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1화. 이씨 가문
천천히 시간이 흘러 마침내 첫 번째 혈관을 모두 뚫었을 무렵에는 이미 닷새가 지나 있었다.
첫 번째 경험 덕분에 두 번째 경맥을 뚫는 것은 더욱 수월했다. 속도는 여전히 느렸지만, 이 역시 다른 사람과 비교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였다.
첫 번째 경맥을 뚫고 열흘이 지나자, 두 번째 혈관이 뚫렸다.
생각지도 못한 순탄한 수련 속도에 이준은 좋아서 입을 헤 벌린 채 연신 웃음을 지어댔다. 이 정도 속도라면, 한 달이면 세 번째 혈관을 뚫을 것 같았다.
……
한 달이라는 시간 역시 빠르게 지나갔다.
그렇게 수련을 시작한지 한 달 하고 보름, 마침내 산봉우리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청년이 천천히 감겨진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는 아직 채 갈무리하지 못한 힘이 넘실대고 있었다.
푸르른 녹색 잎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광활한 숲의 거대한 바위 위, 검은 망토를 입은 청년 하나가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되새기던 청년은 갑자기 바위 위에서 몸을 날려 바닥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산의 힘!”
청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손바닥 위로 강렬한 빛이 폭발했다. 빛이 번쩍임과 거의 동시에 힘차게 손을 내밀자, 눈부신 섬광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고, 그의 손바닥이 향한 곳에 자그마한 구덩이 하나가 생겨났다.
바위 위에 착지한 청년은 바닥에 생긴 흔적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망할…무슨 무투기가 이렇게 수련하기가 어려워. 정말 이게 다섯 개의 힘중에 첫 번째라고?”
세 개의 혈관을 뚫은 지 벌써 닷새 동안 「산의 힘」을 익히는데 매진했건만, 도통 진전이 없었다. 이 무투기가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려면 바늘구멍에 실을 꿰듯 정확하게 체내의 염력을 운용해야 했을 뿐 아니라, 완벽하게 염력을 압축한 뒤, 그 힘이 정점에 달했을 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타이밍에 방출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까 전처럼 염력이 제대로 폭발하지 않아 전혀 위력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골치 아픈 것은, 체내의 염력 운용과 인을 맺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이었다. 2격 무투기인 「태양검」을 익힐 때조차 이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다.
“휴…괜히 상급 무투기가 아니네. 천천히 하는 수밖에 없지 뭐.”
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고 수련 상태에 돌입했다. 「산의 힘」은 최고급 무투기답게 한번 사용할 때 마다 대량의 염력을 필요로 했으니, 염력의 소모 속도 역시 상상을 초월했다.
현재 그는 투왕 최고 단계에 이르렀으며, 구름 불꽃을 삼킨 이래 그의 염력 수련법인 「불개」역시 2격 하급 정도 수준까지 진화해 염력의 회복속도는 이전과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물론 이는 준이 수련 시 염력이 회복되는 속도를 보며 추측한 것일 뿐, 실제로 「불개」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심장의 불꽃과 화련, 태양검과 두 개의 천지의 불꽃 등 전체적인 전력을 고려하면, 그는 사실상 투황급의 강자와 맞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준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 하고 있었다. 가한제국으로 돌아가 투종 운산과 맞붙기 위해서는 아직도 힘이 부족했다. 게다가 운산 역시 지난 2년간 놀고먹지는 않았을 테니, 더욱 큰 힘이 필요했다.
염력이 모두 회복되자, 준은 이를 악문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제길…! 반드시 성공시키고 말겠어.”
청년은 산꼭대기에 선채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을 응시하며 쉴 새 없이 두 손을 움직여대며 새로운 인을 만들어냈다.
* * *
한샘이 죽고 흑맹이 와해되자, 이찬은 한샘의 도시에 남아있던 잔당을 깨끗이 쓸어버린 뒤 그곳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찬이 한샘의 도시인 ‘샘화’를 차지한지 보름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자, 흑각성의 모든 세력들은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한샘의 도시가 무주공산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곳을 차지하려 들지 않았던 것은, 가람 아카데미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주가 지나도록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조직이 샘화를 차지했음에도 가람아카데미 본원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니, 한샘의 죽음 이후 그곳을 노리고 있던 많은 세력들이 하나 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샘화는 지난 2년 간 흑맹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흑각성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발전해 있었으니, 그곳의 경매장이나 시장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수익 역시 만만치 않았다.
비록 한샘이 죽고 흑맹이 와해되며 이 도시의 위세도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규모면에서나 인구면에서나 흑각성 내에서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곳 이었다.
결국 3주가 지나도록 본원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흑각성 곳곳에서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가람아카데미에서 가만히 보고 있지 않으리란 생각에 아무도 도시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벌써 3주째 아무런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본원이 ‘샘화’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이찬이 샘화를 차지한 뒤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흑각성에 운집한 수많은 세력 중 하나가 도시를 침공했다.
하지만 4성 투왕을 필두로 백 여 명의 투사를 이끌고 샘화에 진입했던 그 세력은 마치 거대한 괴물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듯 다시는 성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샘화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식 역시 들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샘화에는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4성 투왕을 가진 세력이 소리 소문 없이 전멸했다는 것은, 현재 그곳을 차지한 세력이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유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샘화’라는 거대하고 달콤한 유혹이 존재하는 이상, 평화는 그리 오래갈 수 없었고, 결국 보름 정도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다가 또 다시 세 개의 세력이 연합해 ‘샘화’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이찬에게 전해졌다.
손을 잡고 침공하는 세 개의 세력은 ‘흑맹’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무려 세 명의 투황 강자를 포함하고 있었으니, 이찬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세 개의 세력이 동맹을 맺고 ‘샘화’로 진격한다는 첩보를 전해들은 바로 그 날, 전서구 한 마리가 성벽을 넘어 가람 아카데미 방향으로 향했다.
쾅!
거대한 청녹색 염력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산봉우리로 떨어지는 순간, 굉음과 함께 온 산이 세차게 뒤흔들렸다.
이준은 창백한 얼굴로 무너지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청록색 날개를 단 청년의 그림자가 쑥대밭이 된 산봉우리 위에 내려앉았다.
“괜히 2격 상급 무투기가 아니군. 이제 막 익혔는데도 위력은 「태양검」수준이라니…”
구구구구…
이준이 감탄어린 표정으로 소모된 염력을 회복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하늘 위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준은 새하얀 비둘기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날개를 펼치고 하늘 위로 올라가 새하얀 비둘기를 붙잡았다.
비둘기의 다리에는 작은 대나무 통이 있었고, 그 안에는 고이 접힌 새하얀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빠른 속도로 편지를 훑어본 준은 곧바로 손가락을 튕겨 종이를 태워버린 뒤 돌연 저 멀리 펼쳐진 숲 쪽으로 몸을 돌렸다.
“채린! 빨리 가야 할 일이 생겼어!”
준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숲 속에서 일곱 빛깔의 빛이 터져 나오며 사람 모양의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그를 향해 날아왔다.
“흑각성에 가야 할 일이 생겼어. 가자.”
“감히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냐?”
메두사는 불쾌하다는 듯 싸늘한 표정을 지었지만, 준은 넉살좋게 웃으며 곧바로 날개를 펼쳤다.
“왜 이래, 약속했잖아. 1년 동안은 나를 도와주기로. 「혼백의 비약」이 필요 없어진 거야?”
준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 보지 않고 흑각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빠르게 사라지는 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메두사는 분을 못 이기고 주먹을 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분해도 「혼백의 비약」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 결국 이를 갈면서도 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준은 굳이 본원에 연락을 취하지 않고 메두사만을 대동한 채 샘화로 향했다. 지금 그의 실력과 메두사의 힘이라면, 본원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준과 메두사의 힘이라면 흑각성을 통째로 쓸어버릴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
샘화에 침공한 세 개의 무리는 「반달」과 「은빛 칼날」, 그리고 「사자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력으로, 흑각성 전역에 이름을 떨친 조직들 이었다.
게다가 삼대 세력의 수장은 모두 흑각성 전체에서 열 손안에 꼽는 강자로, 예전에 한샘이 흑맹을 만들었을 때도 자신들의 독자 세력을 유지할만큼 하나 같이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안의 주민들 중 대부분은 누가 이 도시를 차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그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떤 통치자가 승기를 잡든, 도시의 최하층인 그들의 삶과는 무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몇 몇 사람들이 이 싸움에 관심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단순히 보기 드문 강자들의 싸움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약 삼십 분 전, 세 무리의 투사들이 성문을 통과했고, 현재 그들은 과거 이곳의 지배자였던 ‘약황’ 한샘의 거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 * *
과거 한샘의 거처였던 하늘 정원의 회의실 안에서는 네 세력의 수장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은 현재 한샘을 통치하고 있는 ‘이찬’이었고, 반대편에는 반달과 은빛 칼날, 그리고 사자단의 수장들이 서 있었다.
“그쪽이 「이씨 가문」의 수장인가?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하지. 한 시간 내에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곳은 곧 피바다가 될 거다.”
통나무처럼 두꺼운 팔뚝 위에 포효하는 사자 문신을 새긴 중년의 사내가 피식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깔깔.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중년 남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곁에 있던 여인 하나가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의 왼쪽 귀 바로 아래에는 아름다운 검은 꽃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여인의 곁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앙상한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껄껄…나는 몸을 안 써본지가 오래라…평화롭게 일을 마무리 하고 싶네…”
그리고 세 사람의 뒤로는 백 명 가까이 되는 강자들이 맹수처럼 사나운 눈으로 이찬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찬은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은 채 피식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세 분에 대해서는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흑각성 내에 명성이 자자하시더군요. 하지만 만일 제가 이 도시를 넘긴다 하더라도, 세 분 중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 것 입니까?”
이찬의 담담한 태도에 꽃 문신을 새긴 여인이 묘한 눈빛으로 이찬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도시가 누구 손에 들어갈 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 일이니, 당신은 당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성을 떠나시기만 하면 됩니다.”
“떠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이 세력의 수장은 제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잠시 저희 쪽의 수장이 오시기를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이 허락한다면 곧바로 성을 비워드리지요.”
“큭큭…네 놈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구나. 우린 네 놈에게 성을 비워달라고 부탁을 하러온 게 아니란 말이다. 당장 꺼져.”
사자 문신을 한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거만한 말투로 말하자, 이찬의 등 뒤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투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이에 맞서 반대쪽 세력들의 투사들이 무기를 꺼내려는 순간,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리며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하하. 우리 이씨 가문 더러 샘화를 떠나라는 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