹아 반지 안에 흡수된 상태였다.

한편, 메두사 여왕은 산꼭대기에 있는 푸른 바위에 앉아 석 달 내내 불을 피우고 있는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데? 계속 불을 피워대다간 네 놈이 먼저 죽게 생겼구나.”

하지만 준은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정신을 집중해 다시 한번 청록색 불꽃을 피워내 그것을 약솥 안에 던져 넣었다. 손을 떠난 화염이 약솥 안을 다시 뜨겁게 달구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메두사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설마 내 걱정을 해주는 거야?”

“네가 혼백의 비약을 만들기도 전에 죽어 버릴까봐 걱정하는 거다. 너 따위는 언제 죽어 나자빠져도 상관없어. 혼백의 비약만 남기고 죽는다면 말이지.”

“헤헤. 걱정 마. 아직은 버틸만 하니까. 약속한 연금비약도 꼭 줄 거고.”

괜찮은 척 웃음을 지었지만, 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장장 두 달이나 불꽃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염력을 소모해야 했고, 불꽃을 조종하기 위해 들어가는 영혼 에너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이상은 확신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