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8화. 대양의 반지
무지갯빛 염력을 흩뿌리며 사라지는 메두사 여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천우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허…참으로 이상하구나. 왜 또 그냥 물러난단 말인가. 나와 자신의 실력 차이를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을 터인데…저토록 살기를 내뿜으면서도 매번 그냥 물러나니, 참으로 속을 알 수 없는 여인이구나.’
“휴우…”
하지만 그런 서천우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등 뒤에 숨어있던 준은 털썩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쯧쯧…이놈아. 대체 어쩌자고 저런 강자에게 원한을 샀단 말이냐. 나조차도 저 여인과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승산이 없을 터인데…”
대장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차자, 이준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 때, 준의 손에 끼워진 짙푸른 반지를 발견한 서천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투종 강자가 놀랄 정도의 물건이라니, 귀한 물건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준이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값이 나가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오호라? 이건 대양의 반지가 아니냐? 한샘이 이것을 얻으려고 그리도 애를 썼었는데…”
이에 이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전리품일 뿐이죠.”
“껄껄. 그래. 한샘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은 저 여인이지만, 사실상 네가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 물건도 네가 챙기는 것이 맞겠구나.”
서천우가 흡족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한샘이 죽었으니, 흑맹도 끝장난 것이나 다름이 없구나.”
반면 이준은 무언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게도 바다의 불꽃은 얻지 못했네요. 아까 그놈이 영혼체를 가져갔을 때 바다의 불꽃도 따라가 버렸어요.”
“허허, 대양의 반지를 얻고도 바다의 불꽃을 얻지 못해 아쉬워하다니, 욕심도 많구나.”
아쉬워 하는 준의 어깨를 두드리던 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사뭇 진지해졌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영혼의 궁전이 널 노린다는 것이다. 그 신비한 세력은 투기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조직 중 하나이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거라.”
서천우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정작 영혼의 궁전의 사냥감이 된 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그놈들이 절 찾으러 오지 않아도, 머지않아 제가 그들을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준의 당돌한 발언에 서천우는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허허…그래. 참으로 대범하구나. 그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아직 은 실감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네 재능이라면…언젠가는 정말로 그들을 찾아갈지도 모르겠구나. 그보다, 지금은 몸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 몸으로 영혼의 궁전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친 서천우는 곧바로 몸을 돌려 다시 본원의 장로들을 향해 날아갔다.
이준은 멀어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 * *
격렬했던 대전투가 끝난 후, 흑각성은 조금씩 평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두머리를 잃은 흑각성 최대의 조직은 얼마 가지 않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사실 흑맹의 구성원은 하나같이 과거 흑각성에서 꽤나 두각을 나타낸 세력들로, 이 세력들 중 대다수는 서로 엇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흑각성의 패권을 두고 충돌하거나 반목하던 세력들도 많았다.
결국 이런 세력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6레벨 연금술사가 제공하는 막대한 보상 때문이었으니, 한샘이 사라진 이상 조직이 와해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한샘이 죽은 바로 다음 날 김씨 형제가 자취를 감추면서, 흑맹의 붕괴가 더욱 가속화되었고, 이후 모든 세력이 앞다투어 빠져나가며 고작 일주일만에 흑각성 최대 세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가람아카데미와 흑각성의 전쟁은 가람아카데미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 * *
준은 본원에 돌아오자마자 비석의 누각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한 채 치료에 전념했다.
투종에 이른 한샘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준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은터라 7일 가까이 치료에 전념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씩 상처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부상의 심각성을 고려한다면, 일주일만에 상처가 낫기 시작한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 이었다. 만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보름에서 한 달 정도는 지나야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을 것이고, 부상이 남긴 후유증으로 인해 몇 년이나 고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준 역시 구름 불꽃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일이 아니었더라면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몇 년이 걸렸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평범한 투사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고, 진귀한 연금비약의 힘이 보태지니 그 회복 속도는 실로 경이로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석의 조용한 밀실 안…은은한 달빛이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침대 위로 내려 앉았다.
침대 위에 앉아있는 검은 옷의 청년은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앉아 천천히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청년의 몸은 마치 밑 빠진 독처럼 끝을 모르고 주위의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그렇게 다시 한참이 지난 어느 순간, 청년의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돌며 주위의 공간이 잔잔하게 물결치다가 다시 바람 한점 없는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청년이 눈을 뜨는 찰나, 칠흑같이 새까만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던 청록색의 화염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후…”
가슴 한 켠에 남아있던 탁한 공기를 내뱉자, 독성을 품은 새까만 기운이 일렁이다 사라졌다.
“2년 사이 몸속에 남아있던 각인 독도 완전히 사라졌구나.”
마침내 자신의 몸에서 각인 독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 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내려앉았다. 2년 간 불지옥 속에서 생활한 덕분에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던 각인 독이 이번 싸움을 계기로 완전히 그의 몸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상처도 완전히 나은 것 같군.”
잠시 후, 몸속에서 충만하게 넘실거리는 염력을 확인하던 준은 아쉬운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흠…하지만 아직도 투황이 되지 못 하다니…좀 의외인걸.”
용암 동굴에 떨어지기 전, 이준의 실력은 5성 투령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불지옥에서 겪은 여러 가지 기이한 일들로 인해 그의 염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덕분에 동굴에서 나왔을 때는 정상급 투왕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준은 이런 폭발적인 성장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 천천히 기반을 다지면서 성장하는 것을 중시해왔지, 당장 몇 계단을 뛰어넘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도치 않게 기초를 다지지 못 하고 한 번에 여러 단계를 뛰어넘었고, 이로 인해 내실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기초가 부족하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도 어렵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염력을 완벽하게 다루지도 못 하고 있었다.
‘정말로 운이 좋았어. 한샘이 완벽한 「불개」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거야.’
한샘과의 격전을 상기하자, 자신의 결점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화련을 만드는데 그쳤지만, 자신의 사형은 불완전한 수련법을 가지고도 복잡한 형상의 마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는 적어도 불꽃을 통제하는 능력과 염력을 세밀하게 조종하는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한샘이 자신을 한참이나 앞서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두 개의 천지의 불꽃과 완벽한 염력 수련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간신히 승리를 손에 넣었다. 준은 투종 강자와의 사투에서 승리했다는 기쁨에 취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점검하고 그것을 보완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런 자세야말로 준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훅!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청록색의 화염이 그의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준은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이 융합되어 생겨 난 새로운 화염을 가만히 응시하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는 두 가지 불꽃이 합쳐져 만들어진 이 새로운 불꽃에 무언가 멋진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청록색의 아름다운 색상과 자신의 필살기가 되어버린 화염 연꽃을 떠올리자, 제법 그럴싸한 이름이 만들어졌다.
‘유리련심화’
간단한 이름이었지만, 이준은 그 이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이화에게 이름을 부여할 자격을 가진 이가 투기 대륙 전체에 몇 이나 되겠는가! 먼 훗날 자신의 이름이 투기대륙에 전체를 호령할 날이면, 그의 불꽃 역시 무수히 많은 강자들의 머릿속에 새겨지리라. 그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만면에 미소가 지어졌다.
준은 자신의 유리련심화가 천지의 불꽃 중에서 얼마나 높은 순위를 차지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제법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두 불꽃 모두 스승의 불꽃보다는 순위가 낮았지만, 어찌됐든 바다의 불꽃보다는 강력했으니, 적어도 열손가락 안에는 들지 않겠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불꽃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그것을 다시 두 개로 나누어 보았다.
“이제부터는 불꽃 통제하는 능력을 수련하는데 집중해야겠어. 모처럼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얻었는데,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 하면 너무 아까울 테니까.”
손가락 끝에서 춤을 추는 두 가지 색의 불꽃을 바라보던 준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된 사형의 진청색 불꽃이 만들어낸 마수의 형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불꽃이 그 정도 수준까지 연마된다면 어떤 파괴력을 낼지 생각하자, 운남종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손끝에서 어른거리는 불꽃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준은 자신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푸른색 반지를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반지 속에서 새까맣고 고풍스러운 두루마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원기둥 모양의 두루마리에서는 신비로운 빛이 은은하게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이은이 남긴 마지막 선물을 꺼내들자, 연꽃처럼 청아했던 소녀의 뒷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은아…”
청년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신 뒤 자신의 손에 들린 새까만 두루마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 이거…어떻게 열지?”
위아래를 뒤집어가며 두루마리를 살펴보던 준은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열어야할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으로 열려다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검은 두루마리를 앞에 두고 고민하기를 한참…준은 ‘반드시 투왕이 되어서 이것을 익히라.’는 이은의 말을 떠올렸다.
‘뭘까…? 투왕이 되면 달라지는 것…날개? 아니지, 두루마리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날개를 편다고 이게 열릴 리가 없잖아. 그럼 뭘까…’
“끄응…!”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자, 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다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를 수 분, 문득 준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투왕…투왕이 된다는 건…결국 염력이 성장한다는 거잖아.’
생각을 마친 준이 손에 든 두루마리에 염력을 불어넣는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손끝을 타고 흐르던 염력이 거짓말처럼 두루마리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이거였어!”
염력을 계속해서 불어넣자, 두루마리 주위에서 은은하게 감돌던 빛이 점점 더 짙은 색을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삼십 분도 넘게 계속해서 염력을 흡수했음에도 두루마리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그리고 이준이 또 다시 고민에 빠져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사이, 갑자기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두루마리가 열렸다.
“역시! 이거였어!”