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거래
“흑각성의 세력들을 재통합시키겠다고?”
장로 회의실 안에서 이준의 계획을 듣던 서천우가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대장로님, 저도 흑각성이 그 동안 가람 아카데미에 얼마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형이 놈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본원에도 득이 될 것입니다. 가람 아카데미의 학생과 그 형이 통솔하는 조직이 흑각성을 평정했는데 감히 아카데미를 공격할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를 듣는 노인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자, 이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대장로님. 저에게는 꼭 제 세력이 필요합니다. 운남종과 저희 가문 사이의 일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비석의 아이들을 그런 일에 동원할 수는 없으니, 흑각성에 제 세력을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설마 제가 흑각성을 통합한 뒤 본원을 공격하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이준의 간곡한 부탁에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서천우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후…좋아. 이번 기회에 흑각성을 깔끔히 정리하면 본원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그럼 대장로님도 동의하시는거죠?”
이준이 뛸 듯 기뻐하며 말했다.
“동의하지 않으면 어쩌겠느냐, 지금 본원의 보물인 천계의 탑이 돌아가는게 누구 덕인데, 게다가 골치 아픈 흑각성 놈들까지 정리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다만 한 가지, 네가 흑각성을 통합하려는 과정에서 그에 대항하기 위해 놈들이 또 다시 흑맹 같은 것이라도 만드는 날에는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겠다 싶어서 잠시 고민을 좀 해본 것이다. 하지만 네 실력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 한샘조차 너에게 패배했으니…”
“하하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서운합니다. 대장로님이 이 일에 동의하지 않으셔도 설마 제가 본원에 더 이상 구름 불꽃을 제공할 수 없다고 협박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하하, 이 녀석, 제법 의리가 있구나. 그래, 내가 오해를 했구나. 미안하다.”
이준의 넉살 좋은 태도에 서천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좋다, 네 둘째 형에게 안심하고 행동하라고 전하거라.”
서천우의 시원스러운 답변에 이준의 얼굴에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그보다, 상처는 괜찮으냐?”
“네, 별 문제는 없습니다.”
“하하, 정말 대단하구나. 그렇게 심각한 상처를 입었는데.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어찌 되느냐? 둘째 형을 도와 흑각성에 갈 것이냐?”
서천우가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며 물었다.
“흑각성의 일은 우선 형에게 맡겼습니다. 만약의 경우에는 제가 가봐야하겠지만 말이죠. 저는 그 사이 수련을 좀 하려고요.”
준이 말한 ‘수련’이란 바로 「제왕의 권」을 익히는 일이었다. 이런 최고급 무투기는 쉬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니, 운남종과의 싸움에서 비장의 카드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흐음…그래. 그보다, 한가지 더 물을 것이 있다. 어째서 들어본 적도 없는 투종급 강자가 네 주위를 멤도는 것이냐?”
조금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하지만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으니, 준은 대장로에게 숨김없이 메두사 여왕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허허, 메두사 여왕이라니. 생각지도 못했구나. 게다가 더욱 성장한 메두사라니, 어쩐지…”
이야기의 전말을 알게 된 노인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농을 던졌다.
“그나저나 담도 크구나.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나 감히 천하의 메두사 여왕을 죽이려 했었다니…그런데…내가 알기로 그녀는 인간을 벌레처럼 여긴다 들었는데, 어째서 번번히 너를 그냥 보내주는지 의문이구나. 내가 듣기로는 투기 대륙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던 세력 하나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고 하던데…어쨌든 조심하고 또 조심하거라. 이제 투종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더 미쳐 날뛰겠느냐.”
살기로 눈을 번뜩이던 메두사 여왕의 얼굴을 떠올리자, 또 다시 준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물처럼 흘러 내렸다.
“아하하…그러게요…그건 저도 참 의문이네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 또 조심해야지요…”
이준이 씁쓸하게 웃으며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서천우가 기묘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허허…그래도 한번 누군가를 섬기면 평생을 충성할지도 모르지. 마수의 피가 섞인 자이니…그 본능이 어디 가겠느냐. 다만 그 전에 네가 목숨을 잃지 않을지 걱정이구나.”
* * *
회의실을 나선 이준이 다시 비석으로 돌아와 대장로의 말을 전하자, 이찬 역시 뛸 듯이 기뻐하며 준에게 몇 가지를 당부하고는 급히 본원을 빠져나갔다.
이찬은 가람성에 있던 자신의 수하들을 집결시켜 곧바로 흑각성으로 돌아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이준은 비석에서 이틀간을 더 머물다가 홀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 * *
깊은 산, 끝없이 펼쳐진 풀 숲 사이로 거센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카롭게 솟은 산봉우리 위에 자리한 커다란 암석 위에서는 이준이 가만히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돌처럼 꼼짝도 않고 수련하기를 수 시간…갑자기 이준의 눈꺼풀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의 영혼 탐지 능력에 익숙한 기운이 감지된 것이다.
“나와요, 당신이 날 따라다닌다는 거 알아요.”
그 순간, 허공이 꿀렁이며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 놈이 정말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메두사 여왕이 아무것도 없는 하늘 위를 천천히 걸어 내려오며 말했다.
“맨날 죽인다 죽인다 말만…”
“뭐라고?”
너무나도 대범한 이준의 태도에 메두사 여왕의 눈꼬리가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흥, 맨날 죽인다 죽인다 말만 많다고 했어요. 정말 날 죽일 수 있어요? 칠색 이무기랑 영혼이 융합되면서 뭔가 이상이 생긴건 아니고요?”
준의 말이 이어질수록 메두사 여왕의 안색이 점점 더 흉폭하게 일그러졌다.
“네…네 놈이 감히…”
“됐어요. 그것보다, 당장 날 죽이지 않을거면 거래 하나 하는게 어때요?”
이준이 또 다시 무언가를 제안하자, 메두사 여왕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이런 저런 거래로 이준을 따라다닌지가 벌써 몇 년 째인데, 한 번도 대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당연했다.
“칠색 이무기가 당신한테 미치는 영향력을 없애서 당신이 진정한 메두사 여왕이 될 수 있도록 도울게요.”
하지만 이어지는 준의 말에 메두사 여왕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널 어떻게 믿고?”
이준이 손을 휘젓자, 소매에서 두루마리 하나가 튀어나와 메두사 여왕의 손에 떨어졌다. 그것을 펼치는 순간, 메두사 여왕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혼백의 비약. 알고 있어요? 그건 혼백의 비약의 조합표예요. 날 도와주면, 그걸 만들어줄게요. 그거면 칠색 이무기의 영혼을 떼어내고 당신의 영혼을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어요.”
실로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결국 메두사 여왕은 냉담한 척 하면서도 거래의 조건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요구?”
“1년만 제 곁에 있어 줘요. 하지만 절 죽이려고 하지는 마시구요.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청할 테니, 거절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리고, 약속한 1년이 되면 연금비약을 만들어 드릴게요. 그때가 돼서도 저를 죽이고 싶다면 뜻대로 하시구요. 어때요?”
이에 메두사 여왕은 눈을 번뜩이며 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마도 그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허… 참! 6레벨 연금비약인 혼백의 비약이라니까요, 혼백의 비약. 칠색 이무기를 몰아내고 진정한 메두사 여왕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빌어먹을 자식이… 좋아. 이번에도 약속을 어긴다면 반드시 널 찢어 죽여주마.”
활짝 웃는 이준을 바라보며 메두사 여왕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일단 칠색 이무기 영혼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면, 반드시 이놈을 찢어 죽이고 말 테다. 그녀는 그 말을 몇 번이나 가슴속으로 되뇌었다.
그 때, 그런 메두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준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는 동료예요.”
“동료는 무슨!”
“좋아요, 좋아요. 그럼 동맹! 뭐라고 부르든, 우리는 이제 대등한 관계예요. 그러니까 메두사라고 부를게요. 아니면 새로운 이름을 하나 지어드릴까요? 사람들이 메두사 여왕이 인간과 함께 다니는걸 보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네 이놈! 감히!”
“음, 「채린」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 당신이랑 잘 어울리는데.”
메두사 여왕은 벌컥 화를 냈지만, 이준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재잘재잘 떠들어대며 제 멋대로 그녀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꺼져! 나는 메두사 여왕이다. 네 놈과 함께 다닌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놈이 있다면 그 놈을 찢어죽이면 그만이야!”
말을 마친 그녀는 씩씩 거리며 몸을 돌려 허공으로 사라졌다.
“에이, 부끄럽구나! 부끄럽죠? 인간 친구 처음 사귀죠? 처음에는 다 그런 거예요. 어디가요! 에이씨, 어차피 이 주위에 있을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까 이 주변 좀 살펴보면서 다른 사람이 절 방해하지 못하게 해주세요. 예상치 못하 사고가 벌어지면, 우리 거래가 무효가 될 수도 있다구요!”
결국 메두사 여왕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사라졌지만, 이준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이러나 저러나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대충이라도 수습되었으니, 이제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헤헤, 살아서는 웬수 같던 사형이 죽어서 이렇게 도움을 주네. 이런 특이한 연금비약의 조합표까지 가지고 있다니.”
이준은 신이 나서 손가락에 낀 대양의 반지를 연신 쓰다듬었다.
“이제야 좀 안전하게 제왕의 권을 익혀볼 수 있겠군.”
메두사 여왕과의 문제를 정리한 이준은 곧바로 거대한 바위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제왕의 권」의 수련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몰랐지만, 다섯 개의 힘 중 가장 위력이 약하다면 산의 힘조차도 태양검과 비슷한 습득 난이도를 가지고 있었다.
“흐음, 과연… 어지간히도 익히기 어려운 무투기군. 체내에 세 가지 길을 뚫어야만 익힐 수 있단 말이지?”
이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의 몸속에 위치한 수 많은 혈관을 하나 하나 빠짐없이 살폈다. 두루마리에 기재된 정보에 따르면, 오른손과 어깨에 있는 미세한 혈관 세 개에 대량의 염력이 지나다닐만한 통로를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특정한 혈관을 확장시켜야만 쓸 수 있는 무투기는 습득 난이도가 그야말로 극악하다고 할 수준이었으나, 제대로 사용하게 되었을 때의 위력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2격 무투기인 「태양검」조차도 이런 수련을 요하지는 않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제왕의 권」이 가진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흠…”
준은 천천히 정신을 집중하고 통로를 만들 세 개의 혈관을 유심히 살폈다. 세 개의 혈관은 바늘 멍보다도 더 작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것을 뚫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또 다시 정신을 집중하자, 가느다란 염력이 몸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며 혈관의 미세한 구멍을 뚫고 천천히 흘러 들어갔다.
혈관을 뚫는 것은 엄청난 아픔이 동반되는 일로, 염력이 그곳을 통과하며 혈관이 확장되는 순간 생겨나는 극심한 고통은 도저히 인간이 견딜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염력이 가느다란 혈관을 뚫는 순간,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묘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혈관을 다시 살펴보던 이준의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커졌다.
“아닌데…잘되고 있는데…왜 안 아프지?”
구름 불꽃과 사투를 벌이는 사이 자신의 근육과 뼈, 내장은 물론 모든 혈관과 세포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모르는 준은 이 영문을 모를 상황에 끊임없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만일 평범한 사람이 혈관을 뚫으려고 했다면, 그 즉시 염력의 부하로 혈관이 찢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알건 모르건 그의 혈관은 이미 투왕을 넘어 투황급 이상의 강자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강도를 자랑했으니, 새로운 혈관을 뚫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